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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

last modified: 2018-11-27 01:48:39 Contributors

고구려의 역대 국왕
18대 고국양왕 고이련 19대 광개토왕 고평안(고담덕) 20대 장수왕 고거련

구리시 교문동 경관광장에 세워진 광개토왕 동상
생몰년도 375년 ~ 413년 음10월(39세)[1]
재위기간 392년 음5월 ~ 413년 음10월(22년)[2]
출생지 (고구려 국내성 - 이련의 잠저)[3]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4]
연호 영락(永樂)
고(高)
담덕(談德), 평안(平安)[5]
가족관계 아버지: 이련(고국양왕) / 아들: 거련(장수왕)[6]

Contents

1. 개요
2. 명칭
3. 생애
3.1. 즉위 이전 : 주위 정세와 성장
3.2. 원년~6년 : 남벌백제 북벌거란
3.2.1. 즉위년의 맹활약
3.2.2. 근성의 아신왕
3.2.3. 거란-비려 원정
3.2.4. 백제의 항복
3.3. 6년~9년 : 주변 정리
3.3.1. 요동 확보
3.3.2. 숙신족 복속
3.4. 9년~17년 : 서방의 연, 남방의 왜
3.4.1. 신라 구원과 임나가라 원정
3.4.2.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3.5. 17년~22년 : 말년
3.5.1. 남연과의 교섭
3.5.2. 태자 책봉 등
3.5.3. 동부여 정벌
3.5.4. 내치
3.5.4.1. 요동성 육왕탑 설화
3.6. 삼국사기 기록
4. 평가
4.1. 거품?
4.2. 역사적 의의
4.3. 중원 정복과 삼국통일?
4.4. 조선 문인들의 평가
4.4.1. 권근
4.4.2. 안정복
4.4.3. 최보
4.5. 근대 역사학자들의 평가
4.5.1. 신채호
4.5.2. 해외 역사학자들
4.6. 현대 국내 정치인들의 평가
5. 기타
5.1. 오늘날의 광개토왕
5.1.1. 대중매체에서의 광개토왕
5.1.1.1. 광개토대제
5.1.1.2. 태왕북벌기
5.1.1.3. 태왕 광개토
5.1.1.4. 태왕사신기
5.1.1.5. 광개토태왕
5.1.1.6. 역적전
5.1.1.7. 고구려
5.1.1.8. 역사 서적
5.1.1.9. 기타
5.1.2. 광개토왕 재현
5.2. 야사
5.3. 기타 학설
5.3.1. 기년 수정론
5.3.2. 유사역사학


  • 본 문서에서는 간결함과 일관성을 위해 '광개토왕'으로 통일합니다. 명칭 문단 이외의 내용에서 혹여나 다른 명칭으로 쓰인 부분이 있다면 수정바랍니다.

1. 개요

한국사 최고의 전쟁 먼치킨. 시호 그대로 삼국의 전성을 이끈 군주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고, 그만큼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의 치세 이후 고구려는 힘 좀 있다 싶은 산골짜기 국가에서 동방의 패자이자 동북아 국제사회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3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22년 동안 고구려와 이웃한 모든 세력과 전쟁을 벌여 그들을 굴복시켰다. 하지만 그다지 드라마틱한 면모는 없다. 워낙 어린 나이에 즉위한데다 싸우는 족족 이겨서 인생에 굴곡이 없는 것. 단 한번 신라 구원전 때 후연의 모용성이 뒤를 치고 들어와서 곤란해진 적이 있지만, 곧바로 극복해버리고 무엇보다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광개토왕과 관련된 사료로는 금석문으로는 『광개토왕릉비』,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여러 사료들이 전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현전하는 한국 고대의 비문 가운데 그 내용이 거의 완전하게 전하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내용도 당대 역사를 전하는 것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삼국사기》는 광개토왕의 즉위부터 사망까지 고구려에서 일어난 사건이 연대순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광개토왕릉비』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광개토왕의 치세를 정리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이다. 중국 사서는 광개토왕대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외에도 《삼국유사》나 《일본서기》에 단편적인 사건들이 전하고, 운 좋게 살아남은 모두루묘지명과 호우명 그릇은 지워진 역사의 편린을 전해주고 있다.

광개토왕 시기의 사료는 한국사 전반에 걸처서 봤을 때는 적은 편이나 한국 고대사에 한정해서 봤을 때는 무척 풍부한 편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광개토왕 시기의 통치와 전쟁 기록이 고구려의 다른 왕들의 기록에 비해 풍부한 편이고,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광개토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무엇보다 『광개토왕릉비』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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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은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민족주의 사관에 의해 주로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평가되어왔다. 그의 생애가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객관적으로 이해되기보다 그의 정복활동이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민족주의적인 자긍심을 고취시켜주는 것이었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식민지로 전락한 아픔을 광개토왕의 제국주의적 정복 활동으로 씻어내려는 모습이 역력한 것. 그래서인지 광개토왕을 소재로 한 각종 작품은 민족주의로 떡칠되는 것이 보통이다. 때문에 제국주의에 피해본 아픔을 제국주의(정복자)로 치유하는 이런 모순된 모습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점은 국사학계에서도 일부 인식하고 있는 부분인지 모학교 국사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흔히 광개토왕 당시 고구려 영토가 중국 포함 동아시아에서 가장 넓었다고 많이들 얘기하는데, 사실은 그 당시 중국이 하도 개판오분전이라 고구려가 그 덕을 많이 본거지 중국 대륙 전체보다 더 컸던건 아니고 애초에 가장 큰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사실 고대사에서 영토 크기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만. 중세사인 몽골제국 영토마저도 이게 맞나 저게 맞나 다투는 판국에

사실 광개토왕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한참 동안 잊혀졌다가 근대 한국에 와서야 이런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취의 관점에서 다시 부각되었다. 때문에 고구려가 망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진 광개토왕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끽해봤자 고구려의 왕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면서 그 특징으로 싸움 좀 했다거나 땅 좀 넓혔다고 언급되는 것이 전부다. 역사서에서는 그의 성격을 주로 무인의 기질이 있고 웅대한 야망을 품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나마 이 가운데 꽤 재미있는건 두 조선 문인들의 평가인데, 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삼년상도 다 안 치른 채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고, 복수한답시고 지난 일이나 들추는 몹쓸 놈"이란 반응을 보였고, 반대로 정복은 "고작 22년 지난 할아버지 원수 갚는데, 그게 바로 도리"라는 주장으로 반박하고 있다.

2. 명칭

역사서 등에서 그를 가리키는 명칭은 다양하다.

시호 출처 시기 비고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광개토왕릉비문 고구려
장수왕 3년(415)
고구려 공인 시호. 고구려 역대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완전한 시호가 전한다. '국강상'은 능이 있는 지역, '광개토경'은 업적, '호태왕'은 일종의 미칭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안'은 왕의 본명이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광개토왕릉비문 고구려
장수왕 3년(415)
능비문 1면에서 위의 공인 시호를 한번 표기한 뒤, 4면에서는 이렇게 축약해서 표기하고 있다. 본명인 '평안'이 탈락하였으니 사실상 이것이 정식적인 시호라 할 수 있다.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호우명 그릇 신라/고구려[7]
장수왕 4년(416)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물 중 하나. 본명인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광개토지'로 바뀌었다.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
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모두루묘지명 고구려
5세기
본명인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대개토지'로 바뀌었으며, '호태왕'이 더욱 강한 의미인 '호태성왕'으로 확장되었다.

왕호 출처 시기 비고
광개토왕
廣開土王
삼국사기 고려
1145년
고구려 역대 국왕의 왕호가 《삼국사기》에 일괄적으로 전하고 있으므로, 다른 국왕들과 일관성을 갖추기 위해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주로 쓰인다. 시호의 '국강상'과 본명 '평안'이 탈락하고, '광개토경'이 비슷한 의미인 '광개토'로 축약되었으며, '호태왕'이 미칭이 사라진 '왕'으로 축소되었다. 가장 축약된 형태.
개토왕
開土王
해동고승전 고려
1215년
《삼국사기》 연표의 광개토왕 사망 기사에도 개토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낙자로 본다.
광개왕
廣開王
삼국유사 고려
1281년[8]
《삼국유사》 왕력에 광개토왕의 왕호가 광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광개토왕'의 낙자로 본다.

출처 국가 비고
담덕
談德
삼국사기 고구려, 고려 《삼국유사》에도 담덕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안
平安
광개토왕릉비 고구려, 중국 여러 나라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이름. 《진서》, 《양서》, 《자치통감》 등 중국 사료들이 이 평안을 안(安)으로 줄여 썼다. 《고려도경》에도 안으로 나와있다.

호칭 출처 국가 비고
광개토대왕
廣開土大王
삼국사기 대한민국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는 광개토왕이라는 최대한 축약된 호칭에서 나아가, 광개토왕을 영웅시하는 정서상 이를 다시 대왕으로 존칭하는 것.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며, 이따금 학계에서도 사용되곤 한다.
호태왕
好太王
광개토왕릉비문 중국, 일본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 광개토왕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호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서 전반부의 장지명과 업적 부분 그리고 본명을 전부 생략하고 미칭만을 간단히 남긴 것으로, 국내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 외에도 영락태왕(永樂太王),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영락대제, 광개토대제, 광개토열제, 광개토호열제 등이 있다. 그런데 이 7개는 위에 적힌 명칭들과 달리 올바른 명칭이라고 보기엔 문제가 있다. 영락대제, 광개토대제, 광개토열제, 광개토호열제 등은 고구려가 칭제한 적이 없어서 말이 안 되고, 특히 열제의 경우에는 사료 오독으로 만들어진 명칭이다.[9] 영락태왕의 경우 『광개토왕릉비』 1면에 '호(존호)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는 기록에 따른 건데, 이 부분은 끊어읽기에 따라 '호(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은 황천에 미치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라고도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아직 학계에서 정립되지 않은 사안이지만, 이 경우에는 고구려의 '영락'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부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영락 5년'은 단순히 영락태왕이 재위한 다섯 번째 해를 지칭한다는 주장이 되는 것이다. 물론 명나라 이래로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되면서 연호로 군주의 호칭을 삼는 경우가 있고 광개토왕도 재위기간 내내 영락 연호만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주의할 필요가 있다.

광개토태왕의 경우, 태왕이나 대왕이나 의미가 거기서 거기인데다 신라 진흥왕이 순수비에는 태왕이라 적혀 있는 걸 보면 태왕은 존칭의 하나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에서 태왕이라는 말이 쓰인 것일 가능성은 높으나 이미 대중적으로 '광개토대왕'이라는 표현이 굳어진 상황이고 태왕과 대왕은 의미상 차이가 거의 없기에 태왕을 쓰느냐 대왕을 쓰느냐가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사실 태왕을 강조하는 것은 중국에 왕보다 높은 황제라는 칭호가 있다는 것을 참지 못하고 황제와 태왕을 동급으로 놓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당시 국제질서에서 고구려 태왕은 엄연히 황제의 책봉을 받은데다가, 어차피 당시 중국은 사상 초유의 깽판이 벌어진지라 황제 좋아하다 나라 말아먹은 제왕병자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10] 광개토호태왕은 광개토태왕보다는 올바른 명칭이지만, 굳이 역사서에 기록된 명칭을 그대로 살리고 싶었던 거라면 광개토경이 맞다. 고구려 왕들은 대부분 당대의 시호가 전하지 않아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왕호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일관성의 문제가 있다.

3. 생애

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恩澤洽于皇天、威武桭被四海。掃除不□、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弔、卅有九、宴駕棄國、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
18세에 등극하여, 호를 영락(永樂)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恩澤)은 황천(皇天)에 미치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지 아니한 것을 쓸어버리자, 사람들이 그 업에 편안히 하게 되었으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은성하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편안히 떠나시니,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옮겨 모셨다. -『광개토왕릉비』 1면 5~6행


3.1. 즉위 이전 : 주위 정세와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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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 즉위 시의 고구려 주위 국가[11]
담덕이 성장하던 시절의 고구려는 안으로 고국원왕 시대 손실되었던 국력이 회복되고, 소수림왕 시대 이루어진 통치체제의 정비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밖으로는 영 좋지 않은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서쪽으로는 고국원왕 시절 환도성을 털어간 전적이 있던 선비족의 연나라(전연)가 다시 일어나(후연) 화북을 휩쓸었고, 남쪽으로는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전적이 있던 백제가 여전히 한반도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서북으로는 거란이라 불리기 시작한 일군의 유목부족이, 동북으로는 동부여가 자리 잡아 지속적으로 배후의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달가의 정벌 이래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던 숙신도 이 즈음에는 고구려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구려 외부의 불안은 내부의 발전과 맞물리면서 고구려의 대외적인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소수림왕은 백제 방면으로, 고국양왕은 후연 방면으로 각기 진출을 시도했지만 그다지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고 성과도 그리 신통치 않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 담덕은 그 나름대로 고구려의 상황을 분석하고, 여기에 청소년기의 도전적인 활달함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현실에 알맞은 미래상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나면서 웅위롭고 남달리 높은 뜻이 있었다'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전하고 있다.[12]

서기 384년 11월, 담덕의 큰아버지 소수림왕이 아들을 남기지 못한 채 죽자 소수림왕의 동생이자 담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이에 따라 담덕은 그로부터 2년 뒤인 고국양왕 3년에 12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6년 뒤인 서기 392년 5월, 고국양왕이 죽자 담덕은 그 뒤를 이어서 18세의 나이로 고구려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광개토왕과 그의 전쟁의 시작이었다.[13]

3.2. 원년~6년 : 남벌백제 북벌거란

3.2.1. 즉위년의 맹활약

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가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무너뜨렸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백 구를 사로잡고, 또 본국의 잡혀간 백성 1만을 불러서 타일러 돌아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원년
임진년의 맹활약[14]

