E,AHRSS

구품관인법

last modified: 2015-12-14 22:34:57 Contributors

九品官人法

Contents

1. 개요
2. 시초
3. 발안
4. 특징
5. 변질
6. 결과
7. 평가

1. 개요

중국의 관리등용제도중 하나. 구품중정제로도 불린다. 삼국시대의 위나라 문제인 조비가 시행한 후,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서 당나라시절에 과거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될 때까지 오랜 기간 존속했던 제도로, 중국의 문벌귀족계층을 탄생시키고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공로를 한 제도다.

2. 시초

춘추전국시대에는 대개 부모의 관직과 작위를 자식이 세습하거나, 군주와 개인적으로 알게 되어서 특별히 등용되는 형식으로 관리로 채용되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인재들의 전기를 보면, 연줄을 타고 군주와 대화(=면접?)를 나누고 말빨을 드러내서 임용되는 일화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말 그대로 정말 실력이 뛰어나고 명망이 높은 소수의 인재들에 한정된 예외적인 사례였고, 이러한 인재 충원은 비교적 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관직과 작위는 세습되었기 때문에 사회 전반적으로 귀족적이었다.

한나라 시절에는 초창기에는 위와 같은 방법을 따라 관리의 채용 방법은 세습 임용이나 특별 등용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문제 시기부터 각 지방에 인재를 '추천'해서 올리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비상설적인 '천거'가 시작된다. 천거령이 여러 차례 반복되다가 아예 상설화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향거리선제이다.

유교 사상에 따라 지방관과 지역사회 내에서의 여론과 인품에 따른 채용을 하는 향거리선제는 기본적으로 군국제에서 시작해서 지방 통제력이 약했던 한나라가 종법적 가족질서와 유교정치를 바탕으로 지방 세력을 중앙정부로 끌어들이는 연결고리로 작용하였다. 즉 지방 호족의 자제가 천거되어서 중앙관료가 되면서 지방호족들이 중앙정계에서 떨어져나갈 동인을 상실하였고, 이것을 유교적 시스템으로 포장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는 한나라 시대에 일반적인 관리 임용 방법이 되었다.

