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구대성

last modified: 2016-07-30 21:39:40 Contributors

koo.jpg
[JPG image (Unknown)]
orix.jpg
[JPG image (Unknown)]
데뷔 시즌 빙그레 이글스 유니폼 [1] 오릭스 블루웨이브 유니폼
BLUE.jpg
[JPG image (Unknown)]
한화 이글스 유니폼 시드니 블루삭스 유니폼

시드니 블루삭스 No.30
구대성(具臺晟,Dae-Sung Koo)
생년월일 1969년 8월 2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대전광역시
출신지 대전고-한양대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2]
프로입단 1993년 빙그레 이글스 1차 지명
소속팀 빙그레/한화 이글스(1993~2000)
오릭스 블루웨이브(2001~2004)
뉴욕 메츠(2005)
한화 이글스(2006~2010)
시드니 블루삭스(2011~ )[3]

1996년 한국프로야구 MVP
김상호(OB 베어스) 구대성(한화 이글스) 이승엽(삼성 라이온즈)

1999년 한국시리즈 MVP
정민태(현대 유니콘스) 구대성(한화 이글스) 톰 퀸란(현대 유니콘스)

1996년 한국프로야구 투수 골든글러브 수상자
이상훈(LG 트윈스) 구대성(한화 이글스) 이대진(해태 타이거즈)

1996년 한국프로야구 구원왕
선동열(해태 타이거즈) 구대성(한화 이글스) 이상훈(LG 트윈스)

2010-2011년 호주 프로야구 리그 최고 구원투수상 수상자
대회 첫 개최 구대성(시드니 블루삭스) 벤 그라이스(퍼스 히트)

2013-2014년 호주 프로야구 리그 최고 구원투수상 수상자
매튜 윌리엄스 (시드니 블루삭스) 구대성(시드니 블루삭스) 미개최

빙그레/한화 이글스 등번호 15번
유해덕 구대성(1993~2000) 지승민(2001)
한화 이글스 등번호 15번
김승권(2003) 구대성(2006~2010) 유창식(2011~ )

Contents

1. 선수 소개
1.1. KBO 데뷔 ~ NPB 진출 이전까지
1.2. NPB 시절
1.3. MLB 시절
1.4. 국내 복귀 후~국내 무대 은퇴
1.5. 호주 프로야구 리그 시절
2. 연도별 주요 성적
3. 구대성이 보유하고 있는 기록들
4. 기타



1. 선수 소개

대성불패臺晟不敗

KBO를 대표하는 레전드급 좌완 파이어볼러이며 최고의 닥터 K 중 한명이자 KBO를 대표하는 레전드급 혹사의 아이콘.

한화 이글스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선수 중 한 명이자[4] 대성불패,혹사불패 혹은 일본 킬러라고 불리는 사나이로 투수 4관왕(다승, 승률, 평균자책점, 세이브포인트)[5]을 달성한 3명[6]중 한 명인 대투수.[7]

이승엽과 더불어서 합법적인 병역 브로커로 불리는 선수로, 특히 일본과의 경기에서 강했으며 시드니 올림픽의 154구 완투승은 아직도 인구에 회자된다.

현재는 한국에서 은퇴 후 호주 리그에서 다시 한 번 위력적인 마무리로 대활약하고 있으며 이상훈, 박찬호, 김병현, 임창용과 함께 한, 미, 일 야구를 모두 경험해 본 선수 중 하나.


그런데 이 타자에게 홈런허용(...)
상대 타자에게 등을 보인채로 와인드업해 공을 던지는 기묘한 폼[8]으로 투구한다. 덕분에 도루하기 매우 까다로우며[9] 공 릴리즈까지의 시간도 매우 짧아서 구종 파악에도 힘이 들며, 공을 치는 타자 역시 공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아서 치기 어려운 폼으로 정평났다. 이 때문에 투수의 투구시의 버릇(이른바 '쿠세') 등을 통해 구질을 파악하는 경향이 강한 일본 야구에 매우 강한 면모를 보인다. 메츠 시절 익힌 서클 체인지업과의 조합도 일품. 이 서클 체인지업은 훗날 류현진에게 전수하여 잘 써먹기도 했다.

보통 나이를 먹을수록 체력 문제 때문에 폼이 간결해지는데, 구대성은 나이를 먹을수록 등을 더 돌렸다. 국내 복귀 후 투구 폼은 아예 2루를 보고 서있는 수준. 이 폼 때문에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어 KBO 은퇴를 하게 됐지만...

이 비비꼬인 폼과 좌완이면서도 흔치 않은 사이드 암에 가까운 쓰리쿼터형 투수이기 때문에 때문에 좌타자들에게는 거의 저승사자 수준으로 좌타자에게는 극강이었다. 합법 병역 브로커 타자 대표 이승엽은 "선수생활 내내 대성이형 공은 제대로 맞춘적도 없다."라고 할 정도.

탈삼진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난 투수로서 투수의 탈삼진 능력을 측정하는 K/9(9이닝동안 삼진을 몇 개나 잡는지 측정)수치가 통산 9.75이다. 쉽게 말해 통산으로 따졌을때도 이닝 당 한 명 이상의 타자를 기본 삼진으로 잡는다는 얘기. 이 수치는 한국 프로 야구 통산 1위이다.