광개토왕의 즉위와 동시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광개토왕은 즉위한 지 고작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원년 7월에 직접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여 성과 한강 이북의 부락 다수가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이때 광개토왕이 보여 준 군사적 재능은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진사왕이 '담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아가 막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9월에는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에 끌려갔던 고구려 백성들을 되찾아 오는 것과 더불어 거란족 500명까지 사로잡아 왔다. 사실 광개토왕 원년의 북부 전선에서는 광개토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갔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광개토왕은 여전히 남부 전선에 머물러 있고, 북부 전선에서는 다른 장수가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관미성이 함락되고 남부 전선이 정리된 뒤에는 광개토왕도 거란 전선에 합류했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 의 비려 전선 기록에는 광개토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토벌했다(躬率往討)'는 말이 분명히 나온다.. 흔히 이때 되찾아 온 고구려 백성들을 14년 전인 소수림왕 8년(378)에 거란이 고구려 북쪽 여덟 부락을 약탈해간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하곤 하지만, 이때까지 잡혀간 사람의 수가 자그마치 1만에 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거란의 약탈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채무 불이행으로 이자까지 쳐서 강제 압류 들어가겠습니다 호갱님

다시 10월에는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공격했는데,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 공략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 동안 끈질긴 러시를 감행한 끝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도나 교동도라는 설이 있고,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파주 오두산성이라는 설도 유력하며, 소수설로는 예성강 하구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관미성이 어느 곳이든 한강의 물길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라는 점에서는 모든 견해가 일치한다. 즉 관미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곧 백제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적 위기에 맞서 진사왕은 구원의 행궁으로 사냥하러 나갔다. 그것도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군주의 사냥이란 무력 과시와 군사 훈련의 의미를 겸비하는 것이므로, 이는 진사왕이 군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에 대한 반격을 모색하려 한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작 진사왕은 그렇게 달을 넘겨 11월이 되자마자 구원의 행궁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진사왕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해서도 상당히 말이 많은데, 바로 진사왕 사후 백제의 왕위가 아들이 아닌 조카 아신왕에게로 계승된 것이다.[15] 이에 대해 《일본서기》에서는 본디 왕위를 이어받았어야 할 침류왕의 아들 아화가 즉위하기도 전에 진사왕에게 왕위를 가로채였고, 이후 진사왕이 일본 천황에게 실례하여 일본에서 사람을 보내 진사왕을 죽이고 조카 아화를 세우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진사왕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일본서기》의 주장이 상당히 유력해진다. 다만 실제로 일본이 백제의 왕을 죽이고 살리고 했을 가능성은 무한히 0에 수렴한다. 진사왕의 구원 행차가 실제로 사냥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여 즐겁게 놀고 덤으로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유인만 잘 한다면 사람 암살하기엔 더 없이 적합한 장소로 변한다는 사냥터의 속성을 이용해 아신왕이 죽였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 기록에 '행궁에서 죽었다'는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행궁으로 옮겨진 뒤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사냥 중 빗나간 화살에 맞은 곳이 덧나 죽었다고 하면 너무 자비로운가... 또 군대 정비와 반격 준비가 목적이었다고 하면, 진사왕이 진성 레임덕 상태인 가운데 왕위를 노리고 있는 왕족과 군사를 이끌고 한 자리에 모인 귀족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일정 부분 신뢰한다면 아신왕은 즉위하면서 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이는 『광개토왕릉비』 의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와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신왕이 왜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느라 태자를 왜국으로 보내는 등 저자세 외교까지 불사한 것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3.2.2. 근성의 아신왕

이후 영락 5년에 비려 토벌이 완료되기까지, 광개토왕은 거란-비려를 상대로 한 북방 전선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고구려는 광개토왕 2년부터 광개토왕 4년까지 남방 전선에서 줄곧 백제의 공격을 받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백제 아신왕은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 동명왕의 사당과 천지신명에 제사를 올리고, 개각을 단행한 듯 자신의 외삼촌 진무에게 군사 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말하며 고구려로의 반격(?)을 시작한다.

關彌城者、我北鄙之襟要也。今爲高句麗所有、此寡人之所痛惜、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관미성이란 곳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이다. 지금 고구려가 가진 바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슬퍼하는 바로,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2년

그러자 진무는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가, 석현성 등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다. 진무는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공격해 들어갔지만, 군량 수송이 끊어지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에 대해 고구려본기에서는 단지 쿨시크하게 "백제가 쳐들어오자 장수를 보내 막았다."라고 써놓은 게 고작이다.(...)

이와 더불어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영명사와 중흥사가 이때 지어진 절로 꼽힌다. 영명사는 목은 이색의 부벽루에도 등장하는 절이다. 부벽루만이 아니라 다른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하고,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 중 한 곳이였을 정도로 유명한 절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벽루도 광개토왕때에 지어젔을 것으로 추정되곤 한다.

이어서 광개토왕 3년 7월에도 백제가 쳐들어오자, 이번에는 광개토왕이 직접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수곡성 밑에서 싸워 격퇴했다. 이듬해인 광개토왕 4년 8월에도 백제의 좌장 진무가 다시 쳐들어오자, 광개토왕도 다시 직접 군사 7천을 이끌고 패수 가에 진을 치고 격퇴했다. 이 전투로 백제군 8천이 고스란히 갈려나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수급 8천여 개를 노획했다(虜獲八千餘級)'고 나오고, 백제본기에는 '죽은 자가 8천 명(死者八千人)'이라고 나온다.

그해 11월에 아신왕은 패수에서의 대패에 보복하고자 직접 군사 7천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청목령 밑에 이르렀지만, 때마침 폭설을 만나 군사들이 죽어나가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한산성(漢山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아신왕의 심정은 훗날 나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눈 핑계로 돌아온 신라의 통쾌한 기분과는 정반대였을 것이다. 백제 역사상 최악의 대설이었을지도.

백제는 가을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추수기를 노리고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백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비상시에는 군량의 약탈을 통한 현지 조달이 가능해지는데다, 빼앗을 것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천고마비의 고사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삼국사기》 광개토왕 원년의 관미성 전투 기록이나 광개토왕비문 영락 6년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전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 더욱 상세한 전황을 전하고 있다. 이건 백제본기의 기록이 고구려나 신라 것을 참고한 게 아니라, 백제 측의 기록이라는 것이고, '사료가 부족해서 아신왕의 승전이 전해지지 않는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가능성이 낮아진다.

자잘한 규모의 전투들도 전부 기록되었고 또한 거의 1년 주기로 가을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왕 2년에서 광개토왕 4년까지 백제가 고구려에 반격한 것은 한국 고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누락 없이 기록이 살아남은 사건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신왕의 호구스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3.2.3. 거란-비려 원정

위서 거란전에 따르면 거란은 388년에 북위가 동으로 고막해를 정벌하면서 고막해에서 분리되어 나온 세력이라 하고,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 거란이라는 칭호는 5세기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10년 앞선 378년에 이미 거란이 고구려의 북변을 침탈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의 거란은 아직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한 초창기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초창기부터 고구려에 개발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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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왕의 대략적인 비려 정벌 루트
영락 5년에 광개토왕은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 비려[16]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을 격파하니, 6~700영에 마소와 양떼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요동을 거쳐 국경을 돌아보고 사냥을 즐기다 왔다.

여기서의 비려 또는 패려에 대해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거란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요동과 인접해 있는 점에서 위치가 들어맞고, 사람을 돌려받으러 갔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서술과 일치한다. 구체적으로는 거란의 필혈부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이설이 있지만, 적어도 요하 중상류 지역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즉 광개토왕 원년부터 시작된 거란 정벌이 이 시점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 특히 광개토왕은 복수의 전선을 함께 운용한 것으로 보이고, 훗, 양면전쟁 따위... 『광개토왕릉비』 는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왕의 정복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정복이 마무리되면 당시까지의 경과를 몰아서 정리하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영은 유목민 마을의 단위라고 한다. 보통 100개의 게르가 모여 1영을 이룬다고 하는데,[17] 이에 따르면 비려의 인구는 700영×100게르×5인[18]으로 자그마치 35만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유목민 마을이라는 것이 애초에 100개 단위로 정확히 끊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위서에 따르면 당시 거란은 대다수 북위의 침공을 피해 달아나 흩어진 상태였다. 또한 영(營)과 부(部)가 서로 병렬적인 관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초원의 공동체는 부(국가)-읍(마을)-락(가족)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이라는 단위는 찾아볼 수 없다.

요동을 거쳐 돌아왔다는 서술을 자세히 보면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과 북풍(北豊)에 왔다고 되어 있는데,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로 흔히 요동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고 북풍과 역성은 모두 요동군에 소속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고국양왕 때까지만 해도 요동은 후연의 땅이어서, 거란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요동 일대를 확보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후연의 양평령 단등의 묵인하에 요동 땅을 맘대로 지났거나, 이미 그 이전에 양평을 제외한 요동 일부, 즉 역성과 북풍을 미리 확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성과 북풍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설이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특히 북풍의 위치에 대해 혹자는 요양 북쪽이라거나 심양 서쪽이라 하기도 하고, 막가면 통화 즉 국내성 인근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요동반도 한가운데로 표시되어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이 부분에서 비려라는 판독을 따를 경우, 碑麗라고 쓰는데, 여기서 앞글자는 비석이라는 뜻이고 뒷글자는 매다라는 뜻이 되어 비석에 매달아놓은 제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게 된다. 왠지 고어하다 백제를 백잔으로, 왜를 왜구 등으로 멸칭한 것과 같은 거란의 필혈부에 대한 멸칭이 되는 것이다.

  • 비려(패려?)의 정체는?
    • 부산적 : 신대왕 5년 (기원 후 169년) 왕은 대가 우거(優居), 주부(主簿) 연인(然人)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현도태수 공손도(公孫度)를 도와 부산적(富山賊)을 토벌하였다. - 삼국사기 // 이 기록의 부산적이 비문에 나타난 부산이라는 지명과 통하는 점에 착안하여 부산적이 비려와 모종의 연관이 있는 세력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부산은 요하 서쪽 법고현 서북쪽 일대라고 한다.
    • 진서에 나오는 비리 : 당나라 시기에 편찬한 동진의 역사를 다룬 진서에 비리라는 세력이 나온다. 숙신의 서북쪽으로 말을 타고 이백 일을 가야 나온다고 한다. 너무 멀다.... 물론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 것은 맞지만, 이백일 어쩌고 하는 부분이 잘못이라고 볼수도 있다. 기록 자체는 바로 밑 위서의 것보다 좀 늦지만 시기는 아래 위서의 기록이 5세기이나 이것은 4세기로 좀 빠른 편.
    • 북위 측 기록의 필혈부 : 위서 거란 열전에 나오는 필혈부와 같은 세력이라는 설이다. 위서의 편찬 시기가 6세기 북제 시기임을 고려하면 그럴싸하다.
    • 거란 측 기록의 비리 : 저 멀리 거란의 역사를 다룬 요사의 지리지에 비리군(陴離郡)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거란에서 집주 회중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한나라 때 험독현에, 고구려 때 상암현에 속했다고 한다. 이 비리군이 비려족의 위치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요사 지리지의 신뢰도와 500여년을 훌쩍 뒤어넘는 어마어마한 시간적 격차를 생각해보자.
    • 또다른 고구려 라는 설 : 거란계의 부족이라는 일반적인 논지와 달리 완전히 안드로메다로 가버리는 설. 고구려의 끝 글자인 麗자가 비려의 끝 글자이기도 한 점에 주목하여 비려라는 뜻을 고구려에 반발적인 고구려계의 부족에 대한 멸칭비석에 묶어놔야할 고구려 놈들으로 보고 고구려의 선조인 대수맥과 대립한 수맥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소수맥은 이미 고구려 초기에 고구려에 흡수되어 안드로로 사라지고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3.2.4. 백제의 항복

영락 6년, 북방 전선에서 거란-비려와의 전쟁도 마무리되었고, 이제 광개토왕은 그동안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에 집적거린 것을 응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밀고 들어갔다. 수로와 육로 양면으로 진공하여[19] 아단성, 미추성, 대산한성, 고모루성 등이 무너지고 백제의 수도로 압박해 들어가니, 그때까지 함락된 백제의 성이 모두 58성에 700촌이었다.[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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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근성의 남자 아신왕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어 응전하려 하자, 광개토왕은 분노하여 아리수을 건너서 성을 압박하였다. 마침내 군대가 격퇴되고 성이 포위되기에 이르러 처지가 곤란해진 아신왕은 광개토왕에게 항복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면서 '지금부터 이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맹서를 했다. 광개토왕은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수도로 돌아왔다.

이로서 백제와 고구려의 직접적인 전쟁은 끝이 났다. 고구려는 남방 전선에서 백제를 완전히 압도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근성남 아신왕은 계속해서 반격 시도를 멈추지 않았는데, 보는 사람이 애처로울 정도로 족족 실패한다.

광개토왕 6년 5월에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왜국으로 보내어 우호를 맺고 7월에는 한강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한데다, 다시 이듬해 봄에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앉히고 새로 쌍현성을 축조하는 등 반격을 노렸다. 그리고 그해 8월에 드디어 야심차게 군사를 내어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으나 하필이면 그날 밤에 병영으로 유성이 떨어졌다.(...) 하늘이 외칩니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그러자 하늘의 뜻이라 여겨 회군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신왕은 바로 다음달에 도성 사람들을 모아서 활쏘기를 가르치며 긴장 국면을 유지했다.(...)

3.3. 6년~9년 : 주변 정리

3.3.1. 요동 확보

이렇게 백제를 항복시킨 광개토왕은 다시 군대를 북으로 돌려서 광개토왕 6년에 후연의 요동성을 차지하고, 요동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 사건은 《동사강목》에만 기록되어 있어 후대의 추산이 아닌지 정확한 사실 여부가 의심되는 점이 있지만, 어찌되었든 이 즈음에 광개토왕이 요동을 고구려의 영역으로 삼았다는 점은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

우선 당나라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양서'와 '북사' 고구려전에 "모용수가 죽고 모용보가 즉위하자, 광개토왕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 2국 왕으로 봉했다. 요동군을 공략하여 가졌다."[21]는 기록이 있다. 모용보의 재위기간이 396~398년임을 보면 요동으로의 진출은 대략 이 사이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광개토왕이 요동 방면으로 진출하자, 모용보가 이를 인정하는 셈으로 광개토왕을 책봉한 것 같다는 주장이 현재까지의 통설.