특히 애초에 지방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시작해서 지방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광무제가 건국한 후한시기는 향거리선제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었다. 이 시기의 향론은 후한의 발달한 경제와 으로 대표되는 교육기관을 통한 민간 인재 육성 때문에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한말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안정적으로 작동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유력자들의 여론을 고려하여 천거한다라는 구조였기 때문에 지방 유력자들의 자제들만이 천거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고, 선발 기준이라는 것이 유교적 도덕률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에 이를 검증할 방법이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후대로 가면 무능하고 딱히 도덕적이도 못한 인물들이 천거된 반면에 설혹 유능한 인물이라도 악평이 돌면 천거되지 못했다[1].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호족들이 중앙 관직으로 진출하는 시스템인 향거리선제에도 불구하고 실제 후한의 시스템이 전혀 다른 형태를 보여준 것은 지방과는 상관없이 존재했던 중앙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환관과 외척이다. 중앙의 황제는 지방에서 올라온 관료들에게 대항하여 자신의 측근세력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서 지방에 권력의 근거를 두지 않는 환관을 중용하고, 일부 세력을 외척으로 삼아서 자신의 측근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환관과 외척을 측근세력으로 둔 황제권과 지방 호족들이 기반이 된 중앙관료들이 세력균형을 이룬 것이 후한 초중반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일정시기가 지나자 중앙관료들은 지방호족으로서의 모습보다는 중앙관료로서의 정체성이 더욱 강화되면서 중앙귀족의 모습이 더욱 강해지면서 이런 대립구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권력이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적 시스템으로 이행되어 가던 찰나에 하필이면 황제들이 잇달아 요절하면서, 중앙권력을 둔 대립이 벌어졌다. 바로 중앙귀족의 수장의 위치가 된 외척과 환관이 그 예이다. 이 과정에서 강해지던 황제권은 역으로 추락했고, 외척과 환관의 권력다툼에 지방에서 올라온 호족들이 엮이면서 향거리선제도 같이 무너졌다. 특히 영제 시기에 부패가 극심해지면서 매관매직마저 성행하니 사실상 향거리선제는 그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수재로 천거된 이가 글을 모르고 효렴으로 천거된 이가 부모와 별거하고 욕심이 많으며, 용감한 장수라고 천거된 사람은 닭처럼 겁이 많다포박자의 글은 천거제를 기반으로 한 향거리선제의 근본적 한계가 이 시기에는 완전히 걷잡을 수 없었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멈춰버린 향거리선제가 재기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파탄을 맞은 것은 한말의 대전란이었다. 향거리선제는 향론(鄕論)을 바탕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제도인데, 엄청난 수의 민간인이 서주대학살 등의 살육을 당하고, 전란을 피해 다른 지방으로 집단으로 이주 하거나, 권력자의 정책에 따라서 '강제 이주'를 여러 차례 당하면서 기존의 향촌 사회는 아예 붕괴돼버렸다. 예를 들어, 원상을 따라 오환 땅으로 이주했다는 인구가 약 10여만 호 이상, 조조와 손권이 유수구에서 전투 벌일 무렵에는 조조가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리자 여강, 구강, 기춘, 광릉의 백성 10만호가 강동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인구가 우르르 이동하니 향촌 사회가 기존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니 향거리선제를 부활시켜서 인물천거를 하는 기존 방법을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이 와중에 잠깐 모습을 등러내는 것이 명사들의 인물평이다. 당고의 금 이후에 청담에 포함된 인물들이 자신들의 인맥이나 경험을 통해서 지역 인물들을 평가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향거리선이라는 공식적인 루트를 대체한 것이다. 이 때 인물평으로 유명한 것이 '월단평'으로 유명한 허정허소이고, 형주의 수경선생 사마휘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렇게 인물평을 들어서 유명해진 인물들이 명사이고, 이런 명사들이 다시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삼국지의 초기 인물형성 구조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조조이다. 조조는 인물평을 받기 위해서 허소를 찾아갔고 갖은 노력 끝에 치세능신 난세호웅[2] 혹은 청평간적 난세영웅[3]이라는 평을 듣고 기뻐한 것도 이를 통해서 탁류에 속해있던 자신이 청류의 세계에서 명사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태위를 지낸 명사인 교현이 조조를 높이 평가한 것은 조조가 명성을 얻는데 아주 크게 작용했다[4]. 그리고 자신이 세력을 세운 뒤로는 여론보다 다소 낮은 관품을 내린 뒤에 실력을 보고나서 그에 준하는 관품을 내리는 방식을 사용해서 인재를 즉시 채용하는 정책을 쓰게 된다. 예를 들어 순욱순유의 추천으로 정욱을 등용하고, 정욱의 추천으로 곽가를 등용하고, 곽가의 추천으로 유엽을 등용하고, 유엽의 추천으로 만총여건을 등용하고, 만총과 여건의 추천으로 모개를 등용하는 피라미드 상법 같은 인재등용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방법은 긴박한 상황에서 인재를 모집할 때는 도움이 되었으나, 안정된 사회에서 많은 인재를 끌어모을 때는 그렇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한데, 군주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단 1사람이 전체 영토의 인재를 찾아내고 등용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결국 등용한 신하의 추천으로 또다른 신하를 등용하는 꼴이 되므로 중앙정부와 연줄이 없는 사람은 등용되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조조가 반복적으로 내린 것이 구현령이고, 이 구현령에서 내건 것이 불인불효 유재시거이다. 이걸 한 마디로 요약하면 만일 능력있는 사람이 있어서 스스로 자천해온다면 그 사람에 대한 향론이나 인간적 평판은 무시하고 오로지 능력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평가해서 발탁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유교적 틀을 벗어났다라는 것만 강조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춘추전국시대로의 회귀이다. 모수자천을 통해서 오기와 같이 인격적으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나, 전한초기의 명신인 같이 인물에 대한 악평이 존재하는 인물도 뽑아쓰겠다는 것은 국가적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인 자신이 스스로의 역량과 인물 판단을 바탕으로 직접 관료를 선발하겠다는 형태이다. 이는 한참 이후에 황제에게서 직접 시험을 보는 전시에 아주 살짝 영향을 주게 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군주의 역량에 지나치게 좌우되면 극도로 많은 자천자가 등장할 때에 군주가 이를 다 처리할 수 있을리가 없다라는 근본적 문제가 존재하게 된다. 결국, 인물을 추천함에 있어서 유교적 도덕률이라는 방패로 마음대로 배제하지 말라고 하는 인물 추천 가이드라인의 제공이라는 의미와, 능력있는 사람은 나서라는 공식적 선언 정도로 끝나게 된다. 무엇보다 이는 조조 당대에 한정되었으며, 조비만 해도 의외로 유교적 정서가 강했기 때문에 공식적 제도로는 발전할 수가 없었다.