프로 데뷔 이전부터의 혹사로 커리어 내내 구위가 지속적으로 하락했지만, '투수라는 보직에 가장 적합한 마인드'로 평가받는 그의 배짱과 승부근성은 그를 혹사에도 불구하고 롱런할 수 있게 했다. 일본전 때의 인터뷰 中 "저는 일본 선수들이 제 공을 제대로 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한것이 단적인 예다.[10]

별명은 유명한 대성불패 가 대표적으로 이후 그에 버금가는 활약을 보인 창용불패 임창용과는 전성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커리어와[11]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펜에서의 혹사, 한→일→미→한의 프로야구 커리어 등 은근히 공통점이 많다.
단 쿠옹의 한국 복귀 첫 해 성적에 비해 임창용은 첫 해 잘 나가나 했더니 제2의 임작가 혹은 대방화범이 되었다….

팬들 사이에서는 메이져 진출 시 성인 '구'를 영어로 표기하면 'Koo'라서 '쿠' + 한국 복귀 시 적지 않은 나이로 옹 호칭을 합한 쿠옹이라는 호칭으로 유명하며 덕분에 최훈의 프로야구 카툰에서는 쿠우 캐릭터로 나온다(…).

1.1. KBO 데뷔 ~ NPB 진출 이전까지

구대성의 야구인생은 그야말로 혹사 그 자체이며 오죽하면 혹사를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다. 대전고등학교 야구부 시절부터 뛰어난 투수로 이름을 날리며 혹사를 당했고 대학 시절에도 물론 혹사, 그리고 한화 이글스에서 계속되는 선수생활동안 선발 혹은 중간계투에서부터 마무리까지 닥치는 대로 올라와 공을 던지는 통에 중간계투와, 마무리를 합쳐 중무리 투수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였다. 이는 마무리 투수이면서도 한시즌 등판이닝수가 규정이닝을 넘나드는것을 보면 알수있다. 구대성 전성기시절 한화는 선발이 5~6이닝을 막았다→구대성 등판, 선발이 일찍 무너졌다→구대성 등판, 선발을 뛸 사람이 없다→구대성 선발등판(...)이었다. 당시에는 이광환감독의 LG가 현대적인 분업화된 야구로 성공을 이루면서 점차 마무리 투수는 1이닝 내외를 소화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었는데, 구대성만은 예외. 언제든 올라와서 3~4이닝씩 공을 뿌려대고 다음날 또 나와서 3이닝씩 뿌려대고 이런식이었다. 심지어 한화 이글스의 유일한 우승인 1999년의 운용 방식이 1, 2, 3선발인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이 어느정도 이닝을 막고 내려가면, 나머지 이닝은 구대성이 틀어막아 3경기를 확실히 챙기고 나머지 경기는 이기면 좋고 지면 말고 식의 3승 2패 전략(...)이었다. 이런 식의 운용을 하려면 정말 구대성급의 확실한 불펜투수, 그것도 중무리 투수를 가지고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방식. 심지어 한국시리즈에서도 전 경기에 등판하며 1승 1패 3세이브를 기록하고 한국시리즈 MVP까지 가져왔다.

다만 이런식의 운용은 구대성의 커리어에 있어 손해를 가져왔다고도 할수 있는데, 보직이 고정되어있지 않다보니 특히 세이브 수에서 어느정도는 손해를 본 것이 사실이다. 흔히 구대성을 흔히 성구회 멤버로 알고있는 사람이 많은데, 워낙 장기간 선수생활을 한데다 임팩트가 강해 그런 오해가 있지만 실제로는 가입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성구회 멤버가 아니다. 2009년 성구회 창립 당시 투수는 200승을 달성했던 송진우 한 명이었고, 두 번째 투수 가입자인 임창용은 5년이 지난 2014년에야 이름을 올렸다.[12] 투수는 200승 혹은 300세이브가 가입 조건이기 때문에 사실상 입성이 엄청나게 힘들다.


커리어 중 인상적인 것은 리그 MVP를 차지했던 1996년의 기록인데, 단 2경기에 선발출장 했음에도 불구하고 먹어준 이닝이 139이닝이며, 1996 시즌의 성적은 18승 3패 24세이브 방어율 1.88 WHIP 0.76로 현재까지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했던 투수중 단 세 명만이 이룩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기록을 달성하였다. [13] 그야말로 선발 중간 마무리 닥치는대로 나와서 저 정도 성적을 냈다는 얘기.[14] 흠좀무 1996년의 MVP 수상기록은 구대성이 모든 보직에 등판한 덕에 '과연 당시 구대성이 전문 마무리투수라고 할 수 있느냐'라는 의견이 존재하긴 하지만 2014년 현재까지 마무리 투수로서는 유일한 수상기록이다.

처음에는 150Km 초중반을 찍어대던 강속구 투수였지만 거듭되는 혹사로 인해 프로선수가 되었을 때 이미 구속이 3~4키로 정도 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거듭되는 프로에서의 혹사, 그리고 국제 대회에서 빼놓지 않고 뽑히는 바람에 시속은 계속 떨어져 현재는 평균 140Km을 겨우 웃도는 구속의 소유자가 되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준결승전에서 탈락, 일본과 3, 4위 결정전을 앞두고 대표팀 선수들의 카지노 출입 파문이 보도됐다. 여론을 고려할 때 동메달이라도 무조건 확보하여 입국해야 할 상황. 그때 구대성은 심한 담에 걸려 팔을 제대로 뻗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침을 맞고 있는 구대성을 향해 김인식 감독(당시 대표팀 투수코치)이 괜찮냐고 묻자 구대성은 그냥 견딜만 해요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대성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그럼 내일 선발은 너다라고 통보한 뒤 돌아섰다고 한다. 그리고 구대성은 알겠심더 마 한 번 해보입시더하라니까 해야지라는 생각으로 등판했다고. 흠좀무….[15] 일본전이니까. 그리고 전설의 155구 완투승을 이뤄내 후배들의 병역을 책임졌다.[16]