또한 원래 요동을 관할하는 평주자사의 치소는 요동반도의 평곽이었는데, 402년에 평주자사 모용귀가 평곽이 아닌 숙군성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적어도 402년 이전에는 후연이 요동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해동고승전에는 396년에 승려 담시(曇始)가 요동에 와서 불법을 전하니, 이것이 고구려가 불법을 들은 시초라고 전하고 있다. 따라서 397년 이전에 광개토왕이 요동을 확보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높아보인다. 다만 자치통감에 400년 3월 후연의 양평령 단등이 모반하여 살해당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양평현은 본래 요동군의 치소다. 그렇다면 요동군이 400년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 400년에 후연이 새로 점령한 신성과 남소성에 양평을 교치했다는 주장도 있고, 요동군의 영역이 고구려에 분점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하여튼 논의가 분분한 상태다.

후연의 역사를 보면, 이 시기 후연이 극심한 내분을 겪고 있었다는 점과 이어서 생각할 수 있다. 396년 후연은 북위를 상대로 참패를 겪고 모용수까지 분사하면서 국운이 뿌리째 흔들리는 상황이었다. 이후로도 북위에게 국토가 유린당하자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는 397년 용성으로 달아나게 된다. 하지만 398년 용성에서도 난한의 쿠데타로 모용보가 제거되고, 난한은 다시 모용성에게 제거되는 막장 상황. 이러한 후연의 위축과 혼란은 광개토왕의 요동 진출을 도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요동 진출이 완전한 것은 아니라서 훗날 후연이 요동으로 쳐들어오기도 하고 그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전선이 요서까지 확장되며 요하를 중심으로 후연과 고구려가 공방을 거듭한다. 402년 숙군성을 깨뜨리고도 그것을 유지할 능력이 안 되었는지, 406년 후연이 다시 숙군성에 자사를 배치하는 것이 좋은 예.

3.3.2. 숙신족 복속

영락 8년, 광개토왕은 요동의 정반대인 고구려 동북방 변방으로 한 부대의 군대를 파견해 신족(광개토왕 비문에는 식신이라 나옴)을 순찰하였다. 이때 그들의 막사라성 가태라곡의 남녀 삼백여인을 붙잡았다. 이후로 숙신족은 고구려에 조공을 약속하고 내정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을 받기로 하여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전의 서천왕대에도 숙신족을 복속시킨 적이 있기 때문에 이때의 숙신족 복속은 재복속이나 지배력 강화, 또는 서천왕대에 복속시킨 숙신족과는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른 숙신족 세력을 복속시킨 것으로 보는 경우 서천왕 대 복속된 숙신은 송화강 유역, 이 때 복속된 숙신은 단강 유역의 것으로 보는 주장이 유력하다.[22]

이때의 숙신이란 세력은 훗날 물길-말갈로 변모하는 세력으로 발해를 거처 여진-만주족이 된다라는게 학계의 통설이긴 한데, 연구가 축적되면서 숙신,읍루,물길,말갈,여진,만주가 서로 별 연관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들은 북쪽으로는 흑룡강,동쪽으로는 오호츠크해에 이르며 서남으로는 현재의 연길지방 이북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매우 광범위한 영역에 숙신이라 통칭되는 숙신계 종족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고 서로 남남으로 퍼저있었다.광개토왕대에 복속한 숙신은 그 규모로 보아 숙신족중 일부 세력으로 보인다.

이때 복속된 숙신은 장수왕대에 고구려에 얹혀 북위에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의 부용세력이 된것 같다. 하지만 또다른 숙신계인 물길이 성장하여 고구려를 괴롭힌다.

※식신(백신?)의 정체는?
  • 이상의 사실은 광개토왕비문에 나와있는 백신토곡(帛愼土谷-백신 땅의 곡이라는 뜻. 곡은 골짜기를 말한다. 토욕혼이 아니라....) 복속 기사를 바탕으로 도출한 것인데, 백신의 백자를 백으로 판독하느냐 식으로 판독하느냐에 따라 복속대상이 달라질수 있다. (숙신이 식신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문이 워낙 훼손이 심해서 정확한 판독이 어렵다. 백(帛)자나 식(息)자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1.동예 계통의 세력 : 백신으로 판독하면 숙신이 아닌 강원도 방면의 동예 세력으로 추측할수 있다. 광개토왕이 영락 10년에 한반도 방면으로 남진한 것이 근거이다. 그 전에 미리 교통정리를 하며 신라로 가는 길에 강원도에 위치한 동예 부족을 손봐주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동예 세력으로 알려진 세력들중 백신이란 이름을 가진 세력이 없다. 또한 강원도 방면의 동예 세력은 이미 선대에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태조대왕이 동예를 복속하기도 했거니와, 앞선 동천왕대에 신라와 충돌하는 것으로 보아[23] 적어도 동천왕대까지는 고구려에서 동예의 방해 없이 신라로 가는 길이 열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아니면 영락 6년 백제를 정벌할때 백제의 58성 700촌에 편성되어 있던 동예 세력을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2.숙신 계통의 세력 : 식신으로 판독하면 숙신의 이칭으로 파악된다. 학계에서는 숙신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다만 한국 고대사 관련 자료에는 숙신이라고 나오는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고 동예와 숙신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가끔 동예와 숙신이 한꺼번에 나오는 실수도 보인다. 하지만 백신이라는 판독이 정확하다는게 확증될 경우 숙신설은 안드로메다로 가버린다. 숙신을 백신이나 그와 비슷한 명칭으로 칭한 사례가 없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동예라는 확증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누군지 모르겠다가 되어버린다.

3.신라 설 : 왜구로부터 구원해주러 가며 손봐줬다는 설.

4.백제 설 : 중국 학자 건군의 주장. 백제의 일부 영토를 순찰했다는 설이다.

3.4. 9년~17년 : 서방의 연, 남방의 왜

3.4.1. 신라 구원과 임나가라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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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대 고구려가 신라에 하사한 호우명 그릇.[24]
399년, 백제에서는 아신왕이 다시 한번 군사를 모아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하지만, 백제는 백성들이 징집을 피해 외국으로 달아나버려(...) 군사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달아난 백성 가운데 궁월군(弓月君)을 필두로 한 일부는 다시 왜로 건너가려고 했지만, 신라의 저지를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25] 이런 내부적인 문제로 인해 고구려에 복수할 기회를 노리던 백제는 맹서[26]를 어긴 채 와 화통하게 되었고, 마침내 백제에 의해 끌어들여진 왜가 신라를 침공했다.

영락 9년, 이러한 남방의 정세를 감지한 것인지 광개토왕이 평양에 행차하고 있는데, 신라가 사신을 보내서 왜인의 침공을 받았다며 구원을 요청하였다. 광개토왕은 사신에게 밀계(密計)를 알려준 뒤 돌려보낸다.

영락 10년에 이르러 광개토왕은 보기 5만의 대군을 편성하여 신라로 보냈다. 고구려군은 남거성에서부터 왜인을 구축하며 신라성까지 이르렀고, 왜인이 버틸 수가 없다를 외치며 퇴각하자 이를 추격해 임나가라에 이르러 성을 항복시켰다. 항복시킨 성에는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했다.

사실 이 대목은 설이 굉장히 다양하게 갈리는 부분인데, 주로 임나가라·종발성·안라인수병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 임나가라(任那加羅)의 경우에는 이것을 '임나라는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임나가라로 보기도 하고, '임나의 가라'로 보아서 김해의 가라국으로 보기도 하고, '임나와 가라'로 보아서 창원의 임나와 김해의 가라로 보기도 한다.

  • 종발성(從拔城)의 경우에는 종발(從拔)을 동사로 봐서 '따라서 성을 무너뜨렸다'로 보기도 하고, 이 자체를 하나의 명사로 보아서 '종발성'이라 보고 이를 부산이나 김해에 비정하기도 한다.

  • 안라인수병(安羅人戍兵)의 경우에는 안라(安羅)를 명사로 봐서 '안라국 사람 수비병'으로 보기도 하고, 안(安)을 동사로 봐서 '라인(羅人) 수비병을 안정시켰다'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라인'이 누구냐는 문제가 겹쳐서 신라인이라는 설, 가라인이라는 설, 안라인이라는 설, 라인(邏人)이라는 설이 서로 엇갈리는 상황. 아 입맛대로 골라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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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가야-왜국의 연결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를 계기로 신라가 고구려에 거의 복속되었다는 사실이며, 또한 근초고왕 대 이룩되었던 백제-가야-왜국의 국제 커넥션이 사실상 와해되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김해의 가락국은 기존까지 담당해오던 국제사회의 중간 매개자 역할이 축소되면서 가야 내부의 주도권도 점차 상실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른바 '전기 가야연맹의 와해'로 지칭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의논이 갈리지만 그 뒤로도 김해 가락국은 일단 존속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구려가 가야지방에 유형지를 두었다는 기록과 가야의 정치에 고구려가 개입한 적이 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명확한 출처가 필요하다.

이후 영락 14년에 왜가 다시 대방계(帶方界)로 침입해 들어오긴 하지만 [27] 이내 평양에서 출정한 광개토왕에게 궤멸당한다.[28]

백제는 광개토왕 14년에 전지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내분을 겪기도 하거니와,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 속에서 친위세력으로 해씨와 목씨가 주도권을 잡다가 어린 구이신왕이 즉위하여 태후의 섭정을 받고 비유왕은 모종의 이유로 들판에 가매장되는 등 이리저리 치이면서 왜국·중국·신라와의 외교에나 전념(...)하게 된다. 훗날 이것을 수습하고 백제를 중흥한게 아신왕이 죽고나서 반세기쯤 뒤에 즉위한 개로왕이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은 함락되고 개로왕은 죽임당한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영락 원년 남으로 백제 침공, 북으로 거란 침공. 영락 4년까지 남으로 백제 방어, 영락 5년 북으로 비려 침공. 영락 6년에 대대적인 백제 강습. 영락 8년에 잠시 북으로 숙신 좀 손봐주고, 영락 9년에 요동에서 후연 공격 방어. 영락 10년까지 신라에서 왜군 몰아내고 가야까지 진출... 군대를 동원하기 힘든 계절을 제외하면 거의 쉬지 않고 정복만 했고, 그야말로 전방위적인 전선의 공격-방어 교차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민심이 동요하지 않고, 가는 족족 이겨먹었다. 사실 고대나 중세 국가들 중엔 이런 식으로 연속적인 군사활동이 이어지는데도 나라가 부강하고 민심이 안정적인 사례가 의외로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아틸라 시절의 훈이나 카롤루스 대제시절 프랑크다. 이는 강대한 군대를 그 국가가 장기간 보유하기 힘들 경우 나타나는 현상으로, 잇단 승리와 전리품을 통해 군대를 유지하고 그 승리가 계속되는 동안 국가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건 상당히 외줄타기에 가까운 국가 운용방식이며 적정선을 지키지 않으면 국가가 위태로워진다.

각설하고,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의 이런저런 세력들을 손봐주는 과정에서 서서히 요동의 패자 자리를 놓고 숙적 후연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3.4.2. 후연과의 8년 전쟁과 후연의 멸망

요하를 건너 후연의 숙군성으로 진격하는 광개토왕 민족기록화[29]
서기 400년 1월 광개토왕은 후연에 사신을 보내어 모용성에게 조공했지만[30] 모용성은 조공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신이 무례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해 2월 쳐들어온다. 모용희를 선봉으로 신성과 남소성을 무너뜨리고 700리에 달하는 땅을 먹었으니, 사실상 요동의 방어선에 구멍이 난 셈이었다. 다행히 직후 양평령 단등의 반란으로 후연의 요동 진출이 주춤하면서 한숨 돌린 고구려군은 남쪽 신라로 내려와 왜군을 몰아냈고, 이내 다시 북쪽으로 돌아와 반격을 시작한다.

401년, 반란을 진압하던 와중에 모용성이 사망하고 모용희가 즉위하는 등 후연에 내홍이 계속되는 틈을 타서 광개토왕은 다시 신성과 남소성을 점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402년 1월에 후연이 서쪽으로 요서에서 북위를 몰아내자, 광개토왕은 후연의 군사력이 서쪽으로 향한 틈을 타서 5월에 군사를 보내 평주자사가 머무르고 있던 숙군성을 쳤다. 이에 숙군성에 주둔하고 있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지만, 그대로 숙군성을 점거한 채 영역화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인 404년 11월에 모용희는 왕후 부씨와 함께 사방으로 쏘다니면서 사냥을 벌이는데, 이 와중에 호랑이와 이리에게 죽거나 얼어서 죽은 자가 5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에 12월 광개토왕은 다시 한번 후연을 공격해 연군에서 100여인을 살육·약탈했다. 연군은 본래 베이징의 계현이 치소지만, 연군은 399년에 태수 고호가 북위에 갖다 바친고로 이 시점에는 대릉하 유역에 이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31]

우리역사문화연구소의 김용만 소장은 저서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서 앞선 모용희의 사냥을 고구려의 공격을 막기 위한 출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짐승이나 동사로 5천여 명이나 죽는다는게 사리에 맞지 않고, 무엇보다 한참 전쟁중인 상황에서 적군이 코앞까지 처들어왔는데 사냥이나 하고 있는다는게 쉽사리 수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대 자체가 사냥이 11월이고 전쟁이 12월이라고 되어 있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 뒤로도 광개토왕 13년에 광개토왕은 군사를 내어 후연을 쳤으나,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만 전하고 그마저도 별다른 기록이 없다.

해현지에 따르면 404년에 고구려가 요동반도 남쪽의 여러 섬들을 점거하고 성을 쌓았다고 한다.

뒷치기는 반복된다. 영락 14년에 왜군이 대방계로 침입해와 광개토왕이 직접 이를 섬멸하는 사이, 광개토왕 14년 모용희가 요동성으로 직접 쳐들어 온 것이다. 모용희는 요동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나, 모용희가 동행한 황후 부씨과 함께 성을 깎아버리고 가장 먼저 입성하겠다며(...)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를 틈타 고구려군이 방어태세를 정비하여 결국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해 12월, 후연의 황제 모용희는 다시 거란을 정벌하러 용성을 출발해 이듬해 1월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위세에 놀라 퇴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동행한 황후 부씨가 바가지를 긁는 바람에(...) 치중까지 내버리고 3천 리를 달려서 고구려의 목저성을 기습했으나, 얼어죽는 사람이 길에 이어지는 마당에 이런 군대를 가지고 이길 수 있을 리가.(...)

