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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last modified: 2015-10-09 15:34:53 Contributors

關羽
(162? ~ 219)

촉한오호대장군
(정사 삼국지 열전 기재 순)
관우 장비 마초 황충 조운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오겠소 - 삼국지연의에서.

중국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까지의 무장이자 삼국지의 등장인물이다. 촉한오호대장군 중에서도 필두맹장으로 유명하다.

는 운장(雲長)이며 본래 자는 장생(長生). 출생지는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민간전승에 의하면 생일은 160년 음력 6월 24일이지만 신빙성은 낮다.[1] 출생에 관한 전설도 가지가지라 여기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중국인들은 보통 이름 대신 관공(關公)이라 높여 부른다.[2]

Contents

1. 설명
2. 연표
3. 관우의 무
3.1. 일기토
3.2. 만인지적
4. 관우의 군사적 역량
4.1. 용맹
4.2. 지휘관으로서
5. 행정관으로서
6. 행적
6.1. 초창기
6.2. 형주 진수
6.3. 번성 공방전
7. 관우의 의
7.1. 관우의 초창기 도피생활
7.2. 관운장천리독행
7.2.1. 조조군을 떠나다
7.2.2. 오관참육장
7.3. 관우의 오만함
7.4. 관우-제갈량 대립설
8. 관우 사후의 일들과 그에 관한 설들
9. 관우 신앙
10. 다른 매체에서의 관우
11. 삼국지 안에서 등장하는 혈연자
12. 관련 항목


1. 설명

그의 아름다운 수염에서 비롯된 별명인 미염공(美髥公)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후 2천 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수많은 팬들이 있으며,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각종 게임, 영화, 드라마, 만화에 등장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관우를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종교적으로 신봉할 정도다. 더불어 관우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들도 상당히 많다.

명치까지 내려오는 긴수염뿐만 아니라,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된 것처럼 '대추빛처럼 붉은 얼굴(重棗色臉龐)'으로도 유명하다. 이 붉은 얼굴에 대해서 약간의 이론이 있는데, 연의가 목판본으로 대량으로 인쇄될 당시의 '삼국지통속연의' 판본에서는 원래 구운 대추빛(熏棗色)으로 판각되어 있었는데, 나중에 다시 판각-필사를 하는 과정에서 '태울 훈(熏)'자에서 연화발(灬)을 누락시켜 '무거울 중(重)'자로 기록하면서 원래는 까무잡잡한 붉은 기가 도는 그의 얼굴색 묘사가 새빨간 얼굴색으로 굳어버렸다는 것이다.

유비가 거병할 당시부터 장비와 함께 도원결의하여 죽을 때까지 그 의를 지켰다. 관우와 장비는 서로 호형호제하였고, 의형제라는 사람사이의 관계의 본질이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님에도 그에 버금갈만큼 친밀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비와 관우 그리고 장비는 의형제였음이 더 사실에 가깝다. 조조가 그를 얻기 위해 그토록 공을 들였고, 유비가 기반없이 방랑하던 시절부터 만인지적 소리를 공공연히 들었던 점으로 미루어 무척이나 화려한 과거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촉한의 창업공신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기록이 없어서 확인이 불가하다.

나관중본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의 죽음뒤에 관우와 장비의 성격을 평한다. 이에 따르면 관우는 강한 사람을 억누르고 약한 자를 동정하기에 병졸들이 다투어 그 앞에 와서 하소연하면 항상 화해시켰다. 하여 그의 병졸들은 관나리께 미안하다고 차마 그에게 오지 못했다[3]이는 곧 성격이 원만한 상사로 여겨진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장비는 군자는 우러러봤지만 병졸들에게는 가혹한 편이었다.

관우를 묘사하는 그림에서 예나 지금이나 빠지지 않고 그와 항상 함께 하는 것은 청룡언월도, 적토마, 그리고 춘추좌씨전이다. 그중 춘추의 경우 그는 춘추를 들고 다니면서 틈틈이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애장품들이 부각되어 관우의 전체적인 모습은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명장으로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학자는 아니었으며, 춘추는 옛일의 사례들을 참고할 목적으로 읽었던 걸로 보인다. 더하여 관우의 양 옆에 관평주창이 늘 관우와 함께한다.