3. 발안

이런 문제점을 감안하고 유교 사상에 따라 각 지역의 존경받는 인재를 끌어모으기 위해 진군(陳群)이라는 대신이 조비에게 구품관인법을 제안하여 실시하게 된다.

구품관인법은 명목상 한나라의 향거리선제와 조조의 유제시거를 혼합해서 장점만 추려서 만들었다고 하며, 지역 여론인 향론에 따라 현명함과 덕이 있음을 기준으로 개개 인물의 서열을 매겨서 현자와 유덕자의 계층조직을 형성하도록 함으로서 지속적으로 양질의 인재를 중앙정부에 등용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한계가 드러나버렸다.

4. 특징

  • 벼슬의 단계를 1품에서 9품까지 9단계로 나눈다. 따라서 한나라 시절에 녹봉의 차이 정도로 불명확하게 구분되던 관직[5]이 모든 관직을 위계와 품등으로 명백하게 구분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관직에 따른 권한 및 위계질서가 성립하게 된다.
    이는 중국내에서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18반으로 세분화하거나, 정과 종을 도입해서 세분화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원래 제도의 뜻대로 사용되었으며, 한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다. 심지어 한국의 공무원제도에도 9급 공무원 하는 식으로 흔적이 남았다.

  • 기존에 벼슬을 하던 사람들중 명망이 높은 사람을 선정해서 각자의 출신지인 군국에 따라 각각 군국의 중정(中正)이라는 관직에 임명한 후, 해당 지역에서 인재를 찾아서 추천하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각 중정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서의 향론을 듣고, 타 지역까지 흘러간 사람들까지 명단을 작성해서 향품(鄕品)이라는 품등을 매기고, 장(狀)이라는 상신서를 붙여서 중앙정부에 보낸다.
    이렇게 한 이유는 전란시절에 많은 인재들이 고향을 벗어나서 타향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기에 고향사람을 시켜서 찾아내게 한 것이다.

  • 중앙정부는 중정의 상신서를 받은 후, 해당 인재를 등용할 지 여부를 결정한 후, 등용할 경우에는 향품보다 4단계 낮은 품계를 준다. 그리고 해당 인재는 벼슬살이를 지속할 경우 중정이 준 향품까지 승진이 가능하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일단 추천이 들어와도 한번 시험적으로 낮은 관직을 준다음, 성실하게 근무하고 실적을 쌓으면 승진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향론도 무시하지 않아서 너무 낮은 향품을 받은 사람이 중앙정부에 들어와서 안면을 바꾸고 높은 직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도 만들었다. 즉 실력만 있고 인품이 비천한 사람은 고위급 관료가 못된다는 이야기다.

일단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 이론상으로는 중앙정부의 생각과 각 지역의 여론을 종합해서 융화시킬 수 있으며, 실제로 위나라의 조정내의 관료기구와 각 지방 사족이나, 호족들의 여론을 안정화 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리고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면서 시행 초에는 전란으로 흩어진 사족을 재규합하고 묻혀버린 인재들을 발굴하는 등 긍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5. 변질

하지만 이 제도가 생각한 것처럼 잘 돌아갔다면 혹평을 받을 이유도 없고 과거 제도가 도입될 사유도 없었을 것이다.