1.2. NPB 시절

국제 대회에서 일본에게 져본 역사가 없어서 일본 킬러라 불리우며 덕분에 오릭스에서 구대성을 2001 ~ 2004년까지 선수로 쓰기도 했으며 오릭스 시절에는 초반에 부진하다가 2년차에는 쏠쏠한 활약을 해서 2.52의 평균자책점로 방어율 2위를 찍기도 했지만[17], 물방망이 타선으로 인해 5승에 거두는데 그쳤다12류현진. 2002년 오릭스 시즌에는 3할타자가 다니 요시토모[18]를 제외하면 전부 없었고여러분 이거다 물방망이 타선인거 아시죠? 나머지는 1,2할 타자쩌리급 타자들이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죽했으면 2002년 퍼시픽리그에서 팀 타율이 2할 3푼 5리밖에 안됐을까!

1.3. MLB 시절

2005년에는 뉴욕 메츠에서 원 포인트 릴리프로 활동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 생애 첫(…) 타석에 들어섰을때 타석 제일 먼 곳에서 방망이를 들고 가만히 서있기만 해서 삼구 삼진을 당했다. 며칠 뒤 두번째로 들어선 타석에서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에이스 랜디 존슨과 상대하게 되었는데 랜디 존슨의 공을 깨끗한 2루타로 연결한 뒤 이후 호세 레예스의 보내기 번트 때 무리한 주루 플레이로 점수를 뽑아낸 적도 있다.[19] 당시 홈에서의 판정은 오심으로 생각할 여지가 있는데, 사실 메이저리그 심판들은 약간 애매한 상황에선 홈어드벤티지를 주는 경향이 있다고 좋게 볼 수도 있긴 하다.


이 두번째 타석은 첫번째 타석과 극히 비교되어 덕아웃의 메츠 선수들은 모두 폭소했고 지역 라디오의 해설자조차도 패닉에 빠졌으며 그날 경기에서는 이닝 중간에 교체될 때 메츠 팬들의 KOO~하는 함성과 함께 기립박수를 받은 뒤 "오늘의 선수"로 뽑혔다. 이 타석에서 덕아웃의 마이크 피아자데이비드 라이트에게 "구대성이 안타를 치면 자선단체에 100만달러를 기부하겠다"는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그래서 영상을 보면 가가대소를 지르는 라이트와 당황해 하는 피아자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덕아웃에서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비롯해 여러 선수들에게 엄청난 환영을 받으며 서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장면은 한 번 볼만하다.

다만, 그 주루 플레이는 훗날 자신도 주심이 봐준 것 같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미친놈이었지"하고 회상하는 인터뷰가 있다. 그 주루플레이로 인한 부상으로[20] 메츠에서 나왔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부상 직전까지 평균자책점이 5점대에 기타 어떤 기록을 봐도 투수진에 있기는 힘든 성적이었다.

1.4. 국내 복귀 후~국내 무대 은퇴

2006년부터는 한국에 돌아와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으며 처음에는 완벽한 투구로 대성불패라 불렸으나 특유의 무신경한 피칭으로 두들겨 맞으며 적에게는 희망을, 아군에겐 똥줄타는 상황을 부여한다. 하지만 언제나 역전 상황에서 (본인만) 여유있게 막으며 모든 이들을 낚는다 해서 쿠낚시 혹은 쿠태공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배영수에 의하면, 2006년 1차 WBC 대회에서 배영수가 스즈키 이치로를 맞춘 건 구대성이 (봉)중근이가 던지면 안아프니까 더 세게 던지는 네가 맞춰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21] 배영수가 승부를 걱정하자 (당시 1점차였다), 구대성은 뒷처리는 내가 한다라고 말했고, 진짜 배영수가 이치로를 맞춘 후, 다음 세 타자를 삼진-파울플라이-1루땅볼로 처리했다. 일본킬러 겸 그의 배짱을 보여주는 사례.# 밑에 인터뷰가 더 궁금하면 지는거다

임창용이 일본진출 첫해 배영수 사건에 대하여 일본 선수의 많은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팀내에서 이치로 선수는 훌륭한 선수지만 워낙 성품이 거만하여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고... 끝내 일본을 이겨서 미담으로 남는 사건이 되었지 만약 이 경기에서 졌으면 한일 양 선수들이 서로가 불편한 관계가 될뻔한 사건이기도 하다.

2007 시즌 내내 특수한 폼으로 인해 더더욱 괴롭혀 왔던 무릎수술로 인해 2008시즌에는 6월에서야 등판이 가능하였다. 저멀리 떠나가버린 강속구는 다시 찾지 못하였지만, 관록으로 한화 불펜에서 힘이 되주었다.

2008년에서는 전반기에 46이닝에 연투 10번에 3연투 4번에 4연투 3번(…)으로 한화 불펜진에서 연투에 연투를 이으며 김인식 사단의 노예목록중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게다가 송진우가 은퇴하면서 한국 프로야구에서 최고령 투수가 되었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운드 위에서 공을 뿌리고 있으며, 2009 시즌 종료후 한대화 신임 감독이 젊은 선수들을 위한 지옥훈련이라고 하면서 가게되는 나가사키 마무리 훈련에 고집을 부려서 같이 참가했을정도의 투혼[22]을 보여줬다.