광개토왕 15년 봄에 고구려에 가뭄이 들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이 기간에는 고구려의 국내 사정이 안 좋은 관계로 후연에 공세를 취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듬해 고구려의 사정은 궁궐을 증축할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여겨진다.

광개토왕 16년 7월에 후연에서는 드디어 풍발이 반란을 일으켜 막장 황제 모용희를 살해하고 모용운을 추대했다. 모용운은 본래 고구려의 지파로서 모용보의 양자였는데, 이 때문인지 왕위에 오른뒤 고씨로 성을 갈았다. 후연이 북연으로 바뀐 것이다.[32] 하필이면 고구려 사람인 모용운을 골라 세운 것으로 미루어 풍발이 고구려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일단 고구려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아 반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리고 광개토왕 17년 3월, 광개토왕은 북연으로 사신을 보내어 '종족을 베풀었다.(叙宗族)' 모용운이 고씨로 성을 회복한 것을 본가(?)인 고구려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북연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는 다소 확대된 해석으로 고구려 우위의 화친이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어디까지나 명목상인 것이지만, 북연은 황제국이고 고구려는 왕국이었기 때문이다.[33]

한편 영락 17년에 광개토왕은 보기 5만으로 모종의 적과 사방합전(四方合戰)하여 모조리 참살했다. 노획한 개갑이 만여 령이고 군수물자가 부지기수에 돌아오며 깨뜨린 성이 사구성, 루성, 우불성 등이라고 하는데, 하필이면 이 부분에서 적이 누군지 알려주는 내용이 판독 불가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적을 후연으로 보는 설과 백제나 왜로 보는 설이 갈리고 있다.

3.5. 17년~22년 : 말년

3.5.1. 남연과의 교섭

408년 광고를 도읍으로 삼아 산동 일대를 장악한 에 사신을 보내어 천리인(千里人) 10명과 천리마 1필, 큰 곰 가죽, 장니[34]를 선물로 주었다. 남연 왕 모용초는 기뻐하며 물소와 (말하는) 앵무새를 답례품으로 보냈다.[35]

전후맥락을 알 수 없는 기록으로 그냥 단순한 국가 간 교섭인지 다른 배경이 있는지 알기 힘들다.

3.5.2. 태자 책봉 등

광개토왕 18년 4월, 광개토왕은 거련(장수왕)을 태자로 삼았다. 7월 나라 동쪽에 독산등 여섯성을 쌓고 평양의 민호를 그곳으로 옮겼다. 비교적으로 인구가 빈약한 동쪽에 평양의 반동적인 인구를 이주시켜 평양 지배를 강화하고 동쪽을 개척하면서 동부여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8월 남쪽에 순행했다. 아마 백제를 염두에 둔 순행이였을 것이다.

3.5.3. 동부여 정벌

광개토왕의 릉이라는 주장도 있는 왕릉. 물론 근거는 없다[36]

영락 20년 고구려의 동북방에 위치한 부여(동부여)가 고구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왕이 직접 토벌했다. 고구려군이 동부여의 수도에 이르자 동부여가 항복했다.이때에 동부여를 떠받드는 5압로(5부)가 고구려에 투항했고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을 공파했다. 바로전에 고구려가 상대한 후연은 서방인데 동부여는 그 정반대인 동북방이다. 광개토왕은 동서남북 사방을 가로질러가며 정복전쟁을 벌인 것이다. 정말이지 근성가이가 아닐수 없다...

일각에서는 64개의 성과 1400개의 마을이 광개토왕 생전에 공략한 성과 마을의 전부라고 하는데 근거가 매우 부실하다. 그 근거가 광개토왕 비문에 나와있는 함락된 성의 개수를 도합하면 64개가 되고 비려에게 얻은 6~700영에 백제에게 얻은 700개의 마을을 더하면 1400이 된다는건데... 유목민의 마을 단위인 영과 백제의 마을을 의미하는 촌은 병렬적으로 셈할수 있는 같은 단위가 아니다. 무엇보다, 비문에서 6~700개라고 애매하게 적어놨지 700개라고 콕 집어놓지 않았다. 6~700개라고 하니까 700개라기보다는 600개에서 700개 사이 650개 정도로 보는게 옳다.

아마 동부여는 고구려가 동천왕대,고국원왕대에 걸처 약화되는 틈을 타 자립하고 세력을 강화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광개토왕비문』등에 보이는 고구려가 동북방 방면에 행한 일련의 조치는 동부여를 의식하고 한 것으로 보인다. 동부여에 인접한 숙신 복속도 동부여 정벌을 위한 전초전이였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의 인구가 40만 인데다가 고구려가 망할때 부여천(부여 지방) 인근의 성만 40개이고 동부여의 옛 땅에 위치했던 발해의 초기 인구가 50만 정도라고 했으니 64개의 성에 1400개의 마을이 꼭 오버는 아니다.

암튼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동부여 정복은 동부여의 세력 규모나 숙신 정복이라는 전초전까지 필요했던 점을 볼때 거란-비려 정복이라는 전초전을 치룬 후연 정벌과 신라 복속이라는 부가적인 전쟁을 치룬 백제 정벌에 비견될만한 규모의 정벌이였던것으로 보인다. 동부여의 위치는 숙신의 인근으로 삼강평원 즈음에 위치했던것 같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노태돈의 주장 이래 동부여의 위치를 두만강 유역과 책성(현재의 훈춘?)으로 보는게 대세이다. 그 근거는 부여가 선비에게 망했을때 부여의 왕족들이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속주 옥저로 도망왔고 이들이 나중에 자치권을 행사하다가 고구려가 힘을 잃은 틈을 타 동부여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호의 지적처럼 두만강 유역에서는 동부여라는 존재의 고고학적 확인이 안된다. 더구나 고구려가 아무리 힘을 잃었다한들 일개 망한 나라의 유민들에게 자신들의 속주를 떼어주면서 까지 동부여같은 큰 나라를 세울 발판을 마련해줬을까...

3.5.4. 내치

광개토왕때에 고구려 왕권을 정당화하는, 천손의식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의 천하관이 완성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천하관은 광개토왕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광개토왕비문을 보면 백제,신라,동부여 같은 우리 민족의 국가는 속민 취급하며 구원과 고구려로부터 이탈억제의 당위성을 내세우고 있는데 반해 패려,숙신,후연,왜와 같은 이민족 세력에 대해선 무참히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삼국통일 의식의 시초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볼수도 있다. 단재 신채호도 왜와 선비족으로부터 민족을 구원한 사람으로 봤다. 우리가 현재 널리 알고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를 전하는 가장 이른 기록도 광개토왕비문이다. 광개토왕 관련 유물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자 모양이 광개토왕이 이끌었던 고구려군의 문장이라는 설도 제기된 바 있다. 한 편 광개토왕은 독자적인 연호 영락(永樂)을 제정하였다. 한국 역사상 사용된 연호로 확인되는 것중 가장 이른 것이다. 또한, 소수림왕 이래 대대적으로 지배층이 밀어오던 불교 진흥책을 계승하여,불교와 관련한 몇가지 업적을 남겼다.요동을 차지한뒤 이 지방의 혼란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승려 담시[37]를 파견하여 민심 교화 사업을 펼첬다.[38] 장수왕대의 평양천도를 위한 기반을 닦았다. 안학궁을 건설했다. 기록에는 광개토왕대에 안학궁 건설을 시작했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지만 안학궁이 427년에 완공되었는데 규모로 보아 장수왕 즉위후 십여년 남짓한 시간동안 뚝딱 지었을 리는 없고 광개토왕대부터 이미 기반을 닦고 있었을 것이다. 자주 평양에 행차했다.

장사,사마,참군등의 관직을 신설했다. 사마, 참군은 군사에 관한 관직이다. 후연을 정탐하기 위해 만든 관직이라는 설도 있다. 이 관직들이 신설된 시기는 북사 고구려전의 기록으로 보아 396년~398년 즈음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왕릉의 묘지기들의 인생이 망가지는걸 걱정하여 수묘인 제도를 정비했다. 단순히 묘지기들에 대한 걱정뿐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릉이 선비족 연나라에게 털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한듯 하다. 수묘인의 구성에는 광개토왕이 일생동안 잡아온 한(韓)족[39]과 예족으로 구성된 생구(노비)들이 주를 이루었던듯 하다. 수묘인 제도를 정비한 구체적인 시기는 알수없으나 대강 정복전쟁이 마무리된 이후로 보인다. 수묘인 착취 자체가 대부분 피정복민을 대상으로 한것이기 때문이다. 광개토왕대의 수묘인 제도 정비에 대해서는 아래 인용문을 참조하면 된다.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家)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家)이고 간연(看烟)이 300가(家)로서, 도합(都合) 330가(家)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광개토왕릉비

413년 사망했다.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라 하고 장수왕 재위 3년 갑인년 9월 29일(음력)에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광개토왕비를 세우고 국강상 지역의 산릉에 매장되었다.

3.5.4.1. 요동성 육왕탑 설화

삼국유사에 나오는 요동성 육왕탑 설화의 성왕이 광개토왕이라는게 일반적인 설이다. 요동성 육왕탑 설화의 내용은 이곳에서 볼수 있다.

3.6. 삼국사기 기록

一年夏五月 광개토왕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10개의 백제성을 빼앗다
一年秋九月 거란을 정벌하다
一年冬十月 백제 관미성을 빼앗다
二年秋八月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고 평양에 사찰을 창건하다
三年秋七月 정예기병으로 백제의 침략을 물리치다
三年秋八月 나라 남쪽에 7성을 쌓다
四年秋八月 패수에서 백제와 싸워 이기다
九年春一月 사신을 후연에 보내 조공하다
九年春二月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다
十一年 후연 숙군성을 공격하다
十三年冬十一月 후연을 침략하다
十四年春一月 후연이 요동성 공격에 실패하다
十五年秋七月 해충과 가뭄으로 농작물이 피해를 입다
十五年冬十二月 후연이 목저성을 공격해왔으나 패배하다
十六年春二月 궁궐을 증축 수리하다
十七年春三月 북연에 사신을 보내다
十八年夏四月 왕자 거련을 태자로 삼다
十八年秋七月 나라 동쪽에 6성을 쌓다
十八年秋八月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
二十二年冬十月 광개토왕이 죽다

광개토왕릉비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삼국사기에는 신라를 구원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또한, 유사역사학계의 의견대로 삼국사기가 광개토호태왕을 별것 아닌 왕으로 기술한 면도 있다.

4. 평가

4.1. 거품?

종종 광개토왕이 넓힌 땅이 좁고, 상대한 적들이 약체라며 평가절하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으로 광개토왕이 넓힌 땅은 영역화하지 않고 복속하는 선에서 끝난 비려,숙신,신라를 제외하더라도 꽤 넓은 편이다. 먼저 백제로부터 얻은 한강 유역의 대강 현재의 경기도+강원도 되는 땅과 후연으로부터 얻은 요동과 영토 전체를 집어삼킨 동부여(현재의 삼강평원 일대)를 도합해보면 대충 아무리 작아도 한반도에서 함경도를 제외한 정도의 땅은 나온다. 고구려의 북쪽으로는 비려나 동부여같은 세력을 제외하고 이미 고구려가 속국 북부여를 통해 장악한 송눈평원 이북으로는 긁어먹을 자원이 적기 때문에 최대한 진출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나중에 고구려의 필요에 따라 북만주의 지두우나 실위같은 세력에게 간섭하기는 한다.

사실 비려,숙신의 경우 그 주권에 고구려가 얼마나 침투했느냐에 따라 자치주 정도까지 볼 여지가 있다. 외교권등 주요 권한을 고구려에 위임하고 기본적인 자치권만 행사했다면 고구려의 자치주라고 봐도 상관없다. 어쨋든 사료의 부족으로 그 지배 방식을 알기 힘들다. 비교적 사료가 풍부한 신라의 경우 군사,정치등에 개입했던것 같으며 중원고구려비에 의하면 고구려는 신라를 자신들의 내지로 인식했던것 같다.

또한 상대한 적들이 약체라는 것도 백제,후연의 상황에 대한 디테일한 파악과 고구려 북방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먼저 백제의 경우 근초고왕대보다 포쓰가 후달리긴 했으나 딱히 쇠퇴했던 흔적은 또렷하지 않고 광개토왕이 즉위하기 이전 진사왕은 왕권강화를 성공적으로 이루고 고구려와의 전선에서도 결코 수세는 아니였다. 하지만 광개토왕이 즉위하자마자 진사왕의 백제에 대해 펼친 파상적인 공세로 전세가 순식간에 역전된 것이다. 내분또한 광개토왕의 공세를 견뎌내지 못한 진사왕의 입지가 약해지면서 이를 틈탄 아신왕이 재기를 도모해 일시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아신왕이 즉위하고 백제는 별다른 내분없이 진씨와 왕실의 유대아래 고구려에 적극적인 반격을 가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실패하고 결국은 레알 내분이 터저 아신왕과 진씨가 실각하고 친고구려적인 해씨가 집권하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백제의 내분이 광개토왕의 정복활동을 도운적은 없고 오히려 광개토왕의 공세로 인해 촉발된것.

후연의 경우 확실히 396년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는등 북위와의 전선에서 열세였고 중원까지 상실하는 바람에 397년 광개토왕이 요동을 차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수있다. 하지만 오히려 후연은 중원을 상실하고도 과거 전연의 출발지였던 요서를 기반으로 재기를 도모하여 북위로부터 일부 실지를 수복하는데 성공하고 400년에는 고구려의 땅까지 빼앗는데 성공한다. 후연이 보여준 이러한 모습으로 보아 후연이 쇠퇴했다 한들 적어도 고구려 정도는 상대할 힘이 남아있었다고 볼수있다. 요서땅이 중원에 비해 좁다고 해도 후연의 전신인 전연이 그 땅을 발판으로 팽창했음을 생각해보면 결코 무시할만한 입지는 아니다. 결국 아무리 막장이 된 후연이더라도 백제보다는 강했고 (백제보다 훨씬 많은 군사를 무리없이 동원했고 일단 중원을 지배했던 국가라 백제와는 클래스가 다르다.) 이는 광개토왕에게 쉽지않은 상대였을 것이다. 실제로 후연과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407년에는 후연을 정벌하기 위해 5만 대군을 동원한다. 백제를 정벌할때 최대 동원병력이 4만임을 상기하자. 물론 남북조 시대가 끝난 뒤 나온 통일 제국들에 비하면 딸리는게 맞지만.