  • 중정이 너무 강력한 권위를 가진다. 아무리 현지에서 인품이 좋고 여론도 좋은 인물이라고 해도 중정에게 잘못보이면 아예 기록이 안되거나, 하품의 상신서가 올라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중앙정부에 아예 채용이 안되거나, 채용이 되더라도 평생 하급직책만 전전하다가 퇴임하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번 중정에게 찍히면 나중에 출세해서 편파적인 중정을 갈아버린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출신 가문이 매우 대단한 경우를 제외하면 개인의 노력으로는 절대로 원래 정해진 향품을 수정할 수 없으므로 무슨 수를 쓰건간에 중정에게 잘보여야 한다. 이에 따라 각종 뇌물과 향응이 오가는 등 온갖 로비가 벌어지면서 현지의 민심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 나눠먹기식 인사가 가능하다. 중정은 말 그대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견제할 수단이 없는데다가, 진짜로 중립을 지키는 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각 중정들끼리 담합해서 자신들과 관련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품의 상신서를 올리거나, 서로를 중정으로 추천함으로서 자신들을 지지하는 세력인 파벌을 만들 수 있다. 반대로 나눠먹기에 끼어들지 않거나, 끼어들 수조차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잘 해봐야 평생 하급직책만 전전하게 된다.

  • 평가기준이 분명하지도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다. 평가기준에서 효, 덕이나 인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은데, 이들 요소를 공정하게 측정할 기준 자체가 없다. 게다가 능력도 실제 시험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해당인에 대해서 주변인과 명성이 높은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으로 판정하므로 정확한 판단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최대한 공정하게 진행한다고 해도 명성만 높고 실력이 바닥인 허풍선이들이 고위직에 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 문제는 향거리선제 시기부터 존재했던 고질적인 문제인데, 향거리선제의 천거 시스템을 이어받은 구품관인법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 공정하고 정확하게 진행하려고 할수록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가는 것에 반해 반발만 많아진다. 대상자를 분류하는 과정부터 불효나 부덕, 불충등의 사유를 파악하게 되는데, 대부분 이런 분야에 대해서는 흠결이 거의 없으므로 사소한 위반사항이 엄청난 문제가 되는 꼬투리 잡기 식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유능하고 명성높은 인재가 어쩌다가 3년상중에 병이 나서 여종에게 간호받았다는 사소한 이유 하나로 불효 항목에 걸려서 하품을 받는 어이없는 사태가 일어난다. 그리고 하품의 판정을 받은 사람중 문벌귀족에 속하는 사람들은 가문의 힘을 써서 중정에게 항의를 하거나 중정을 실각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높으신 분의 자제들은 엄청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상품의 판정을 주게 되므로 출신 가문이 어딘가에 따라서 사실상 판정이 결정나게 된다.

  • 각 지역의 여론인 향론이 강력하면 그나마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대혼란속에서 각 지역의 향론은 지역이 황폐화되고 지역민들이 유랑하면서 붕괴된지가 오래였다. 역설적이게도 애초에 향론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면 구품관인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따라서 향론이라고 해도 사실상 중앙정부의 중정이 생각한 향론이 돼버리므로 중앙정부에서 생각한 인물이 추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형식적으로만 지역민심을 감안하는 제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때문에 구품관인법의 또 다른 이름이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가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점을 파악한 사마씨들이 기존의 군중정 위에 주대중정(州大中正)을 설치함으로서 완전히 높으신 분이 관직을 나눠먹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그 이유는 주대중정은 기존의 군중정보다 더 큰 주라는 광역에서 인재를 추천할 수 있으며 고위관료가 주대중정을 겸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제도가 시행된지 얼마도 지나지 않은 서진시대에 이미 상품(上品)에 한미한 가문 출신이 없고, 하품(下品)에 세도가 집안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명문가 출신인지 아닌지만 따져서 관직을 주는 제도로 완전히 변질하고 만다. 이렇게 되면 명문가에 태어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고위관료가 될 수 없으므로 높은 벼슬을 하는 사람이 대대손손 계속해먹는 사태가 일어나게 된다. 가문을 잘 만나야 높은 벼슬하는 이 더러운 세상 한마디로 말해서 음서따위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개막장인 제도가 되었다. 그러라고 도입한 제도가 아닐텐데