2010년 8월 15일 은퇴를 선언했다. 무릎 부상이 은퇴의 결정적인 영향. 은퇴시기의 인터뷰.

9월 3일에 은퇴경기를 치렀는데 조동찬을 상대로 중견수 플라이 아웃, 그렇게 마운드를 떠났다. 이날 선수단과 프런트 모두 대성불패라고 마킹된 유니폼을 입었다. 자신의 배번 15번은 영구결번 대신 후배에게 물려줄 것[23]이라며 영구결번은 본인이 고사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상 참고.

은퇴 후 당분간 호주에서 야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로써 한,미,일,호주 4개국 야구를 경험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5. 호주 프로야구 리그 시절

그리고 2010년 11월, 재창설된 열린 호주 프로야구 리그(1990년대 열렸다가 인기 부진과 크리켓계의 견제로 문을 닫았었다.)에서 호주 프로리그 첫 세이브를 기록한다. 영상 포탈[24] 그런데 상대 팀에... 호주 리그로 파견 나온 롯데 1.5군급 선수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성적은 말 그대로 시망

아무튼 2011년 1월 14일까지 14경기 등판 1승 1패 10세이브 평균자책점 1.37을 기록. 호주에서도 대성불패의 신화를 이어갔다. 좀 더 자세한 스탯을 볼려면 이 곳 참조. 결국 원년 시즌 최고 구원투수 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참고로 처음 호주리그에 들어왔을때 6개 구단에서 모두 영입을 시도했지만 시드니 소재 학교에 다니는 자녀 때문에 시드니 블루삭스로 가게 되었다고.

그러나 2011년 11월 24일까지 4경기에 등판해서 2번의 패전을 기록하였고, 특히 11월 24일 경기에는 9회 말 3점차 리드를 2아웃까지 멀쩡하게 잡아놓고 2타자에게 연속으로 안타를 허용(중견수 앞 단타-좌익수 뒤 투런)하고 다시 주자를 볼넷으로 출루시킨 뒤 내야안타를 맞고 끝끝내 쓰리런을 맞으면서 팀의 승리를 지키지 못하여 결국 이 경기의 패배로 시드니 블루삭스는 리그 최하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한 부진에도 불구하고 3패 8세이브 평균자책점 3.38로 2년 연속 구원왕을 차지하게 되었다. 팀 시드니도 우여곡절 끝에 4위에 랭크,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왼손 타자로는 평균자책점 0. 팀을 대표하는 선수로서 호주 프로야구 리그 홈페이지 메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시아 시리즈의 흥행을 위해 아시아 시리즈 기간 동안만 퍼스 히트로 트레이드되어 아시아 시리즈에서 등판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하지만 과연 퍼스 히트에서 마무리 등판이 가능한 상황이 나올지...

제 3회 WBC를 앞두고 속보가 나왔는데, 호주 야구협회 측에서 쿠옹에게 호주 대표팀으로 참가해서 마무리로 뛰어달라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쿠옹은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만약 기사대로 일정이 추진되었다면, 한국 야구계는 최초로 타국에서 뛰는 자국출신 선수를 상대하게 될 수 있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12~13 시즌엔 마무리 자리를 팀 동료 매튜 윌리엄스에게 물려주고 중간 계투 요원으로 뛰게 되었다.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25] 그래도 시즌 중반인 12월 중순까지는 여전히 건재한 모습.

13-14 시즌에는 매튜 윌리엄스가 애들레이드 바이트 팀으로 옮겨, 다시 시드니의 마무리를 맡게 되었다. 시즌 초지만 11월까지 4세이브로 압도적인 단독 선두. 나머지 경쟁자들은 1세이브.(...) 게다가 현지시간으로 12월 8일 캔버라 캐벌리와의 경기에서 선발 등판을 하게 되었다. 1아웃만을 잡고 내려갔던 한화 이글스에서의 은퇴경기를 제외하면 오릭스 시절 이후 근 10년여만의 선발등판. 4.2이닝 2실점으로 승패는 기록하지 못했다. 정규시즌이 끝난 시점에서 1승 1패 11세이브로 캔버라 캐벌리의 숀 W. 톨러와 공동으로 세이브 1위를 달성하였다. 호주리그에서의 세 번째 세이브 1위이다. 팀도 정규시즌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캔버라 캐벌리에게 패배하며 4년 연속 3위(...)를 달성.[26] 플레이오프에는 등판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시즌 두 번째로 최고 구원 투수상을 수상했다. 그야말로 노익장.

2014년 기준 현재 한국나이로 46세이고 만으로 따져도 44세인데, 한국에서 뛰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송진우의 최고령 등판 기록은 넘어섰다. 송진우의 최고령 등판 기록은 43세 2개월 10일.

2014년 3월 20일 벌어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호주 리그 올스타 팀 간의 친선경기에서 7회에 등판해 다저스 타자 안드레 이디어, 후안 유리베, 스캇 밴 슬라이크를 상대로 깔끔하게 3자범퇴시키고 내려갔다.