특히 중국에서는 관우의 용맹함과(화웅과의 대전 등) 유비에 대한 그의 굳건한 충정에 감복하여 사후에도 함부로 다루어지지 않는 인물로써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어떠한 창작물에서도 함부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그가 지닌 무공이나 지략은 유비의 그것을 충분히 압도했으나, 도원결의 당시에 유비가 한황실의 후손임을 알게된 관우는 스스로 아우가 되기를 청했던 점으로 보아 그는 태평성대였던 전한을 부흥시킬 뜻을 가지고 있었고, 몰락한 전한의 후예였던 유비는 관우에게 있어서 자신의 뜻을 펼칠 인물이였던 것이다. 어느나라 못지 않게 중국 역시 삼국지를 비롯한 여러 고전역사들에 바탕한 민족주의가 있고, 그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관우는 신격화되어질 만큼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유명한 위인중 한명이다. 물론 여기서의 민족 개념은 근대 이후 창안되어 통용되는 서양식의 민족 개념이라기보다는 진나라때부터 시작되어 전한때 정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의 중화사상 또는 한족의 개념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다.

2. 연표

아래는 이마이즈미 준노스케가 쓴 "관우"에 있는 연표. 관우의 일생사는 다른 장수와 달리 뒤섞여있어 혼란이 오는 경우도 다분하다.

  • 160년 - 관우, 해현 하마촌(현 산서성 운성시 상평향 상평촌)에서 출생
  • 178년 - 관평 출생
  • 184년 - 관우, 여웅을 살해하고 고향을 떠남. 이 무렵 황건적의 난 발생, 주모자 장각 사망.
  • 188년 - 관우, 탁군에서 유비, 장비와 만남
  • 189년 - 유비, 안희현 위에 취임. 영제 사후 소제 즉위
  • 190년 - 관우, 유비를 따라 반동탁 연합군에 가담
  • 194년 - 유비, 도겸을 지원하기 위해 서주로
  • 196년 - 관우, 여포의 공격을 받고 조조 밑으로
  • 198년 - 조조, 유비를 좌장군, 관우와 장비는 중랑장에 임명
  • 199년 - 유비, 허창에서 나와 서주를 본거지로 삼음
  • 200년 - 관우, 조조의 포로가 되지만 백마 전투 후 허창 탈출
  • 201년 - 관우, 유비를 따라 형주에서 신야로 감
  • 208년 - 제갈량, 유비의 군사로 취임. 장판파 전투, 적벽대전
  • 211년 - 유비, 익주로 향하고, 관우는 제갈량과 함께 형주성 방어
  • 214년 - 관우, 형주성 성주에 취임. 유비, 익주 획득
  • 215년 - 익양대치. 관우, 형주 남부의 영토 문제로 노숙과 회담
  • 218년 - 관우, 딸의 혼인 문제로 손권과 불화를 빚음
  • 219년 - 관우, 전장군에 임명됨. 양양, 번성 전투 후 손권에게 사로잡혀 처형됨

3. 관우의 무

어떤 이들은 연의에서 묘사되는 관우의 '무(武)'는 사실 과장되었고, 반면에 정사에서는 오히려 연의에서 묘사된 그의 무공만큼 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연의에서 그의 무공은 분명히 과장되었지만, 다른 장수들의 업적도 똑같이 과장되어 상향평준화되었다. 관우의 용맹과 무공을 암시하는 대목이 정사에 있는데, 정사에서도 매우 용맹하다고 기술되어 있는 장수들 중에서도 적진 깊숙히 들어가서 적장을 참살한 인물은 관우와 방덕 밖에 없다.

그의 무공에 관하여 정사의 기록은, 관우가 적진 한가운데 있는 상장을 참하거나 이마에 화살을 맞고도 군을 지휘하였다는 내용 등과 같이 보통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의 관우의 용맹스러움을 증명한다.

3.1. 일기토

흔히들 삼국지에서 장수들의 무력의 척도가 되는 기준은 일기토라고 생각하는데, 연의에서는 많은 일기토 장면들이 그려져 있으나, 정사에서는 일기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이로 말미암아, 그 당시 전투에서 장수들이 일대 일로 싸우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을 것 같다. 혹은 기록이 상대적으로 간략한 정사의 특성상 일기토는 굳이 기록을 할만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연의에서 관우가 일기토로 승부를 가린 굵직한 장수들은화웅, 안량, 문추등이 있고 그들의 목을 베었는데, 이 중 정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화웅과 문추와의 일기토는 허구라고 하더라도 적진 한가운데서 그가 안량을 벤 일는 정사에 기록되어있고 이것만으로 사기적인 수준이다.
다음은 이에 대한 정사의 기록이다.