6. 결과

구품관인법의 도입은 호족이나 명문가가 독점적으로 고위관직에 오르는 길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해당 호족과 명문가가 대대손손 고위관직에 오르면서 일종의 귀족계층인 문벌귀족을 만들게 되었고 이를 계속 유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남북조시대쯤 가면 쿠데타로 인해 국가가 교체되고 황제가 다른 가문으로 교체되더라도 귀족계층은 그대로 유지될 뿐 아니라 귀족이 되고 안되고는 귀족들만 결정이 가능한 웃기지도 않는 사태가 발생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가가 망했는데 기득권층은 그대로라는 소리다.[6]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는 황제라도 귀족들이 우리보다 한미한 가문 운운하면서 뒷담화를 할 수 있으며, 황제가 추천한 인물이라도 귀족들 마음에 안 들면 귀족이 못되며, 고위관직에도 오를 수 없었다. 이는 결국 남조의 각 국가들이 개막장이 되는 큰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여기에 당시 유행하던 청담사상까지 결합하니, 양(육조) 말기쯤 가면 고급귀족들이 마치 신선처럼 보이게 치장하고 살면서 실무가 뭔지도 모르는 생활을 영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예를 들어 남조 세족 자제 왕자유王子猷는 환충桓沖의 기병참군騎兵參軍을 맡고 있었는데, 환충이 그에게 어떤 직책에 있냐고 묻자 "모르겠습니다. 가끔 말을 끌고 오는 걸 보니 마굿간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환충이 말 몇필을 관리하냐고 묻자 "말을 모르는데 그 수를 알 까닭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했고, 환충이 "말이 얼마나 죽었는가?"라고 묻자 "산 것도 모르는데 죽은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결국 환충이 목을 따버렸... 그런데 이런 사례가 오히려 세설신어 같은 책에서는 속세에 연연하지 않는 '미담'으로 취급받았으니 세상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구품관인법은 겉으로만 보면 참 이상적인 제도로 보이며,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법칙으로 보였기에, 북조에도 이런 제도가 적극적으로 수입되었다. 결론은 북조도 남조를 따라서 중앙정부에 있는 사람들만 혜택을 받는 꼴이 발생하게 되고, 이에 따라 푸대접을 받던 국경수비대나 부족의 원천지에 남은 원래 부족민들이 반발하는 통에 육진의 난이 일어나서 국가가 무너지고 장기간 나라가 두쪽으로 갈려서 내전을 벌이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게다가 이미 구품중정제의 문제점은 조위시대말에 하후현이나 두예가 폐지를 건의할 정도로 익히 잘 알려진 상태였으나, 이 제도의 좋은 점을 알아차린 귀족 계층들이 지금은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니오 절대적으로 이 제도를 사수하려고 했다. 덕분에 수나라 시절에 확실한 대체제인 과거제도가 도입되었어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고, 당나라 후기 안사의 난부터 시작하여 황소의 난까지의 전란으로 문벌귀족들의 지역 기반이 초토화된 후에야 비로소 과거제가 제대로 실시된다. 과거 제도는 자신이 장원급제를 해도 자손이 과거에서 떨어지면 엿을 먹는 격이 되므로 대대손손 해먹기가 힘들기 때문에 실력 위주로 인재를 선발한다는 중요한 장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에 걸처 하급 관료만 선발하는 제도로만 운영된 셈이며, 이들의 지역 기반이 초토화되고 과거 급제자에 대한 인식이 상향된 후에야 본래 취지대로 운용되었다 할 수 있다.

이 제도를 폐지할 수 없던 황제들이 궁여지책으로 상급 직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하급 직책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도록 만든다던지, 측근들끼리만 정책을 결정한다던지 하는 대책을 내놓았지만 관료체제에 혼란이 발생하고, 부패가 가중되는 사태가 발생해서 오히려 결과는 더 안좋아졌고 안그래도 혼란한 정국이 더 혼란해졌다.