위 경기 즈음의 인터뷰에 의하면 선수생활 은퇴를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안돼요 ㅜㅜ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는 불러주는데가 없으니 못가죠라고 답변. 한화 프런트는 뭐하는거냐 얼른 모셔와라 그런데 진짜 지금 한화와도 평균 이상은 할거 같은데

구단측으로부터 호주 개막전 관람 티켓을 받았지만 공교롭게도 22일 경기 티켓을 받은 거라 23일 류현진의 경기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표를 구해보려고 했지만 모두 매진. 류현진과 사적인 친분을 이용하면 쉽게 표를 구할 수 있었겠지만 자기 편리를 얻자고 선발 등판을 하루 앞둔 후배에게 안 좋은 일을 하고 싶지 않다면서 22일 경기 티켓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경기장을 찾아 다저스 더그아웃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류현진에게 호주 원주민이 쓰는 전통 부메랑과 쿠키를 선물하고, 류현진의 팬인 아들이 산 류현진 모자에 싸인을 받았다고 한다. 아들이 꼭 류현진의 싸인을 받고 싶었다고.

이런 구대성의 사정을 알게 된 MLBAM의 알렉스 피전 해외사업이사이자 MLB 아시아 소셜 미디어 운영자인 SVMG의 밀튼 추가 류현진의 등판 경기를 볼 수 있게 티켓을 마련해줬고, 구대성은 정중하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우여곡절 끝에 류현진의 경기를 볼 수 있게 됐다.

2014년 11월 9일 캔버라 캐벌리와의 원정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불만을 드러내다가 퇴장을 당했다. 영상. 꽤 거세게 항의를 했는데, 더 큰 문제는 퇴장을 당하고 화를 참지 못하고 경기장 밖으로 공을 던져버린 것.[27] 아무래도 징계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기가 끝난 후 구대성은 구심을 찾아가 사과했다고 한다.

2014-15 시즌 구대성은 방어율 2.12, 4세이브로 세이브 4위가 되었고 팀은 또다시 3위를 달성했다.5년 연속 3위다 겉으로 보이는 성적은 나쁜 편은 아니지만 세부 내용을 보면 1시즌이나마 클로저 역할을 빼앗긴 2번째 시즌 이후 최악의 시즌. 블론세이브는 없었지만, 피안타율이 지나치게 높았고 이에 따라 WHIP도 상당히 상승했다. 사실 팀이 시즌 중반까지 하위권에서 빌빌거리고 있었던 원인도 불펜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에 따른 연쇄효과로 구대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 것일 수도 있다. 팀 입장에서는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구대성을 대체할 불펜투수조차 없었던 것이 뼈아팠던 한 해였다.

2016년 7월에는 U-15 세계청소년야구대회에 호주 대표팀 감독으로서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하였다. 한편 본인 근황에 대해 아직도 구속이 137킬로미터까진 나오지만, 슬슬 기량이 떨어져가는 것이 느껴져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2.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3 빙그레 이글스 6 21⅓ 2 1 0 - 0.667 2.53 18 0 12 11 6 6 1.406
1994 한화 이글스 34 121 7 8 12
(5위)
- 0.467 2.60 89 8 62 128 42 35 1.215
1995 47
(4위)
155 4 14 18
(5위)
- 0.222 3.54 127 18 83 161
(2위)
77 61 1.284
1996 55
(2위)
139 18
(1위)
3 24
(2위)
- 0.857
(1위)
1.88
(1위)
79 7 33 183
(3위)
32 29 0.763
1997 47 102⅔ 8 8 25
(5위)
- 0.500 3.16 65 7 49 134
(5위)
38 36 1.032
1998 59 123⅔ 8 7 24
(3위)
- 0.533 2.55 87 5 57 129 45 35 1.124
1999 55 119⅓ 8 9 26
(3위)
- 0.471 3.09 95 13 53 138 44 41 1.198
2000 48 133⅓ 6 7 21
(5위)
0 0.462 2.77
(1위)
98 13 55 136
(5위)
47 41 1.08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1 오릭스 블루웨이브 51 126⅓ 7 9 10 - 0.438 4.06 96 14 78 143 58 57 1.322
2002 22 146⅓ 5 7 0 - 0.417 2.52 122 13 51 144 45 41 1.155
2003 19 113⅔ 6 8 0 - 0.429 4.99 131 23 58 118 72 63 1.601
2004 18 116⅔ 6 10 0 - 0.375 4.32 105 24 52 99 65 56 1.277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5 뉴욕 메츠 33 23 0 0 0 6 0.000 3.91 22 2 16 23 12 10 1.522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6 한화 이글스 59 69⅓ 3 4 37
(4위)
1 0.429 1.82 56 4 23 76 17 14 1.067
2007 43 42⅓ 1 6 26
(4위)
0 0.143 3.19 41 3 12 37 17 15 1.252
2008 38 41⅓ 2 3 0 9 0.400 3.48 39 2 16 29 17 16 1.282
2009 71
(2위)
55⅔ 0 0 1 8 0.000 3.72 54 5 14 56 24 23 1.168
2010 7 4⅔ 0 1 0 0 0.000 9.64 7 2 3 3 6 5 2.14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10-11 시드니 블루삭스 18 27 2 1 12
(1위)
0 0.667 1.00 14 0 11 30 4 3 0.815
2011-12 14 16 0 3 8
(1위)
0 0.000 3.38 19 2 7 19 10 6 1.563
2012-13 18 18⅔ 0 2 0 7 0.000 2.89 19 0 8 14 7 6 1.339
2013-14 21 26 1 1 11
(1위)
0 0.500 2.08 20 1 13 23 6 6 1.192
2014-15 15 17 0 1 4
(4위)
2 0.000 2.12 19 1 7 21 4 4 1.529
KBO 통산(13시즌) 569 1128⅔ 67 71 214
(3위)
18 0.486 2.85
(5위)
855 87 472 1221 412 357 1.125
NPB 통산(4시즌) 110 503 24 34 10 - 0.414 3.88 454 74 239 504 240 217 1.326
MLB 통산(1시즌) 33 23 0 0 0 6 0.000 3.91 22 2 16 23 12 10 1.522
ABL 통산(5시즌) 86 104⅔ 3 8 35 9 0.272 2.15 91 4 46 107 31 25 1.232