羽望見良麾蓋, 策馬刺良於萬眾之中, 斬其首還, 紹諸將莫能當者, 遂解白馬圍. 관우가 멀리서 안량의 대장기를 응시하더니, 말에 채찍질을 해 많은 병사들 사이에서 안량을 찌르고, 그 목을 베어 돌아왔다, 여러 장수들 중에서 능히 당해낼 자가 아무도 없었기에, 백마의 포위가 풀렸다.
여기서 우리가 계산에 넣어야 할 것은 관공을 주변에서 보호하던 기병들이다. 보통 상장들은 한무리의 기병등 호위무사를 대동한채 참전했다. 그러나 관우가 안량에게 접근하기 위해 죽였던 안량의 병력들의 머릿수를 감안해야 한다는 점이다. 관우가 호위병을 대동하였듯 원소군도 호구는 아니라서 안량을 호위할 군사들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정사의 기록이 말해주듯, 군중에 홀로 뛰어들어 상장의 목을 베어낸 것은 관우뿐이며, 정사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일기토 중에서도 최고로 꼽힐만하다. 안량의 군사들 사이로 뛰어들어 안량의 목을 베었는데 그 주변의 병사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중국의 전장에서는 춘추시대를 거치며 이미 한 명의 장수보다 다수의 병사가 더 위협적인 존재였다. 조조의 열전에 보면 조조가 공격하여 혼돈스러운 상황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일이다. 백마전투 이후 관우가 단숨에 후의 작위를 받은 사실만 봐도 조조가 관우를 회유하려는 목적을 생략하여도 대단한 공으로 여겨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게다가 관우가 안량에게 접근하기 위해서 관우 혼자만의 힘으로 베어죽인 안량의 부하 병력의 숫자를 생각해보면 관우가 어느정도의 수준과 깊이의 무공을 지녔던 장수인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순욱과 저수가 안량과 문추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하였으나 그것은 그들이 가진 그릇이 작다는 것 뿐이지 그들의 무력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었다. 힘만 센 바보들

순유의 계책에 따라 조조는 백마를 포기하고 회군하는 것처럼 위장했다가, 연진에서 황하를 건너 원소의 후방을 노리는 척 했으며, 순유가 치중대를 이끌고 황하를 돌아 서쪽으로 이동했고, 이에 원소가 군사를 나누어 연진으로 출격시키는 것을 기회로 삼은 조조가 경기병을 파견해서 백마를 습격해 안량을 죽였다는 기록을 보면, 관우는 경기병을 이끌고 백마를 기습하여 안량을 죽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용맹에도 불구하고 간혹 관우의 무예가 비난과 무시를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연의'의 묘사 때문이였다.

유비군이 북해의 황건적을 전멸시켰으며 관우가 관해와 90합이 넘는 힘겨운 대결 끝에 간신히 쓰러뜨렸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에 대한 정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공융관해가 이끄는 황건적에게 포위당하였다. 관해공융에게 쌀 1만 가마니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당시 공융의 부하였던 태사자는 북해를 몰래 빠져나가 유비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유비는 관우, 장비, 태사자를 부하로 삼고 북해로 쳐들어가자 관해가 이끄는 황건적은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관우가 이름없는 장수인 관해를 상대로 무려 90합씩이나 싸웠다고 묘사해 놨으니 관우의 무예가 평가절하 받을 빌미인 것이다. 하지만 관해가 이렇게까지 관우와 싸운 것은 허구다. 황건 잔당보다 무예가 딸리는 화웅, 안량 더군다나 유명하지 않은 장수에게 고전했다고 관우의 무예를 무시할 빌미로 삼는 것도 이상하다.관해가 킹왕짱 센걸 수도 있잖아 관우도 연의 초기 그리고 동탁토벌전에서 이름도 없는 마궁수가 나선다고 원소에게 무시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관우와 다르게 정사에서 관해는 별볼일 없는 장수이긴 하지만... 뭐 어쨌든 연의는 소설이니까.