비려, 숙신, 동부여의 경우 비려는 전연과 북위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훗날의 거란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소수림왕대 고구려의 변방으로부터 북변 8부락을 빼앗을 정도로 강세였다. 이는 결코 비루하고 보잘것없는 허접한 유목민들이 아니였음을 보여준다. 다만 숙신은 딱히 강세를 보였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숙신은 실제로 광개토왕이 직접 출병하지 않고 군대를 보내 처리하는데 광개토왕이 가장 손쉽게 처리한 상대였을 것이다. 동부여는 영역이 64성 1400촌이나 되었던 것으로 보아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였다. 광개토왕비문에서는 광개토왕이 수도에 이르자 왕이 항복하고 광개토왕의 은혜가 동부여 전국에 퍼젔다는 식으로 별 고난없이 정복했던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 미사여구일 뿐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미화하는건 정복의 과정이 험난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암튼 광개토왕은 별볼일없는 쭉정이같은 상대들을 툭툭 쓸어뜨리며 쥐꼬리만한 땅을 넓힌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4.2. 역사적 의의


광개토왕대에 만주와 한반도의 여러 경쟁세력들을 극복한 것으로 인해 고구려는 중원의 패자 북위,몽골의 패자 유연과 함께 요동지역의 패자로 등극한다. 이는 최초로 만주를 하나로 통일한 정권이 등장하는 계기였다. 이전까지는 항상 비슷한 세력들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광개토왕 이후로 만주에는 고구려말고는 북만주의 좁쌀만한 부족국가들만 남게된다. 나중에 거란이나 물길,돌궐이 등장하여 만주의 주권을 위협하지만 고구려는 이를 어찌저찌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일보다는 배타적 패권을 휘두르는 국가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신라는 물론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남부마저도 고구려의 통제권에 놓여 백제나 왜[40]가 중국에 사신을 맘대로 못보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사군이 동이지역을 통제하던 것을 고구려가 바톤터치했다는 견해도 있다. 넓게 보면 광개토왕대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것과 신라에 고구려 문화를 침투시킨 것은 삼국통일 의식의 기반이 형성되는 계기가 볼수도 있다. 실제로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바탕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고 이때문에 백제와 고구려와 충돌하는 과정에서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가 나중에 삼한일통을 정당화하려 이용한 고구려=마한 드립도 고구려가 마한의 고토인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것이 배경이다.

가끔 삼국 초기의 정복군주들과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크고작은 부족국가들을 처묵한것이고 광개토왕은 그 부족국가들이 수십,수백개 모인 국가들을 상대한 것이라 차원이 다르다. 애초에 역사적 인물들이 누구는 병신이오, 누구는 위인이오 칼로 자르듯이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정복군주로서의 면모를 살펴보아도, 광개토왕은 독보적이다. 한국사 전체를 살펴볼때 남북국시대 이후로는 이렇다할 정복전쟁이 없었다. 기껏해야 발해, 고려, 조선이 반항적인 여진족을 토벌하는 수준. 시대적으로 팽창할 상황이 아니다. 광개토왕은 이합집산의 정복국가시대라는 시대적인 상황을 100% 활용하여 200%의 결과를 낸 것이다. 이게 어찌보면 기회주의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 기회마저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날려먹는게 역사에서는 다반사다. 어차피 역사적인 업적이라는 것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개 이런 기회를 타고난다.

일생을 전방위적인 정복사업에 투신하여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군주는 일단 한국사 전반에서도 드물지만, 정복전쟁이 가장 잦았던 삼국시대에서도 누구보다도 독보적인 모습을 보였다. 비슷한 레벨로 비교되는 근초고왕이나 진흥왕의 정복전쟁도 괄목할 만한 것이지만 그들이 이룩한 국가는 그들의 사후 하나같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축소되어 풍비박산나거나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광개토왕이 이룩한 고구려의 패권은 장수왕의 경영과 함께 최소 1세기 이상 유지된다.

4.3. 중원 정복과 삼국통일?

태왕북~1.JPG
[JPG image (Unknown)]
형민우 '태왕북벌기' 中...
많은 한국인들이 고대 신라의 삼한일통에서 만주를 상실한 기억과 근대 식민지 시절의 아픈 기억때문인지 광개토왕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중국을 정복하거나 삼국을 통일했을까? 하고 공상을 하곤 한다. 발해가 고구려의 뒤를 이어 만주부근의 영토를 유지하긴 했지만, 기록부족으로 한국의 역사라는 인식이 약하고[41] 그나마도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한 뒤에 고려에 유민들이 흡수된 뒤에 한민족은 만주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삼국통일에 대해선 장수왕대에도 그런 짓 못하는거 보면 광개토왕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한반도가 그리 쉽게 먹을 땅이 아니다. 산악이라는 천연의 방벽에 농업생산력도 받쳐줘 인구밀도도 높다. 실제로 조선 시대 4군 6진을 개척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한 적이 없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당시 고구려의 인구는 69만호였고 백제의 인구는 76만호였다. 이를 현대적 기준으로 환산하면 대충 고구려 345만 백제 380만 정도가 나오는데 당시 신라의 인구도 고구려, 백제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이를 모두 합하면 천만에 육박하는 숫자가 나온다. 당시 당나라의 인구수가 300만호 초반으로 추산 되는데(대략 1500~1800만) 영토는 삼국 다 합해봐야 당의 1/10 이하 수준이면서 인구 수로는 당시의 중국 인구에 육박하는 수치를 보이고 있다. 흠좀무 다만 당시 당의 인구는 수 양제의 연이은 삽질과 내전으로 중국의 인구가 크게 감소한것이 큰 원인 이었고 안정기에 접어들었던 수 문제 당시의 중국의 인구는 5400만명 정도였다. 이처럼 한반도를 비롯한 일대 지역은 기름진 평야가 많고 산악 지형이 많아 외적을 방어하기 용이 하면서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쉬운 천혜의 지형이라 세계사를 통틀어 봐도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중의 하나였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국력의 기반은 경제력이고 경제력은 인구 수에서 나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잠재력이 높은 지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산악지형이 많다는 것은 외적방어라는 이점이 있지만 그 만큼 그 지역내에서 하나의 통합된 정권이 나오기 힘들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한반도 내에서 삼국은 서로가 주도권을 쥔적은 있어도 쉽사리 통일은 하지 못했었고 기껏한 통일 마저도 통일이라고 하기 힘든 결과물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만약에 삼국이 온전한 의미의 통일을 이루었으면 막대한 인구수와 생산력을 갖춘 막강한 강대국이 탄생했을 것이라며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중요한 점은 정복과 통치는 별개이다. 정복을 아무리 넓게 해도 통치를 못해 순식간에 와해된 국가는 역사상 한두개가 아니다. 예를 들어 몽골이라든지. 마케도니아라든지. 소련이라든지. 지금이야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그 당시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 백제는 말그대로 남남.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한민족이라는 의식이 형성된 건 빨라야 6세기 이후의 삼국시대 말기였고 이때가 되어서야 삼한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묶어서 통칭하기 시작했다. 그나마도 완전히 통합된 건 고려시대부터였다. 당장 후삼국시대에 각 지역의 호족들이 삼국 부흥이라는 기치를 얼마나 쉽게 내걸었고 또 거기에 얼마나 쉽게 호응했나를 생각해 보자. 거타지 설화 같은 내용을 보면 심지어 9세기 중반에도 '백제' 해적이라고 가리킬 만한 대상이 등장한다. 경남에서는 가야의 부흥이라는 명분도 호응을 얻었다. 광개토왕 생전에는 한반도 남부인들은 잡아다가 묘지기로 부려먹는 존재에 불과했다. 사실상 정복보다는 그냥 두들겨 패고 말 고분고분히 듣게 만드는게 이익이었다. 그래서 백제와 신라,가야를 신하로 부리고 점진적으로 잡아먹는 그랜드플랜을 세워둔 모양이였으나 백제 개로왕의 반발과 신라의 이탈로 실패한다. 하지만 이때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한 덕에 신라에 고구려와 서역의 문화가 이식되고 이는 후세에 한국이 고구려 계승을 주장할 근거로 작용한다.

무엇보다 실제 역사에서 광개토왕이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5만 대군을 가야에 파견하자 후연이 쳐들어오는 걸 못막아내는 걸 보면 5만 대군은 고구려가 요동지방의 전선까지 후연에게 양보하며 쥐어짠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후연을 상대로한 서방의 전선과 백제등 삼한을 상대로 한 남방의 전선을 공동으로 상대하기에는 고구려의 역량이 부족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후연과 백제가 서로 눈치를 봐가며 각자 고구려의 서쪽과 남쪽을 공격하여 고구려가 특정 방면으로 진출하는것을 방해하는 효과를 거둔다. 애초에 하나의 나라가 동서남북의 여러 전선을 유지하는게 매우 힘든 일이다. 그 거대한 당나라마저도 티베트와 신라를 저울질하느라 고생했던 점을 기억하자.

한편 중국 방면의 정복활동은 요서까지가 끝인 것이 확실하다. 후연 정벌에서 요서까지만 진출하고 더이상 중국 방면으로 진출하지 않았다. 못한것도 되고 안한것도 된다. 당시 중원의 상황은 막장의 끝으로 돌진하고 있는 오호십육국시대인지라, 도저히 먹고싶은 생각이 안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당시 중원은 명말처럼 내분으로 막장이 되어 무혈입성할수 있던게 아니라 난폭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날고 기는 유목민 엄친아 또는 막장들이 서로 잡아먹으려고 발악하는 시기라 광개토왕이라고 승리를 장담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기회가 아주 없던건 아니고 북위에 내분이 일어났을 때가 기회이긴 했으나 이때 고구려는 북연부여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때라서...

무엇보다 당시 중원에서 날고 기던 오호 군웅들이 전진이나 북위 때에 와서야 황제를 칭했음을 상기하자. 외부 침략자인 그들이 중원을 재패하려면 무엇보다 화북의 세족들의 지지와 호응이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침략자인 그들이 중원 세족들의 호감을 얻기란 쉽지않았다. 오호군웅이 '천왕'의 칭호에 안주한 것은 민심을 얻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까지 자그마치 1세기가 소요되었다. 그 사이 무수한 세력과 나라가 명멸해 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의 중원진출은 단순히 땅따먹기 정복에서 국한 될 사항이 아닌 것이다.

즉위 17년 후연이 사실상 망하고 고구려의 종족 내지는 하국으로 전락하면서 광개토왕은 그가 죽기까지 5년간 성을 쌓고 지방을 순행하는 등 굳히기에 힘썼고, 이는 광개토왕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장수왕대로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이는 재위 초의 격렬한 정복활동과 상당부분 대비되는 것이다. 이를 보면 딱히 정복활동을 연장할 생각은 없던 모양이다.

아니면 새로운 정복활동을 준비하다가 죽은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장수왕이 한강유역을 먹고 신라까지 마무리하러 내려왔던 것을 볼 때 고구려 내에서도 저거저거 뒤통수가 간지러운데 언제고 정리해야 되겠다 식의 사고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물론 장수왕이 막히긴 했지만, 대왕의 막강한 전투력 및 전기를 판단하는 능력을 고려해 볼 때 조금 더 오래 살았다면... 하는 생각은 들기 마련이다. 다만 여기에 백제의 국력회복이나 신라의 성장도 생각해야 한다. 특히 5~6세기 고구려, 백제 사이의 한강유역 영유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중심적인 if시나리오에 너무 힘을 실어주면 설득력을 얻기가 힘들 수 있다. 물론 재미야 있지만.

한 편, 태왕북벌기에서는 고구려 장수가 광개토왕의 활발한 정복활동을 보며 이분이라면 중원 정복도 불가능하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나온다.

4.4. 조선 문인들의 평가

4.4.1. 권근

옛날 진 양공(晉襄公)이 검은 상복(墨衰) 차림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진(秦)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는데, 춘추에서 이를 비난하였다. 고구려왕 이련(伊連)이 세상을 떠나자 3개월을 넘지 못하여 그 아들 담덕(談德)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쳐서 격파하였으니, 그 애통함을 잊고 꺼려하지 않음이 너무 심하다.

무릇 적병이 성문 밖에 쳐들어와서 종묘와 사직의 존망이 달려있다면 부득이 전쟁을 하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백제의 군사가 고구려 변경을 침범하지도 않았는데 담덕이 바야흐로 복중(服中)에 있으면서 감히 자신의 상사(喪事)도 집어치우고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를 쳤으니 이것이 인자(人子)의 애통한 마음이 있는 자이겠는가?

혹자는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대대로 원수지간이다. 진사(辰斯)가 이련 6년에 고구려 남쪽 변경을 침략하였고 다음 해에 또 도압성(都押城)을 쳐서 빼앗았는데 이련이 보복하지 못하고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담덕이 왕위를 계승하자 몇 달도 지나기 전에 군사를 일으켜 적군을 쳐서 그 수치를 씻었으니 이는 어버이를 빛나게 한 것이요, 꺼려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나 적국과 은혜가 있든지 혹은 원한이 있든지 간에 후손에 이르기까지 두고 두고 갚는 것은 아니다. 구부(丘夫)근초고왕(近肖古王)에게 부왕(父王)을 죽인 원한을 갚지 못한 것은 죄가 될 수 있거니와 담덕과 진사에 있어서는 이미 2세(世)가 지난 후인데 어찌 또 보복을 한단 말인가?

당초 침류왕이 세상을 떠나고 진사왕이 즉위하였는데 이련이 조문하여 위로하지는 않고 남의 상중(喪中)을 틈타서 갑자기 침범하였으니 이는 간악한 짓이다. 진사왕이 은인자중하여 곧 보복하지 않고 반드시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린 연후에 고구려의 남쪽 변방을 공격하였으니 이는 곧은 것이 백제에 있고, 굽은 것이 고구려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사왕이 두 번을 이기고 이련은 끝내 보복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도 또한 그 죄를 자복(自服)한 것이다.

