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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사야코

last modified: 2015-04-11 23:55:54 Contributors

黑田淸子

Contents

1. 개요
2. 어린 시절
3. 성년기
4. 가족들과의 좋은 관계
5. 요시키와의 만남과 약혼
6. 사야코 공주의 결혼이 일본에 미친 영향
7. 결혼에 따른 사야코 공주의 변화
8. 결혼 후의 생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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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의 2남 1녀 중 막내. 1969년 4월 18일생.

미혼 시절의 이름은 노리노미야 사야코(紀宮淸子) 내친왕. 2005년 11월 15일 평민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다.

외모로 인하여 (특히 젊은 시절 미인이었던 어머니와 비교되어) 한국의 네티즌들에게도 퍽 유명하다. 모과꽃과 모과 같은 모녀 외모지상주의의 큰 피해자 중 하나이다.[1]

2. 어린 시절

일본 황족들이 다 그러하듯 가쿠슈인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졸업했다. 다만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의 1년 동안, 다른 민간 유치원에 다녔다. 언젠가는 시집가서 출가외인이 될, 게다가 평민이 될 딸이라는 생각에 그런 듯하다. 황족이라도 어린 나이이며 또래의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로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조카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처럼 상당한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는 매년 어머니 미치코 황후[2]와 짧은 여행을 다녔는데, 시집살이로 힘들던 미치코 황후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자라면서는 점점 부모의 공무(公務)에 동행하는 모습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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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3월,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를 졸업하는 사야코 공주. 이후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를 거쳐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에 진학했다.

3. 성년기

1989년 4월 18일, 만 20세로 성년이 되었다. 축하 행사도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해에 할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하여, 야! 신난다~ 다음 해 3월로 연기되었다.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했다. 성적이 우수하여 주위에서는 대학원 진학도 권유했으나, 사야코 공주는 조류 연구소 근무를 택했다. 야마시나(山科) 조류 연구소에서 비상근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주 2회의 통근 시에는 스스로 만든 도시락을 가져가서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헤이본샤(平凡社)에서 출판된 《일본동물대백과》 중 '물총새' 항목은 사야코 공주의 작품이기도 하다. 일본 황족들 중에서 일을 하여 급여를 받은 인물은 사야코 공주가 최초였다고. 연구소에서 받은 급여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모아두었다고 한다. 사야코 공주는 돈을 잘 쓰지 않아서, 궁내청 측에서는 그녀에게 지급하는 금액을 줄였을 정도라 한다. 일 좀 해라, 황족 니트들이여

그 외에 안내견 육성과 자원봉사 등에도 흥미가 많다고 한다. 를 좋아하며, 만화책 및 애니메이션도 좋아한다고. 영어, 요리, 일본무용 등 특기도 많다고 한다. 일본무용의 경력은 20년이 넘어,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황족으로서 국내외의 공무 활동도 꾸준히 했다. 1997년에는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여 일본문화센터 개관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3]

4. 가족들과의 좋은 관계

사야코 공주는 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와 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몸이 아플 때 열심히 그 곁을 지켰으며, 특히 시집살이로 모진 고통을 겪은 어머니에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1993년 실어증에 걸렸던 미치코 황후를 내내 간병했기에, 미치코 황후가 이듬해에 회복되자마자 한 말이 "사야코."였다고. 미치코 황후는 하나뿐인 딸을 시집보내며 "사야코는 내가 울적해 있을 때 곁에 다가와서 위로해 주는 딸이었습니다. 나의 친정어머니[4]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시집가는 딸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할 것 같습니다."라며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작은올케 키코 비와는 같은 가쿠슈인 출신이어서, 키코 비가 황실로 시집오기 전부터 친하게 지냈다. 조카인 마코 공주카코 공주고모인 사야코 공주를 잘 따랐다고 한다.

착하고 성격 좋기로 소문났다. 상냥하고 친절하며 의지되는 성품이라고. 어머니를 간병한 에피소드나, 학창 시절에 황족(특권계층)이라는 이유로 심한 이지메를 당했지만 꿋꿋이 이겨낸 것,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이 황족 모임에서 시녀를 희롱하다 큰오빠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꾸짖음을 듣자 오히려 화를 내어 큰 싸움으로 번질 뻔했을 때[5], 두 오빠를 말린 것이 사야코 공주였다는 이야기 등등. 사야코의 성품이나 일화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나 루머가 단 하나도 없는 것으로 미루어 허언은 아닌 듯.

5. 요시키와의 만남과 약혼

남편이 된 구로다 요시키는 도쿄 도청에서 근무하고 있는 평민인데, 사야코 공주의 작은오빠인 후미히토 친왕과는 가쿠슈인 동창이며 절친한 친구이다.[6] 자연히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는 어려서부터 알고 지냈을 것이다. 이후 2003년 후미히토 친왕이 주최한 테니스 시합에서 두 사람은 재회하여 사랑을 키우기 시작했다.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사야코 공주의 사정 때문에, 주로 궁성 내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전화이메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2004년 12월 30일 약혼을 발표했다. 본래 약혼 발표는 11월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니가타 현의 지진과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高松宮喜久子) 비[7]의 사망으로 인해, 2차례나 미루어졌다.

6. 사야코 공주의 결혼이 일본에 미친 영향

덴노의 딸이 시집가는 것은 무려 45년 만의 일[8]이어서, 일본열도는 오랜만의 경사에 들떴다. 한 경제연구소의 분석에 의하면, 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이 결혼 관련업계에 미친 파급효과가 무려 1,160억 엔(약 1조원)에 이른다고.