역대수상
년도 수상내용
1996년 골든글러브 투수부분 수상
한국프로야구 시즌 MVP
1999년 한국시리즈 MVP

3. 구대성이 보유하고 있는 기록들

  • 한국 유일 7년 연속 20세이브.
  • 한국 유일 9년 연속 두자릿수 세이브
  • 역대 마무리 투수 중 유일한 MVP[28].
  • 역대 이닝당 삼진 비율 1위[29]
  • 평균 자책점 1위를 2번 이상 달성한 4명의 선수 중 한 명[30].
  • 투수 4관왕 : 구원투수라는 이유 + 비인기 팀 + 기자들의 몰상식함 때문에 요즘은 묻혔지만, 어쨌든 투수 4관왕을 달성한 역대 3명의 투수[31] 중 한 명이다.
  • 다승왕-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 3명의 투수 중 한 명[32].
  • 7년 연속 세자릿수 삼진[33].
  • 호주 프로야구 리그 초대 세이브 왕 및 통산 세이브 1위(2014년 2월 7일 기준 31개)[34]

4. 기타


gudaesung1123.jpg
[JPG image (Unknown)]

한미일 야구를 모두 경험해본 자의 간단한 평가[35] 어? 한국이 제일 쉽다고요? 이분 디스 같은데?

젊었을 적엔 그 김병현과 비교될 정도로 독특한 일화가 많고 성격 역시 쿨한 것으로 유명하다.

담대하고 독특한 성격에 대한 대전고 동창의 증언으로는 원래 야구부가 1953년 우승 이후 한번 이후 팀 성적이 좋지 않아 폐부 위기에 처해서 당시 1,000만 원(!)을 스카웃 비용으로 지불하면서 구대성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리고 입학하자마자 휘문고와의 첫 친선 경기 때 팀이 스코어 2:1로 앞선 상황 9회에 마무리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서서 1,2,3번 타자를 전부 볼넷으로 내보내 만루를 채우고 다음 3명의 타자를 전부 삼진으로 막았다고 한다. 경기가 끝나고 이유를 물어보니 "왜? 재밌잖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칰갤에서 한화투수가 볼질로 주자를 모은 뒤 해결하고 내려가면 이를 '쿠옹놀이'라고 한다. 문제는 한화투수들이 주자를 쌓는 것만 똑같고 못막는다는데 있다.

실제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마운드 위에서 위기 상황엔 "저녁식사를 뭘로 먹을까"를 생각한다고 한다.

그리고 한화 이글스 홈피에서의 '좋아하는 연예인은?'에 대한 답은….
sdasdasd.jpg
[JPG image (Unknown)]

우왕ㅋ굳ㅋ

사실 전성기 시절에도 핸드폰이 없었다고 한다. 뒤늦게 핸드폰을 가졌지만 그나마도 핸드폰 번호를 절대 남한테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한다. 참고. 동료들과 지인들끼리 전화를 걸고 하는 것을 싫어해서 그런다고. 가정적인 면도 있는데 가족을 끔찍히 아낀다고 한다.

또한 꽤나 유명한 도박광으로, 큰 돈을 걸진 않지만 각종 돈을 걸고 하는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특히 도박에 승리할 때의 액션이 크기로 유명하다. 메츠때 동료들의 표현에 따르면 미친 거 같았다고. 그래서 프로야구선수 인터넷 도박 파문이 터졌을 때 도박을 즐겨한다는 점 때문에 구대성의 이름이 거론되었으나, 한화 팬들은 컴맹인 쿠옹이 그럴리 없다고 반박했다. 컴맹이어서 이메일도 제대로 못 쓴다고.

박찬호의 증언에 따르면 100원짜리 동전 가지고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있었다는 일화도..

또한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돈에 대한 감각이 좀 떨어진다는 평이 있지만 밑의 일화들을 보면 남을 위해 잘 쓰고 본인에게 안 쓰는 대인배이기도 하다.

대학진학 당시에 빙그레에서 3,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계약을 하고자 했으나 한양대에서 신장이 안 좋았던 아버지를 한양대학교에서 무료로 치료해준다는 조건과 친구들도 함께 진학한다는 조건에 승낙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 무료 치료가 아니라 구대성의 대학 진학을 바라는 아버지 뜻에 따라 친구들과 함께 진학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당시 강팀이었던 빙그레는 한국시리즈에 가기만 하면 물을 먹었는데, 구대성이 바로 입단했으면 빙그레 정규리그 우승시즌인 1989년이나 1992년 둘중에 하나는 잡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IMF 구제 금융기간이면서 선수협 창단 시절인 일본진출 초창기에 당시 선수협결성 초대회장이었던 송진우의 "후배들을 위해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에 선뜻 1천만 원의 기탁금을 내놓았다.[36] 아무 연고도 없던 임수혁을 돕기위해 당시(2002년 12월) 일본에 있었으나 "외부에 알리지 말고 무조건 내 말대로 해달라"라며 한화 구단에게 2천만원을 송금해서 임수혁에게 전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여기 저기에 기탁금, 후원금을 알게 모르게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 오릭스로 진출하기 전까지 대전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살았다. 그의 아내 또한 검소한 모습으로 다닌다고 한다. 왜 좋은 곳으로 이사를 안 가냐는 말에 쿠옹曰 "나는 여기가 편하다"라고...