담덕이 이에 그 욕심을 징계하고 원한을 풀며 화친을 도모하여 선군(先君)의 허물을 뉘우치고 분쟁을 그치게 하는 아름다움을 이룩했다면 그 어버이를 빛나게 함이 더욱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의리(義理)와 시비(是非)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보복으로써 일삼았으니 전란이 어떻게 그칠 수 있겠는가? - 《삼국사절요》

4.4.2. 안정복

적인이 침공해 와서 군부(君父)를 살해하면 그의 신자(臣子)된 자로서는 창을 베개삼고 아침을 기다려 피를 뿌리며 싸움에 나가서 오직 원수 갚을 것을 결심하여야 하며, 설사 자기 몸으로 하지 못했으면 아비는 이러한 마음을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은 이러한 마음을 손자에게 전해서, 비록 백대에 가서라도 기어코 복수를 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침공을 받아서 죽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이 못나서, 서로 이어 왕이 되었지마는 복수할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그의 손자 광개토왕에 와서야 부왕(父王)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비록 백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를 가져다가 조부의 무덤 앞에 제사지내지는 못하였으나, 이번의 한 일은 또한 의롭다 할 만한데, 권씨의 논평이 이러함은 무슨 까닭인가?

고국원왕이 죽은 지 겨우 22년이 지났다. 그런데 권씨의 말대로 한다면 조부의 원수를 보복해서는 아니 되며, 22년의 일을 오랜 세대가 지났다는 핑계로 잊어야 옳겠는가? 주자(朱子)는, 당시 송(宋)나라가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간 뒤이고 휘종흠종이 포로가 되어 간 지 50~60년으로 오래 되었으며[42], 효종(孝宗)이 휘종과 흠종의 두 황제에게는 촌수(寸數)가 먼 처지이지만 말하기를, "국내의 정치하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며, 휘종·흠종의 원수 갚는 마음을 하루라도 늦추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주자의 마음은, 군부(君父)의 원수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세대가 오래 지난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즉 권씨가 말한 것처럼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원수만을 갚으려고 마음먹었다.'하여 비난하겠는가? 슬프다! - 《동사강목》

4.4.3. 최보

광개토(廣開土)는 영웅의 위의로 특출한 재주가 있어, 능히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취하였다. - 《동사강목》

4.5. 근대 역사학자들의 평가

4.5.1. 신채호

광개토왕은 야심이 충만하고 무략(武略)이 절등한 인물이지만, 기실은 동족에 대한 사랑이 많아서 백제를 정벌함은 왜와 연결함을 미워하여 공벌함이요 그 땅을 탈취하려는 공벌이 아니니... 대왕의 유일한 목적은 북방의 강성한 선비(鮮卑)를 정벌하려는 것이니 북방의 전쟁이 비로소 적극적인 의미를 가진 것... 광개토왕의 영토 개척이 서쪽으로 더 확대될 수도 있었는데, 북연北燕에서 고구려인의 후손인 고운(高雲)이 즉위함으로써, 동족을 사랑하는 대왕이 전쟁을 그만둔 결과... - 《조선상고사》

4.5.2. 해외 역사학자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타케미츠 마코토는 그를 관대하고 온화해서 백제 백성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왕이라 평가하고 있다. 참고로, 타케미츠 마코토는 광개토왕을 다루고 있는 인문서적 '구려 광개토대왕'을 낸 사람이다.(자세한 것은 아래 참조)

중국의 동북지방(만주) 역사 연구에 있어 큰 업적을 남긴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위푸(金毓黻)는 그의 저서 북통사에서 요동지역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며 광개토왕이 이 지역을 차지한 것을 고구려에 있어 큰 공로로 평가하고 있다.

4.6. 현대 국내 정치인들의 평가

저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었던 광개토대왕을 생각하곤 합니다. 강력한 외교, 강력한 경제력, 강력한 문화력을 가지고 세계 무대에 나가서 강력한 한국의 힘으로 세계 선진국의 최선두에 서는 새로운 광개토시대를 여러분과 더불어 반드시 이룩할 것을 약속합니다. - 1997년 5월 1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제 15대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 중에서[43]

개인으로는 신사임당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율곡선생이 이미 5천원권 초상인물이기 때문에 모자(母子)에게 치우친 면이 있어 우리역사상 가장 진취적 기상을 갖고 국운을 개척했던 광개토태왕이 바람직하다. - 이명박 전 대통령, 고액권 인물로 누가 적절하겠냐는 질문에 답하며

5. 기타

5.1. 오늘날의 광개토왕

왕조시대의 군주 중 세종대왕과 함께 유이하게 대왕으로 불리는 군주로 민족주의적으로 찬양받고 있다.관련기사 하지만 실상 머했냐고 물어보면 그저 막연하게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정복군주' 정도로 기억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료가 없는걸 어쩌나? 사료부족을 탓하자...고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없는 사료'마저도 왜곡하는 국내 드라마들의 현실.

호태왕비 모조품과 광개토왕 동상
동북공정 크리로 다시 주목받았을 때 고구려랑 별 관련도 없는 구리시가 광개토왕으로 재미 좀 봤다. 구리시에서 고구려 왕족 후손들 유전자 조사까지 해가며 광개토왕 얼굴 복원하고 동상까지 세워놨다. 고구려 왕족 후손들의 유전자를 조사하여 광개토왕의 얼굴을 추측한 것은 분명 학술적으로 의의가 있는 일이긴 한데... 무엇보다 1600년전에 죽은 사람 얼굴을 유골이나 관련 그림도 없는 판에 어떻게 재현하겠다고... 사실 구리시는 위에 그림에서도 보듯이 광개토왕 당시엔 백제 공격 루트였다. 위치적으로 송파구의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공격/방어하기에 매우 중요한 지역 인지라, 개루왕이 세운 북한산성이 구리시에 있을 수도 있다. 다만 광개토왕에게는 털렸지만 아차산의 고구려 유적은 남한에선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고구려 관련 유적이기 때문에[44] 이렇게 광개토왕을 열심히 밀어주는 모양. 그래서 전국의 시군구들이 각자의 개성을 만들때 구리시는 고구려를 상징으로 삼게 되어 광개토왕을 비롯한 고구려 관련 사업을 자주하는 편. 사실 아차산 유적지는 온달과 더욱 관련이 있는데,[45] 이건 광진구에서 선점해버려서 별 수 없이 광개토왕으로 가고 있다. 광진구의 마스코트인 광이와 진이는 온달과 평강공주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신권(5만원권) 발행 준비시 지폐에 들어갈 투표를 할 때 에 없는데도 1위를 했다.관련기사 오래된 인물이라 고증할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46] 결국 결정된 신사임당도 상상화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 존재하는 그림이다. 그녀의 시가인 덕수 이씨에 보관된 그림과 외가인 강릉 최씨 가문에 남은 그림 중 시가의 그림을 택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백원짜리 동전에 들어있는 이순신 역시 상상화였으니[47] 광개토왕으로 지정하려면 못할 것도 없기는 했다. 이에 대해 중국측 눈치보기라는 이상한 소문도 돌았으나 근거없는 소문이다. 엄밀히 따지면 광개토왕이 상대한 국가 중 유일한 중국 계열 국가인 후연은 현재 선비족이 사라져서 중국사로 치는거지 선비족의 역사일뿐 한족의 역사는 아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한족을 정통으로 하는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는 전혀 없다. 광개토왕이 동진을 정벌했으면 모를까? 겨우 중국 눈치봐서 인물선정 못해먹는 나라에서 일본은 그보다 더 신경쓰일텐데 그럼 이순신은 어떻게 백원에 들어갔나?[48]

한국 전함에 최초로 쓰인 인명이기도 하다. 1996년에 진수되어 1998년에 취역한 KDX-ⅠDDH 971의 함명이 바로 대왕의 함자를 따 만든 것. 그래서 KDX-Ⅰ은 동급의 첫 번째 함정이었던 광개토대왕함의 이름을 따 광개토대왕급으로 불린다. 이후 2척이 더 건조되어 을지문덕함, 양만춘함으로 명명되었다.

5.1.1. 대중매체에서의 광개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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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민우 '태왕북벌기' 中...
워낙 이름값이 이름값이다보니, 오늘날 수많은 매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아니 다루고자 시도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고구려 관련 매체에서의 등장비중이 연개소문보다 밀리는 건 그렇다 쳐도, 광개토왕의 업적을 상식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고 있으니 문제.(...)문제 총정리

광개토왕을 다룬 장편소설로는 정립의 광개토대제, 정호일의 천손의 나라, 원정미의 주작의 제국, 이수광의 광개토대왕 정도가 있다.

5.1.1.1. 광개토대제

광개토왕을 다룬 장편소설 가운데에는 정립의 소설 개토대제가 가장 유명한데, 저자가 광개토왕의 위대함을 모르는 국민들을 개탄하며 여러 공공장소에서 광개토왕의 위대함을 웅변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실상은 시궁창. 일본 소설을 표절하고, 고증 따위는 무시하며, 심지어 가짜 역사서창작하는 위엄을 보여준다.

더욱 큰 문제는 역사에 기반한 정립 개인의 망상에 불과한 이 광개토대제의 주요 스토리가 다른 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표절되면서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광개토왕이 먼치킨적 능력으로 국상 일당의 반역을 진압하고 태자가 된다거나 즉위한다는 전개. 실제 역사에서 광개토왕이 12세의 나이로 태자가 되어 18세의 나이로 즉위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어불성설도 이런 어불성설이 없다. 모에 대신에 마초 코드로 맞춘건가.(...) 여담이지만 사실 광개토왕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못지 않게 부녀자들이 을 불태우기 좋은 소재...일지도 모른다. 광개토왕은 18세에 즉위했고, 그 라이벌 아신왕은 광개토왕이 즉위한 바로 그 해에 20대 정도의 나이로 즉위했고, 다른 라이벌 모용성은 그해 19세, 그 뒤를 잇는 모용희도 9년 뒤 17세에 즉위하니.(...) 그런데 그림이나 영상으로 나오는 건 죄다 30대 중반이다. 망했어요. 아니 왜 판타지에서는 애송이 같은 잘만 만들면서!!

5.1.1.2. 태왕북벌기

형민우 작가의 만화 태왕북벌기는 광개토대제의 전반부 스토리를 거의 그대로 가져왔는데, 안 좋은 쪽으로. 스토리의 1/4을 정작 역사적 사실도 아닌 흉노(!)와의 전쟁, 국상 일당의 내란진압에 쏟아넣었다. 정작 중요한 정복전쟁은 마지막권에 죄다 꼴아박았으니 왜 조기연중되었는지 납득이 갈만도 하다. 이런 스토리 구조상의 문제를 제처두고 보면 작품자체는 스케일이나 액션에서 당시 한국만화가 보여주치 못했던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높이 살 만 하다.(해당 항목 참조)

5.1.1.3. 태왕 광개토

네이버 웹툰으로는 태왕 광개토가 있지만, 광개토왕이라는 소재를 제외하고는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이 아닌지라 57화 만에 소리 없이 조용히 완결되었다. 고증도 그렇게 크게 기대하지는 말자. 20대 초반의 모용희가 수염 희끗한 할아버지로 나오는 것은 대표적인 고증 오류.

5.1.1.4. 태왕사신기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처음으로 나온 광개토왕 판타지인데, 실제 역사와는 근본부터 완전히 달라서 바람의 나라에 이름만 담덕을 가져다 썼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이다. 실제로 바람의 나라 원작자인 김진과 제작진 측(김종학, 송지나)사이에 표절공방이 있었고 소송까지 갔었다. 애당초 김종학과 송지나 측이 김진과 바람의 나라 드라마화를 두고 이야기를 하다 엎어버리고 태왕사신기를 제작했던 것은 사실. 소송 자체는 표절이 아니라고 판결이 났으나 그 판결문이 넷상에서 퍼져 논란을 낳기도 했다. 바람의 나라를 보면 알겠지만 의심의 여지가 있다. 태왕사신기 항목 참조. 제작진 측에선 정복군주의 이미지에서 벗어난 인간적인 광개토왕을 그리겠다고 하는데,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이게 광개토왕을 본다는 느낌이 조금도 안드니 문제. 작가가 전세계 100여 개 국 수출 드립을 치더니 욘사마 효과를 볼 것으로 그나마 기대되던 일본에서도 망했다. 남은 건 130억 짜리 골칫덩이 세트장 정도(해당 항목 참조) 이케다 리요코가 태왕사신기를 만화로 그리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케다 리요코의 작품 중에는 쇼토쿠 태자도 있다. 물론 일본 고대의 그사람을 다룬 책이 맞다. 이때문인지 태왕사신기-바람의 나라 표절 논란때 이케라 리요코가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했다더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는데, 사실무근인것 같다. 확인바람. 이케다 리요코가 그린 그 만화는 태왕북벌기에 이어 두번째로 광개토왕을 다룬 만화가 되는 셈.

5.1.1.5. 광개토태왕

KBS에서도 드라마 광개토태왕이 나왔는데 이건 정말 태왕사신기를 다시 보게 될 정도로 공포의 대왕. (드라마 제일 첫 대사가 이거다.) 원작부터가 정립의 광개토대제와 형민우의 태왕북벌기인 이상,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자세한 건 광개토태왕(드라마)/비판 항목 참조.

5.1.1.6. 역적전

곽재식의 역사 소설 역적전이 광개토왕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애초에 역적전은 고구려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구려에게 발린 백제, 가야 중심의 내용이라 광개토왕은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마지막 대목에 한번 직접 등장하는데, 싸움 잘하는 패기 있는 사람을 보면 껄껄거리며 웃고 즐거워 하는 호탕한 싸이코 임금으로 나온다.