참고로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의 결혼은 양쪽 다 만혼에 해당한다. 요시키는 40세, 사야코 공주는 36세. 사야코 공주의 고모들이 모두 17~21세에 시집간 것과 비교해 보면, 시대의 변화도 있지만 대단히 늦은 셈. 그러나 사야코 공주는 평소부터 "내 결혼 시기는 내가 정하겠습니다."라며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결혼할 것임을 밝혔고, 많은 일본 여성들은 사야코 공주의 태도에 깊이 공감했다고. 이는 최근 일본 여성들의 만혼 풍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AFP통신에서는 전했다.

7. 결혼에 따른 사야코 공주의 변화

결혼과 함께 사야코 공주의 신상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먼저 황족의 신분을 잃고 남편을 따라 평민이 되었으며, 이름도 미혼 시절의 '노리노미야 사야코'에서 남편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사야코'로 바뀌었다. 운전면허도 취득했으며, 처음으로 은행 통장도 만들었다. 호적과 선거권도 가지게 되는 등 일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들이 주어졌다. 결혼을 앞두고서는 일반 가정에 가서 요리를 배우는 등 신부수업도 받았다. 품위 유지비로 1억 5,250만 엔(약 13억 2,000만 원)의 돈도 받았다.

본래 황실의 결혼식은 궁성에서 치러지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요시키와 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은 데이코쿠(帝國) 호텔에서 치러졌다. 약 150명이 초대되어 간소한 티타임 형식으로 치러진 이 결혼식에는, 요시키의 상관인 천하의 개쌍놈 이시하라 신타로도 초대되었다고. 처음으로 황실의 결혼식을 맡은 호텔 측에서는 긴장하여 만반의 경비와 보안을 했다고 한다. 심지어 하객들의 사진을 일일이 입수하여 대조했다는 소문도 있으나, 호텔 측에서는 "손님에게 큰 실례"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한 하객의 말에 따르면 "결혼식장에 올 때 청첩장 봉투를 꼭 지참하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봉투에 적힌 주소와 이름이 명단과 일치하지 않으면 입장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한다.[9]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 및 민영방송 5사는 대대적으로 결혼식을 중계하여 방송했다. 사야코 공주의 막내 고모시마즈 타카코[10]가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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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에서. 일본 황실의 전통에 따라, 사야코 공주는 신랑 요시키와 함께 나란히 걷지 못하고 3발자국 뒤에서 따라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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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코 공주의 결혼식에 참석한 큰오빠 부부,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마사코 황태자비는 시누이의 결혼식에 웨딩드레스와 비슷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와서 비판을 받았다.

8. 결혼 후의 생활

비상근으로 근무하던 조류 연구소를 그만두고, 한동안 전업 주부 생활을 했다. 궁성과 구로다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신축 아파트를 구입했으나, 이듬해 아파트가 완공될 때까지 임대아파트에 임시로 거처해야 했다. 신축 아파트는 도쿄의 주택치고는 드물게 숲과 맞닿아 있어 외부에서 훔쳐보기 어려우며, 안전과 사생활 보호가 철저한 집이라서 선택했다고.[11]

2008년 4월에는 친정 부모의 결혼기념일을 구로다 자택에서 축하했다. 또한 2009년 12월에는 남편 요시키와 함께 황실 일가의 모임에도 참석하는 등, 결혼 이후에도 친정과 친밀하게 교류하고 있다.

2012년 4월 26일에는 이세신궁의 임시 제관(祭官)으로 취임했다. 1988년부터 제관을 맡아 온 넷째 고모 이케다 아츠코[12]가 고령으로 쇠약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야코의 티아라. 미키모토 사에서 제작되었다. 일본 여성 황족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예장에 갖추는 티아라는 모두 국비로 지출되어, 여성 황족이 결혼으로 황적에서 이탈하면 국고에 반납된다. 하지만 사야코의 티아라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의 사비용에서 지출해 비용을 치른 것으로, 사야코의 사유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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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작은오빠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과 더불어, 미치코 황후의 친자식이 아니라 아키히토 덴노가 다른 여성과 내통하여 낳은 혼외자식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일본 내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듯.
  • [2] 당시에는 황태자비
  • [3] 원래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황태자 부부를 초청하고 싶었으나, 일본 궁내청에서는 사야코 공주를 대신 보냈다. 황태자 부부, 특히 마사코 황태자비는 아들 출산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 [4]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 후미코의 친정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 가문이다.
  • [5] 이때 새댁이었던 키코 비는, 남편의 포악한 행동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 [6] 말이 평민이지, 가쿠슈인을 다니며 왕자와 친구로 지냈을 정도이면 구로다 가문 역시 상당한 집안이다.
  • [7] 다이쇼 덴노의 3남 다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아내로, 아키히토 덴노의 숙모. 다이쇼 덴노의 셋째며느리.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손녀이며, 외가는 방계 황족인 아리스가와노미야 가문이다. 키쿠코 비는 자녀를 낳지 못하여, 대신 사야코 공주를 손녀처럼 귀여워하며 애정을 쏟았다.
  • [8] 1960년, 쇼와 덴노의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 공주가 시집갈 때.
  • [9] 다만 원래 일본에서는, 결혼식에 참석할 때 청첩장은 필수적으로 지참해야 한다.
  • [10] 쇼와 덴노와 고준황후의 딸 5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하고 무난한 삶을 산 인물로, 언니들과 대조적으로 화려하고 활달하며 떠들썩한 성품이라고 한다.
  • [11] 북향이라 미치코 황후가 반대했다는 소문도 있다.
  • [12] 쇼와 덴노의 4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