마지막으로 하급직책에서도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게 되는데, 상기되었듯 처음에는 낮은 품계를 주기 때문에, 명문가에 태어나서 고위품계로 올라가는 하급직책은 청요직이라고 해서 대접받고 나머지는 멸시받는 사태가 일어난다. 황당하게도 상설 업무가 적고 숙직을 하면서 천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가벼운 업무인 낭관(郞官) 같은 것이 주로 청요직으로 대접받고 그 밖에 상설 업무가 있어 일이 바쁜 벼슬은 탁직으로 여겨져서 꺼려졌다. 게다가 이렇게 한 이유도 가관인데 높으신 분들이 될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실제 업무를 담당하다가 실수나 사고라도 치면 경력에 금이 가기 때문에 나중을 위해서라도 좋은 대우와 평판을 받으면서 위험성이 적고 한가한 업무에 종사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놀고먹는 놈이 더 대접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청요직에 있는 사람은 그냥 대기순번 탄 셈이니 다른 사람이나 깔보면서 자신의 업무를 등한시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더러운 꼴을 보고 자신이 승급하지 못할 것을 깨닫고 부패의 길로 나서게 되니 정말 답이 안나오게 된다. 실무능력이 낮은 인물들이 고위직으로 올라가면서 관료들의 업무능력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게 된다.

7. 평가

결국 구품관인법도 의도는 좋았다. 시작부터 말아먹으려고 만들리가 있나(...)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인 경우에 포함될 수 밖에 없다. 제도 자체만 본다면 여러가지 좋은 제도를 섞어서 잘 칵테일해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 제도를 운영할 사람들을 모두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정직하게 행동하며 중립을 지키는 훌륭하신 분으로 보았다는 허점을 드러내면서 해먹은 놈이 계속 대대손손 해먹는 제도로 빠르게 변질하게 된다.

조위 초기에 잘 돌아갈 때는 본래 목동 출신으로 하급 관리였던 등애 같은 인재가 추천되는 등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같은 시기에 이미 종회가 등애가 출신이 낮다고 무시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귀족화 경향이 매우 빠르게 나타났다.

게다가 제도가 제대로 돌아간 기간이 극히 적고 변질된 형태로 돌아간 기간이 압도적인데다가 여기에 더해서 겉으로는 진짜 좋은 제도처럼 보이지만 속을 보면 썩을 대로 썩어있는 레몬과도 같은 제도였으므로 해당 제도의 개선이나 폐지를 어렵게 만드는 중요한 문제점도 만들어냈다.

따라서 이 제도에서 유일하게 장점을 찾을 수 있다면 관직을 9단계로 세세하게 구분함으로서 관료제를 체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또한 촉한정통론이 자리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촉은 제갈량의 영향으로 인해 철저한 실력제일주의가 자리잡아 있었고 멸망 직전에도 제도적으로 기득권의 이익을 보장하여 개천룡이 못 나오게 막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는 단순히 천거에만 의존하여 차라리 위의 구품관인법이 더 낫다 싶을 정도로 시스템이 원시적이었다. 당장 국왕과 측근세력과 지방 토호들이 서로간의 이해관계로 묶인 사이나 다름없어서 중앙집권도 약하고 내전도 잦았으니.
----
  • [1] 이런 점 때문에 조조는 유재시거를 선포하면서, 불인불효도 상관없다라고 해서 당대에 충격을 주게 된다.
  • [2] 삼국지 위지 무제기 기준
  • [3] 후한서 기준
  • [4] 이와 같은 명사의 평가를 얻어내지 못하면 몸으로 때워야 했다. 손견은 명사인 원술의 밑에서 일했고, 유비는 공융을 도우러가면서 자기 이름 한 마디 언급해준다고 감격한다.
  • [5] 모호한 관직 가운데 대표적으로 '자사'와 '태수'가 있다. 언듯 생각하면 한 '주(州)'를 맡는 자사가 한 '군(郡)'을 맡는 태수보다 우위에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자사는 본래 태수와 동격이던 '군자사'를 각 군에 두는 것을 폐지하고 한 주에 한 명씩 두도록 간소화한 것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자사는 녹봉이 태수보다 낮았고, 후한 초에는 위상도 별 볼일 없었다.
  • [6] 유송이래 남조의 창업군주들이 전부 한미한 무장 출신이다보니 권위를 인정받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이 귀족세력을 포용해야했다. 귀족들과 별개로 한미한 가문 인사들을 임용하지 않았던건 아니지만 제대로 된 관료제가 아니라 측근정치 형태가 되다보니 이들은 이들대로 문제를 일으켰다. 이러한 양상을 제대로 된 관료제로 개편하려 시도한 인물이 양무제 소연인데 말년에 지치고 후경의 난까지 겹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