5.1.1.7. 고구려

김진명본격 역사 왜곡 소설 '고구려'를 쓰면서 미천왕부터 광개토왕까지의 이야기를 시대 배경으로 잡았는데, 2012년 3월 현재 이 소설은 4권이 출간되어 고국원왕 시대를 다루고 있다. 이대로만 가면 이제 곧 광개토태왕을 압도할 무지막지한 환빠의 왜곡이 기대되는 상황. 그래봐야 고비사막 넘어서 몽골 원정밖에 더 하겠냐마는.(...) 근데 사실 이건 아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신채호가 주장했던 설이기도 하다. 틀렸어 이젠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5.1.1.8. 역사 서적

광개토왕을 다룬 소설에 비해서 광개토왕을 다룬 관련 역사 서적은 거의 전무하다. 그나마 2011년 전까지 구할수있는건 아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전부였다. 자계서, 경영서적으로서 광개토왕을 다루는 책도 있기는 한데 역사책이라기는 역시 민망하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일본의 역사학자 케미쓰 마고토의 서적으로 부드럽고 쉬운 문체에다 두께도 얇아서 속독이 가능하다.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고구려의 광개토왕을 서술하고 있다. 찬양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민족주의적인 분위기의 찬양조는 아니고 영웅주의적인 찬양조이다. 한일간에 대립을 일으키는 광개토왕비문의 왜 관련 기사도 꽤나 색다른 설을 제시하고 있다. 책에 수록되어 있는 고구려 군대의 삽화에서 고구려군이 판갑을 입고 있는 자잘한 오류가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고증에 있어 흠이 적은 편이다. 이 책은 태왕사신기 일본 수입덕에 조금 팔리긴 한것 같은데 국내에는 살짝 뒤늦게 소개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전술'은 고구려 광개토왕의 전술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책이다. 1999년에 출시되었다. 유교적인 홍범구주를 들어가면서 광개토왕에 대한 맹신적인 찬양과 근거를 대지 못하고 가설만 주장하는걸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 그런 주제에 정작 전술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쥐꼬리만큼도 안 나오는데다가 북연과 후연을 헷갈려하며 표기해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읽다보면 카오스로 빠저드는 신기한 책이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은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김용만의 저서이다. 2011년 7월 20일 출간되었다. 내용 자체는 현재까지 학계의 광개토왕 해석에 있어서 모범 답안이라고 할 만하지만, 400년을 4002라고 찍거나 고국원왕고국천왕이라고 쓰는 등 군데군데 보이는 오타가 다소 민폐되는 책. 뭐 오타야 별로 큰 문제는 아니고 어차피 새로 찍으면서 개정될 터이지만 그래도 공을 좀 들였으면... 그래도 현재까지 광개토왕만을 다룬 역사서들 중에서는 가장 나은 책이다. 때문에 기년 문제를 제외하고는 별로 신선한 주장은 없지만.

5.1.1.9. 기타

김청기 감독이 광개토왕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Great Emperor'을 만들 계획이 있었던 모양인데 어떻게 되었는지 무산되었다. 공식홈페이지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그리고 심형래디워로 한창 관심을 받을때 나중에 광개토왕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바 있다. 정작 나온 물건은...

동서게임채널에서는 1995년에 광개토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컴퓨터 게임 <광개토대왕>을 발매한 바 있는데, 이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RTS 게임이었다. 게임은 왜구를 토벌하는 사이 국경을 침범한 거란족과 말갈족을 혼내준 후, 후연까지 정복한다는 내용이다. 국산 첫 RTS게임인 만큼 퀄리티는 그냥저냥..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많이 난다.[49]

일본코에이의 게임인 토귀전 극에서 정발판 한정으로 미타마로 등장한다. 성능이나 대사는 추가바람. 일러스트는 고증은 기대하지 말자. 러스트 출처 http://ruliweb.daum.net/news/view/68353.daum

5.1.2. 광개토왕 재현

다른 위인들이 나름대로 괜찮은 고증을 거쳐 모범이 될 만한 영정이나 초상화를 갖고 있는데 비해, 광개토왕은 모범이 될 만한게 딱히 없다. 당장 표준 영정부터가 상당히 안습하다.


  • 이종상 화백이 그린 표준 영정
    39세에 사망한 것 치고는 너무 늙었다. 하지만 미용과 위생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사람의 외모가 현대보다 훨씬 더 빨리 노화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절할지도.(...)[50] 웅위로웠다는 사서의 묘사와 인상이 다르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갑옷이 고증과는 거리가 매우 멀다. 그냥 고증오류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 때문에 다리가 엄청 짧아보인다는 것이 안습.(...) 왕을 루저로 만들다니


  • MBC 태왕사신기의 배용준
    배용준이 2007년 기준 36세라 허용범위 안이긴 한데, 다만 문제는 이 얼굴로 10대를 연기했다.(...) 게다가 웅위로웠다는 사서의 묘사와 달리 용모가 너무 부드럽다.흑태자? 상술했듯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려고 했다하나, 광개토왕이 살아있는 내내 전쟁만 한지라 딱히 부각시킬 것도 없다. 갑옷 고증? 판타지 드라마에 그런 거 없다.(...)


  • KBS 광개토태왕의 이태곤
    굳이 따지자면 그나마 광개토왕에 대한 사료의 묘사와 가까운 편이다. 나이도 이태곤이 2012년 기준 36세라는 점을 생각하면 노안이긴 해도 허용범위 안. 문제는 역시 이 얼굴로 10대를 연기했다.(...) 무개념으로 손꼽히는 드라마에 이쪽도 갑옷 고증 따위가 있을 턱이.(...)



  • 구리시의 광개토왕 동상
    유전자 조사나 후손들의 얼굴 모습 등 나름대로 전문적인 학술조사를 거쳐서 만들었다지만, 역시 39세에 죽은 것치고는 너무 늙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와 현대의 차이를 생각하면 이해할..만 할지도? 그리고 광개토왕의 부드러운 면모를 부각했다는데, 광개토왕은 살아있는 내내 전쟁만 한지라 딱히 부각할 게 없다.



  • 형민우의 태왕북벌기
    드라마 광개토태왕의 원작인 만큼 그와 비슷한 묘사인데, 무인의 기질을 강조하느라 말 그대로 근육덩어리 청년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10대다. 성격은 활달하고 호기롭게 나쁘게 말하면 까불거리고 무모하게 묘사되는데, 실제로도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쪽은 다른 작품에 비하면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점을 고려한 듯하다. 얼굴이 나이를 안 먹으니까...

  • 세랑이 만든 피규어 - 링크
    이쪽은 30대 중후반 정도의 얼굴이라 표준 영정과 동상에 비하면 덜 노안이지만, 그래도 좀 아슬아슬하다. 이것이 마지막 사냥인가? 대신 고증이 매우 훌륭하고 작가의 뛰어난 실력까지 버프를 받은지라 그야말로 간지폭풍.

  • 광개토왕 피규어 - 링크
    한정판으로 나왔다. 얼굴 부분은 비중이 작고, 갑옷 고증은 무난한 편. 옵션으로 딸려있는 井자 깃발 때문에 우물 지키는 병사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실제로 그의 모습을 알만한 단서가 있을까? 광개토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유골이 나왔기는 한데 머리만 없다나. 여튼 매체상으로 한국사상 전무후무한 10대 정복군주라는 점을 보여주는 모습은 없다. 죄다 늙어있다.(...) 본격 왕 노릇이 아역하는 사극

5.2. 야사

광개토왕과 관련된 야사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물론 거의 출처불명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종종 정사인것마냥 소개되고 있다는건데 요즘은 예전에 비하여 한국 고대사가 많이 정립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검열이 허술한(?) 상대적으로 학술적 접근이 관철되지 못한 동화책에는 이런 내용이 넘처나고 있다. 사실 동화 작가들이 지어낸게 설화마냥 퍼저나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설화로는 광개토왕이 여자때문에 싸움이 난 두 마을을 화해시켜줬다는 이야기등이 있다.

야사라고 하기엔 민망하지만 《환단고기》에도 짤막하게나마 광개토왕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의외로 중원을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이상한 내용은 없다. 그냥 정사로 통용되는 정복전쟁에 자잘한 과장과 미사여구를 덧붙인 수준... 그것도 중국계인 후연이나 만주 대륙의 국가들과의 싸움은 없고 왜와 연결되어있는 한반도를 공격하는 내용인데... 당시 시대상이 일제강점기였음을 생각해보면 《환단고기》 저자의 친일혐의는 차치하고서라도 어느정도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참고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호열제라는 이름으로 나와있다. 야사나 다름없는 《조선상고사》에도 대륙으로의 진출(?)보단 왜와의 격돌에 비중을 두고있다. 그리고 《화랑세기》의 저자로 유명한 박창화가 남긴 고구려사초라는 책의 영락대제기도 광개토왕의 치세를 다루고 있는데 자잘한 내정기록,왕실비사등을 제외하면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정사로 통용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정복전쟁과 관련해서는 탐라(제주도)가 항복했다는것 말고는 새로운게 거의 없는데, 『광개토왕릉비』나 《삼국사기》같은 정사로 통용되는 사료의 기록을 살짝 비틀어놓거나 전투기록 한줄 더 추가한게 전부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탐라가 항복했다는 내용과 거란과의 전투 기록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는 내용들이다.(토욕혼을 정벌했다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대에 활동했던 것이 확실한 진이나 모두루가 고구려사초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소설일 가능성도 높아진다. 진,모두루 모두 박창화 사후에 확인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5.3. 기타 학설

비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유연이라고 했으나 근거 자체가 해괴하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부산 밑에 와룡이 있었는데 와룡이 유연의 별칭인 유유와 발음이 비슷(?)하니 와려(비려)는 유연인것 같다...' 라는게 근거다.[51] 신채호가 해괴한 추론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건 매우 극악한 편에 속한다. 당시 유연은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던데가 유연과 고구려 사이를 고구려도 쩔쩔매는 후연을 처바르는 북위가 가로막고 있던지라 말도 안된다.;; 아니, 거란이 선비의 후예라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현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시라무렌강 상류에 위치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훗날 비려가 거란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곤한다. 한 편 진서 동이전에 나오는 만주 중앙에 위치한 비리국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 학계에서는 요동의 태자하 상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하며 소수맥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데 태자하 상류설이 말이 안되는게 광개토왕이 비려를 격파하고 돌아오며 태자하를 거첬으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더구나 소수맥은 수백년전인 유리왕때 격파되고 이후로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때 토벌한 비려는 391년 토벌한 거란과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왕비문에 광개토왕때 상대한 적들은 모두 기재했다는 가설에 의하면 거란이라고 빠뜨렸을리는 없으니 아마도 비려는 거란과 같은 존재일수도 있겠다. 더구나 비려는 광개토왕비문의 기로에 의하면 거란이 위치해있던 곳에 있었으니..

다만 이걸 딱히 실증할만한 또렷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주요 근거는 비려와 거란의 위치가 비슷한것같고 거란의 부족중에 필혈부가 있었는데 비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것. 위서에는 필혈부라고도 읽는 필결부(匹絜部)·려부(黎部), 통전에는 필려부(匹黎部), 북사에는 다시 필결부(匹潔部)·려부(黎部)라고 적혀 있는데,[52] 근데 이건 아예 당시부터 물길의 필려이국과 헷갈리고 있었으니(...) 더구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당장 고구려를 의미하는 무구리와 말갈만 해도 발음이 비슷한데 완전히 남남인 것을 보면. 발음이 비슷한데 남남인 경우가 매우 흔하다.

비려와의 전쟁터였던 부산,염수등의 위치를 고증하면 대강 실마리가 잡히겠으나 그마저도 힘든게 현실. 염수가 고유명사일수도 있고 소금이 많이나서 붙은 이름일수도 있는데 만주지방에 소금이 나는곳이 한둘인가... 부산같은 경우도 고유명사라는 해석이 있는가하면 고구려인들이 이름모르는 산을 아무개라고 부르거나 큰 산이라고 부른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쨋든 비려는 고구려 국경에 근접한 거란을 먼저 토벌한 점이나 광개토왕비문에 장거리 원정이 있던것마냥 기술한 점으로 보아 거란보다 서쪽의 내몽고 어딘가였던것 같다.
아니면 진서 동이전에 기술되어 있는 비리국일수도 있는데, 진서가 광개토왕 시기를 기록하고 있고(이상한건 정작 고구려는 없다.;) 진서 동이전에서 서술하는 비리국의 위치가 광개토왕비문의 비려처럼 고구려의 북쪽 어딘가이기 때문에 비리국일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 또한 비리국이 광개토왕 시기인 진서 동이전에만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묘하다.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에게 먹혀서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뭐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사장되긴 했다만...

비려의 인구는 35만 정도로 추정된다.[53] 기껏 3개 부락 격파했는데 어떻게 35만이라는 숫자가 나온지 의아할수 있는데, 부락이라는 단위는 고정된 수치를 갖고있는게 아니라 쓰일때마다 다르다. 마을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수도 있고 부족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비문의 판독에 따라 부락이 아니라 부(부족)으로 판독할수도 있어서... 참 애매하다. 3개 부의 의미를 부족이나 부락 3개를 격파했다는게 아니라, 거란족이 스스로를 칭할때 관용적으로 쓰는 3개 부라는 의미로 해석한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그건 훨씬 후대의 일이라...

영락 6년에 점령한 58성 700촌은 대강 현재의 강원도, 충청북도와 경기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58성 700촌의 위치 비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각에서는 충청남도까지 남하한걸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비류백제설로 이어지곤 하니 문제.

5.3.1. 기년 수정론

17세 후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2·9에 등극하니 부르길 영락태왕이라 ……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다. - 호태왕비문

광개토왕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능비를 통해 추론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망연대와 맞춰 볼 때도 의아한 점이 있어 학계에 이론이 있다. 학계의 중론은 대체로 374년인 듯하나, 3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비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18세 되던 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설은 즉위년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광개토왕은 392년에 즉위한 것이 되는데, 연표에 따르면 이 해는 바로 임진년이다. 그런데 능비에서는 광개토왕의 즉위년을 신묘년이라 하고 있다. '영락 5년 을미(395)', '영락 6년 병신(396)' 등으로 정벌 기록마다 확인이 되고, 덕흥리 고분 등에서 교차검증도 되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주류 학계에서는 능비문에 《삼국사기》를 맞추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 해 앞당김으로서 광개토왕이 신묘년 즉 391년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즉위년만 앞당기게 되면 광개토왕의 재위년 자체가 23년으로 40세에 사망한 것이 되어 《삼국사기》 본래의 기록은 물론이고 능비와도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며,# 혹시 전체 재위년을 한 해씩 당겨서 391년 즉위해 412년 사망한 것으로 한다면 중국 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삼국사기》의 연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일각에서 '사서의 연도에 능비의 간지(干支)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도 한국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잘 정리된 연표의 간지를 무시하고 연대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사료 간에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있는데다가 앞서 수정론의 오류에 비추어 볼 때 무시할 만한 내용은 아니다. 알아서 판단하자 차후의 연구를 기대한다.