대전고를 다녔던 어느 사람의 사연에 따르면 일반 교내 식당에서 밥을 배식받았는데 자리가 없어서 선수 전용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37] 구대성이 아무말 없이 반찬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IMF 시절 연봉 고과 1위인 구대성이 1억 원을 요구했으나 구단에서는 모기업사정을 고려하여 조정을 요구했다. 그것을 쿨하게 응낙하여 동결하기로 했으나 이 이야기가 구단 수뇌부에 올라가면서 수뇌부에서 구단의 상징인 구대성의 연봉을 맞춰주라는 의견이 나왔고 회장님 지시겠지 구단이 1억 원을 제시하자 역으로 모기업의 어려움을 외면할 수 없다고 거절한 사례가 있다.

또한 송진우, 정민철과 함께 엄청난 짬밥으로 한화 이글스의 벤클 치트키(…)라고 불리기도 했다.

자료 1
아예 벤치 클리어링을 할 엄두를 못 낸다
대표적으로 2006년 한국시리즈 당시 소위 꼰대질과 지나친 다혈질, 흥분을 일삼는 걸로 비판받는 진갑용이 구대성에 공에 몸을 맞자 성질을 내며 방망이를 그대로 들고 마운드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구대성이 실투였는데 어쩔 거냐고 대응하자 군소리 못하고 얌전히 1루로 걸어나갔고, 진갑용이 1루에 도착한 뒤에도 진갑용을 꾸짖었다.

자료 2
전설의 김동주 붕어빵 셔틀 짤방, 한화 치트키 사용 장면
2007년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때 일어난 벤치 클리어링 때도 한화 선수들이 전전긍긍하자 느긋하게 등장해 김동주를 상대로 손 한 번 펴보이자 그 천하의 김동주가 조용히 벤치로 돌아가던 장면은 필견.

친형도 프로야구 선수였다. 쌍방울 레이더스의 우완투수 구대진 선수가 구대성의 형. 대전 신흥초등학교 3학년 때 형을 따라 야구부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구대진은 1991년 7경기 12⅔이닝 1패 4자책점 평균자책점 2.84의 성적을 낸 뒤 재계약 불발로 1년만에 방출되어 은퇴했다.