이상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능비의 '신라 구원 요청(9년 기해)-신라 구원군 파견(10년 경자)'에 비정되는 사기의 '신라 내구마 울음(9년 경자)-실성 귀환(10년 신축)'를 굵은 글씨에 주목하며 비교해보자.

5.3.2. 유사역사학

민족을 숭배하는 한국의 유사역사학과 엮이기 좋은 소재이다보니 광개토왕과 관련된 유사역사학적인 주장들도 많다.

광개토왕이 죽고나서 아틸라가 등장했기 때문에 광개토왕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아틸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틸라는 선대의 계보가 명확해서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인지도는 후달리지만 한국판 요시츠네=징기스칸설이랄까...

광개토왕비문에 등장하는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에서 토곡만 떼와서 토곡이 토욕혼과 발음이 유사하여 광개토왕이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주장도 있다. 식신토곡이라는 말은 식신땅의 곡이라는 의미지 토곡자체가 어떤 세력명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더구나 당시 토욕혼은 백란이라 국호를 바꾸었다. 토욕혼이 고구려의 웬수인 모용씨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그럴싸하기도 한데 환빠들은 토곡=토욕혼 주장을 할때 이런 근거는 들지 않는다.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은 판독자에 따라 백신토곡도 되는데 신자를 어거지로 란자로 판독해서 백란정벌설을 내세우면 꽤나 그럴싸한데 아직까지 그런 괴인은 안보인다.

398년 북위의 수도 업에 고구려인 46만과 기술자 10만이 가득차서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는데 사실은 고구려가 북위 수도 업을 함락해서 북위가 불가피하게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거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와 북위의 최초 접촉은 장수왕때이다. 둘다 공동의 적으로 후연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굳이 동맹을 맺을만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지도 않았고(서로 눈치보면서 후연을 공격하는 수준) 국경이 닿아있지 않은 관계로 직접적으로 접촉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후연과 백제도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고구려가 무슨 수로 북위까지 처리할까? 과장일 여지가 있지만 북위가 후연을 칠때 기병 40만을 동원했는데 겨우 5만 보기를 박박 긁어모으고도 병력이 없어 후방을 털렸던 고구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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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기준, 『광개토왕릉비』의 향년을 적용.
  • [2]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 기준.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에 따라 연도를 가감하여 즉위한 해를 391년으로 보는 주장은 '기년 수정론' 항목 참조.
  • [3]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광개토왕이 태어난 때는 소수림왕 재위 기간으로, 아버지 고국양왕이 아직 즉위하기 전이었다.
  • [4]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기 전에는 단지 광개토왕으로만 전해져 내려왔다. 기타 광개토대왕과 같은 현대의 호칭은 '명칭' 항목 참조.
  • [5] 평안이 광개토왕의 업적이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애초 《양서》 등 중국 사료들에도 대왕의 이름이 안(安)으로 나와있다. 중국은 고구려나 백제의 군주들 이름을 한 글자로 줄여서 썼으므로 이걸로 대왕의 이름을 추리하자면 능비문에 나오는 평안(平安)이 이치에 맞다.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공식 비문에 추모왕, 유류왕, 대주류왕 등은 모두 본명을 기재하면서 정작 광개토왕의 본명을 적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옳지 않다. 또 장복유(張福有)의 집안고구려비 판독문에도 ‘국강상태왕(광개토왕)은 평안이라 이름했다(國罡上太王 號平安)’고 나와있다. 평안은 대왕의 업적이 아니라 본명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고평안? 바꾼 이름이 왠지 더 어색한 느낌이다 문제는 이분 행적이 정작 본명 두 개랑 다 매치가 안된다 물론 성과야 매치되지만
  • [6] 《삼국사기》 문자명왕 원년조에 "종숙 승천"의 존재가 나온다. 문자명왕의 종숙은 조다의 사촌으로 장수왕의 조카가 된다. 즉 광개토왕에게 장수왕 외에도 다른 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7]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되었으나, 고구려에서 제작되어 신라로 전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8] 편찬 시기에 약간의 논란이 있다.
  • [9] 처음 위서에서 '고국원왕은 이름이 소다. 열제 때 모용황과 싸웠다.'고 기록한 것이 수서에서 '고국원왕은 소열제다. 모용황과 싸웠다.'고 와전되었고, 이렇게 와전된 열제라는 말이 그대로 《환단고기》에 흘러들어가 아예 고구려 군주의 칭호로 쓰인 것이다. 제대로 낚인거지 뭐 게다가 보통 '소열제'라고 하면 '소열황제'를 줄인 말로 이해되는 것이 보통이다. 비록 한자는 다르지만, 삼국지의 유비가 바로 촉한의 소열황제. 도대체 어떻게 읽으면 이걸 '소'와 '열제'로 분리시켜 이해할 수 있는지, 확실히 이유립의 상상력은 보통이 아니다.(!)
  • [10] 실제로 광개토왕은 후연 소무제 모용성에게 요동·대방 2국의 왕으로 책봉을 받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파토났다. 다시 말하지만 고구려는 독립국이었고 고구려의 왕은 '작위로서의 왕'이 아니라 '군주로서의 왕'이었다. 진짜로 중요한 건 이거다.
  • [11] 동부여 같은 경우에는 위치가 통설에 따른 것이며, 다소 이견이 있다.
  • [12] 생이웅위 유척당지지(生而雄偉 有倜儻之志). 이 문구의 해석은 '나면서부터 기개가 웅대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네이트 한국학 《삼국사기》)'거나 '태어나서 씩씩하고 뛰어나며 대범한 뜻이 있었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거나 '웅위하고 뛰어난 뜻이 있었다.(한국고전종합DB 《동사강목》)'거나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허성도 번역 《삼국사기》)'거나 '어려서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뜻이 고상하였다.(이병도 번역 《삼국사기》)'는 등 수많은 바리에이션 해석이 있지만, 어차피 모두 의미는 비슷하다.
  • [13] 광개토왕이 즉위한 해를 391년으로 보고 《삼국사기》에 고국양왕 말년에 벌어진 것으로 기록된 신라와의 수교, 불교의 권장, 종묘와 사직의 수리 사건을 모두 광개토왕의 원년의 것으로 넣으려는 주장이 오늘날 대세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내용은 본 문서의 '기년 수정론' 항목을 참조할 때 그다지 성과도 없거니와 오히려 연대가 꼬이는 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릉비』를 모두 최대한 존중하여 이하 연대는 모두 광개토왕 X년(《삼국사기》)/영락 X년(『광개토왕릉비』)으로 표기하겠다. 암만해도 엿가락처럼 《삼국사기》의 기록을 늘리고 떼어서 붙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 [14] 실제로 삼국사기의 연표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즉위한 해도 임진년으로 추산된다. 다만 능비문에 따르면 신묘년이 되지만... '기년 수정론' 항목 참조.
  • [15]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괴랄하게도 아신왕을 진사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으니...
  • [16]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비려(碑麗)는 패려(稗麗)로 읽기도 한다.
  • [17] 우리나라 삼국지 4권 325쪽 각주. 그러나 우리나라 삼국지는 소설이기에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확인이 필요하다. 참고로 김용만의 역사서적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삼국지 자문을 김용만이 했다.
  • [18] 한 게르는 한 집으로 곧 한 가족이고, 한 가족의 구성원을 5인으로 본 기준.
  • [19]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水軍'이라는 글자를 판독 불명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공략된 성의 위치로 미루어 일단은 수군이 동원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 [20] 아단성보다 앞에 각미성(各彌城)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관미성과 동일한 성으로 보인다. 따라서 능비문의 해당 숫자는 이보다 앞서 즉위 원년부터 함락된 모든 성을 망라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다.
  • [21] 요동군 공략 시점에 대한 통설과 그에 대한 이견은 링크을 참조.
  • [22] '고구려의 영역지배방식 연구'(김현숙 저) 참고
  • [23] 더 멀리 가면 이미 대무신왕 대에 신라와 부딪힌다....
  • [24] 소설가 최인호는 만주등지를 뒤집고 다니며 연구한 끝에 저 호우명 그릇 바닥의 상단에 보이는 # 문장이 광개토왕의 문장이라고 추측해내었다. 그리고 최인호 작가는 중국 입국 금지를 당했다. 지못미...
  • [25] 신라에서 이들이 왜로 이주하려는걸 막아버린 덕분에 백제·신라·가야·왜 사이에 글로벌한 분쟁이 벌어지고, 이것이 이후 국제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 [26] 영락 6년에 백제왕이 항복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27] 대방계는 앞서 대방군이 있던 황해도 지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지리상으로 이 또한 백제가 왜를 끌어들인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위의 선례도 있거니와 그렇지 않고서는 멀리 황해도까지 왜인이 독자적으로 공격해 올 이유도 보급선도 없다는 주장.
  • [28] 물론 영락 17년 기사에서 '사방합전'으로 '참살탕진'된 적국이 백제라고 본다면 이것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 [29] 뛰어난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70년대에 그려진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고증을 보여준다. 서울대 미대 이종상 교수의 작품으로 자세한 정보는링크 참조.
  • [30] 398년에 모용성이 모용보를 시해한 난한을 몰아내고 황제로 등극했는데, 이해 설날에 자신을 '천왕'으로 낮추었다. 이에 사신을 보낸 것으로 보이긴 한다. 하긴 '황제'라고 했다가 '천왕'이라고 낮추었으니 사신이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헷갈릴 만도 하지.
  • [31] 끝까지 강단사학의 단정 운운하며 연군이 북경이라고 믿고 광개토왕의 영토를 넓혀보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아니 북경을 치려면 코앞의 용성부터 먼저 작살내던가.(...) 그 근거는 알아서 판단하기로 하자.
  • [32] 물론 모용운 시기까지를 후연으로 보기도 하고, 모용운 시기만 뚝 떼어서 대연으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국호는 다 같은 연(燕).
  • [33]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모용운은 황제가 아닌 '천왕'으로 즉위했기에 명칭상 황제라기보다는 조금 격이 높거나 동급 정도기는 하다. 행세는 황제로 한 것이 맞지만.
  • [34] 障泥 ; 말의 배를 덮어 흙이 튀어 오르는 것을 막는 물건
  • [35] 출처는 태평어람 359권에 십육국춘추의 일문으로 실려있다.
  • [36] 장군총과 함께 광개토왕릉 후보로 꼽히는 곳 중 하나인데 확증할만한 근거는 없다. 어쨋든 광개토왕비문이 다른 곳에 있던걸 뽑아다 박아놓은게 아니고서야 광개토왕비문 주변에 왕릉이랄 만한 무덤이 장군총과 태왕릉 정도밖에 없어서 장군총이나 태왕릉 둘중 하나가 광개토왕의 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고로 태왕릉에서 태왕릉출토전명과 호태왕이 새겨진 귀고리가 발견되었다.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는 『광개토왕비』를 고려(왕건이 세운)에서 뽑아다가 현재의 위치에다 박아놓은 거라는 괴랄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때는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 [37]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묵호자와 동일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 [38] 해동고승전
  • [39] 韓은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 많이 쓰였기 때문에 가야인일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일본쪽 기록에 많다.
  • [40] 왜가 중국 황제에게 고구려의 방해로 사신을 못보내니까 고구려좀 쓸어달라고 부탁하는 상표문을 보낸적도 있다.
  • [41] 사실 고구려나 백제도 발해 못지 않게 기록이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 [42] 정강의 변 참조.
  • [43]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통령 취임 첫해에 취역한 첫번째 한국형 구축함의 함명이 광개토 대왕함이다. 그리고 그해에 있었던 한국 최초의 국제관함식에서 대통령의 좌승함으로도 사용되었다. 후속함 2척도 모두 고구려 위인들이 함명으로 붙여졌다. 을지문덕과 양만춘.
  • [44] 백제에게도 요충지였지만 고구려에게도 한강 이남을 방어하기 위한 최전선 지역이었다.물론 나중에 신라한테 뺐기지만
  • [45] 온달이 신라한테 뺏긴 죽령 이서를 빼앗아 오겠다고 했다가 전사한 지역이 아차산성이라고 한다.
  • [46] 뭐 옆나라 일본의 경우는 실존 여부마저 불분명한 진구 황후, 타케우치노 스쿠네 같은 사람들을 화폐에 그려넣곤 했다만 그건 자국 고대사 미화에 혈안이었던 옆나라의 사정이고.
  • [47]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는 남아있지 않으며, '동시대인'이 남긴 외모에 대한 단서는 징비록의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있었다."와 고상안이라는 사람이 남긴 "생김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않고 관상도 입술이 뒤집혔다." 라는 말이 유이하다.
  • [48] 단, 이것은 단순히 중국계 국가를 격파한 인물이라서 이런말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고구려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라고 간주하고 있다. 즉, 중국의 입장에서는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국가의 인물이니 중국 눈치보기설에 근거가 없다 라고 반박하고 싶었다면 이에 대해 반박하는 것이 맞다.
  • [49] 워크래프트1의 엔진을 사용하였다. 자료는 구하기가 어렵지 않으나, 얼마전까지는 실행방법이 막막하였다. 다만 DOSBOX가 업데이트 되면서 현재는 DOSBOX로 정상 실행가능
  • [50] 당장 현대에도 시골 농부 어르신들의 외모는 동년배 도시 어르신들보다 10살은 더 늙어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명색이 왕인데
  • [51] 원문:##
  • [52] 애시당초 ㄱ(ㅋ)음과 ㅎ음이 유사한 거야 주지의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몽골어의 칸과 여진어의 한이 있고, 오랑캐 즉 우랑카이는 중국에서 우랑하이라 불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올량합(兀良哈)으로 적혀있다.
  • [53]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