그리고 괴물투수의 파츠 중 마인드(배짱) 파츠와 서클 체인지업 파츠를 붙여주셨다

----
  • [1] 그리고 이 사진은 후에 안승민합성되기도 했다. 쓸데없이 감동적이다.
  • [2] 본디 오른손잡이였지만 어렸을 적 사고로 오른팔이 부러져 왼팔로 공을 던지게 됨.
  • [3] 2012 아시아 시리즈 기간 한정으로 퍼스 히트로 일시적으로 트레이드
  • [4] 실제로 구대성이 복귀 후 노쇠화되고 은퇴한 이후 한화의 성적은 쭉 하락세다.
  • [5] 1996년 당시엔 구원승 + 세이브를 포인트로 합계해 세이브포인트로 구원투수를 평가했다.
  • [6] 나머지 2명은 선동열윤석민인데, 이 둘은 트리플 크라운+승률 1위였다.
  • [7] 탈삼진 타이틀이 없는 건 아쉽지만, 1996년에 구원 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186탈삼진으로 탈삼진이 3위였다. 통산 이닝 대비 탈삼진 비율 1위의 기록과 더불어 그가 얼마나 굴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8] 노모 히데오의 토네이도 투구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은퇴 전 인터뷰에서 밝혔다.
  • [9] 와인드업 시 2루에서 1루까지 여유있게 구경 가능한 폼이다.
  • [10] 또 다른 일화가 있는데, 메츠 시절 투수코치가 "몸쪽공을 던지다 상대 투수가 맞아 부상으로 실려나갔다. 다시 몸쪽 공을 던질 수 있겠느냐?|라고 묻자 구대성은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한다. 투수코치는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뛰어난 투수다."라고 했다 한다.
  • [11] 단 임창용이 그의 커리어에 비해 상운이 없는 것에 비해 구대성은 챙길 땐 챙겼다.
  • [12] 그 5년 사이에 타자는 네 명이 이름을 올렸다.
  • [13] 다른 두 명은 영원한 회장님 송진우와 2001시즌 LG트윈스에서 활동했던 투수 신윤호. 단, 이 기록은 구원승과 세이브를 합쳐서 세이브포인트(SP)로 구원왕 타이틀을 결정했던 2003년도까지만 적용된다. 세이브만으로 최다세이브 수상자를 결정하는 2004년 부터는 다승-구원 동시 석권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 [14] 그러나 96년 55경기 등판 중 선발 등판은 단 2경기다. 한 마디로 중무리 투수라고 불릴 정도로 계속 중간에서 굴려 댔다는 이야기.
  • [15] 근데 이 에피소드는 말들이 조금씩 다른데, 처음에는 구대성이 너무 아파 '좀 힘들것 같은데요.'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우리의 킬인식님께서는 그의 숨은 명언 '왜 못던지느냐.' 라고 말했다고. 그 말 듣고 구대성이 황당한 표정으로 웃으며 속으로 '아, 내가 나가야겠구나.' 라고 생각했고 선발등판 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꿨다는 말도 있다. 어느쪽인지는 각자 판단. 참고로, 구대성이 아프다고 말한다는 건 진짜로 아픈 거다.
  • [16] 사실 0:0으로 진행되다가 8회에 3점 선취득점한 후, 9회 1사 이후 1점을 내줬는데, 투구수도 이미 150구 가까이 된 상황이어서 김인식 당시 대표팀 투수코치가 투수교체를 위해 마운드에 올라갔으니, 구대성이 '여기까지 던졌는데 이제와서 강판시키느냐'라고 항의(?)해 계속 던졌다고. 당시 배터리를 이뤘던 홍성흔도 '공이 점점 좋아집니다.' 라고 구대성이 끝까지 던지는 것을 주장했다.
  • [17] 1위는 팀 동료 카네다 마사히코 이쪽은 2.50 ERA로 평균자책점왕 타이틀을 따고도 4승밖에 못 찍었다...
  • [18] 유도선수 다니 료코의 남편으로 오릭스시절 아내와의 러브스토리는 일본야구팬들사이에선 회자되고 있다. 2007년 요미우리로 이적했고 2014년 현재 오릭스 소속으로 뛰고 있다. 의지돌티아라의 가 아니다!
  • [19] 영상을 보면 포수가 번트 커버하려 홈 플레이트에서 좀 떨어져있었고, 구대성이 달려올 때 포수도 홈 베이스로 돌아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홈 플레이트가 비어있었기 때문에 이를 노리고 파고 들었다 볼 수 있다.
  • [20] 저 슬라이딩할 때 입었던 점퍼에 야구공(!!)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투수는 어깨가 식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각자의 재량에 따라 베이스 러닝 때 점퍼를 입는 것이 허용된다.
  • [21] 언론에 의해 왜곡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이치로는 30년 발언으로 한국에서 안티가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 [22] 사실 이런 영웅담따윈 다 필요없고 이 말 한마디면 된다. 위에 언급한대로 구대성은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사고로 인해 좌완으로 바꿨다.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에피소드.
  • [23] 2010년 전체 1지명으로 뽑은 유창식이 물려받게 됐다. 한화 역대 최고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고 좌완이라는 공통점으로 물려받은 듯하다. 유창식 부담감은 상상을 초월…. 말이 등번호 물려준거지 사실상 준 영구결번이나 다름없다. 사실 류현진도 원래 구대성의 배번을 쓰려고 했지만 구대성이 국내로 돌아오자 99번을 썼다.
  • [24] 등장 브금이 오지 오스본의 Crazy Train
  • [25] 구대성은 이 시점에서 팀 내에서 1959년생인 코치 한 명을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많다. 감독이나 투수코치보다도.
  • [26] 호주리그가 13-14시즌까지 창설된지 4시즌이기 때문에, 창설 이후부터 내리 3위만 한 것.
  • [27] 이게 방향이 관중석 쪽이라 국내 기사에선 "관중석에 공 투척" 이라고 기사가 나왔다가 수정되기도 하였다. 물론 관중을 노리고 던진 것은 아니지만, 만약 공이 관중석에 떨어졌다면 더 큰 논란이 생겼을 것이다. 다행히 공은 관중석을 넘어 구장 뒤편의 개울에 떨어졌다고.
  • [28] 당시 MVP 경쟁자가 한국 최초로 30-30을 달성한 신인 박재홍이었다. 참고로 선동열은 MVP를 받았을 당시엔 선발 투수였다.
  • [29] 2위가 국보 투수 선동열이다.
  • [30] 다른 3명은 선동열, 류현진 그리고 윤석민.
  • [31] 다른 2명은 선동열, 윤석민. 이 둘은 다승, 평균자책점, 탈삼진, 승률 4관왕이다.
  • [32] 당시의 구원왕의 기준은 세이브수가 아닌 구원승+세이브수인 세이브포인트로 구원왕을 가리는 제도였다. 당시 18승 중 절대 다수가 구원승이었기 때문에 중무리를 하면서 구원왕이 가능했던 것. 구대성 이전에 송진우가 달성한 것이 최초였고, 이후 신윤호가 2001년에 달성한 것이 마지막. 21세기부터는 마무리 개념이 제대로 잡히기도 했고, 2004년부터는 세이브 포인트가 아닌 세이브 숫자로 구원왕을 가리게 되어 현실적으로 거의 달성이 불가능한 기록이 되었다.
  • [33] 마무리 투수 중엔 유일하다.
  • [34] 리그자체가 2010년에 출범한 4년차 신생리그다. 따라서 누적 스탯이 적다.
  • [35] 다만 처음에만 쉬웠고, 타자들이 익숙해지고 난 뒤에는 똑같이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 [36] 당시 선수협에 기부한 선수는 회장인 송진우, 부회장인 양준혁과 일본에 진출한 구대성, 정민철, 미국에 있던 이상훈 뿐이었다.
  • [37] 선수 전용 식당은 일반 구내식당에 비해 반찬이 좋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