3.2. 만인지적

또한 정욱전을 시작으로 나오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는 표현은 정사, 연의를 통틀어 오직 관우와 장비에게만 부여된 칭호이다. 유엽전에서는 '삼군을 뒤덮을 용맹', 여몽전에는 '곰과 호랑이같은 장수' 등등 용맹함을 강조하고 있다. 덧붙여, 주유의 천하이분지계에서도 관우가 언급되는데, 정사 주유전에서 손권에게 진언하기를, '주공이 잘 좀 해서 유비를 붙잡아 두시고 내가 관우, 장비를 부려 정복사업을 도모하면, 서촉은 밥이고, 조조도 말아먹을 수 있다' 정도의 이야기를 한 것이 나온다. 이렇듯 관우의 용맹에 대한 찬사가 줄을 잇는다.

심지어 정사를 쓴 진수도 관장마황조전의 평에서 관우와 장비를 '만인을 상대할 만한 장수'라고 평했는데 이는 진수로서는 이례적인 평가이다. 인물평에서는 주로 인품이나 업적 등을 말하기 마련이다. 무장의 경우도 대부분 사람 됨됨이나 군사적인 업적에 대해 말하지 무예나 용맹에 대해 서술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연의에서 화타가 관우를 치료하는 이벤트도 정사에서는 오른팔이 아니라 왼팔이란 것과 관우를 치료한 사람이 화타가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그대로 실려있는데, 이 일은 관우의 무장으로서의 용맹함과 기개를 상징하는 이야기로 정사의 필자가 관우의 무예를 높게 보지 않았다면 결코 실리지 않았을 에피소드이다.

일찍이 관우는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그의 왼쪽 팔을 관통당한 일이 있었다. 뒷날 비록 낫기는 했지만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욱신거리고 아팠는데, 의원이 말하기를 "화살 촉에 독이 있어 그것이 뼈속으로 들어가서 그런 것이니, 마땅히 팔을 가르고 뼈를 깎아 내면 이 고통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관우는 순순히 의원에게 자신의 팔을 가를 것을 명했다. 이때 마침 관우는 여러 장수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먹으며 서로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피가 흘러내려 받쳐놓은 대야에 가득넘쳤다. 그러나 관우는 구운 고기를 자르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눌 뿐 태연했다.
사실 마취빨이다 그보다 수술 중에 술이라니..

이희재 만화 삼국지에서는 바둑을 두면서 치료를 받는다. 머리를 써야 하는 바둑의 특성상 이쪽도 태연하게 진행한 묘사인 것을 보면 확실히 기인(...).

4. 관우의 군사적 역량

4.1. 용맹

이렇듯 관우의 용맹은 가공할 것이었고, 당대의 장수와 재사들은 모두 이를 두려워했다. 동시대인들이 그에 대해 남긴 평가를 살펴보면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무서운 장수라는 이야기들 뿐이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한마 유지로급의 결전병기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긴 백마에서의 포스를 생각하면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이 당연할 지도.

呂蒙與關羽分土接境,心知關羽驍雄難敵
여몽은 관우와의 땅을 나누어 접경에 위치해 있었는데, 관우가 용맹하고 날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정사 여몽전

羽素勇猛,旣難為敵
관우는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 정사 육손전 (여몽)

一向以驍銳聞名的關羽如果乘著水勢上升之利進軍,一定是個禍患
관우는 평소 용맹하고 날카로운 것으로 이름나 그 기세를 타고 올라온다면, 근심이 될 것입니다.
- 정사 온회전 (온회)

關羽、張飛皆萬人敵也,權必資之以禦我
관우와 장비는 만 명을 대적할 수 있으니, 손권은 반드시 이로써 우리를 막으려 할 것입니다.
- 정사 정욱전 (정욱)

而有关羽张飞熊虎之将 ... (중략) ... 分此二人,各置一方,使如瑜者得挟与攻战,大事可定也
(유비에게는) 관우, 장비라는 곰이나 호랑이같은 장수가 있습니다 ... (중략) ... 이 두 사람을 나누어, 각자 한 곳에 두어 저같은 자로 하여금 이들을 얻어 함께 싸우게 한다면, 큰 일을 이룰 것입니다.
-정사 주유전 (주유)

關羽﹑張飛勇冠三軍而為將 ... (중략) ... 則不可犯矣.
관우와 장비가 삼군을 뒤덮을 용맹으로 장군이 된다면 ... (중략) ... (촉을) 도모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 정사 유엽전 (유엽)

蜀,小國耳,名將唯羽
촉은 작은 나라로, 이름난 장수로는 오직 관우가 있었을 뿐입니다.
- 정사 유엽전 (위나라 각료들)

關、張赳赳,出身匡世,扶翼攜上,雄壯虎烈
관우와 장비는 굳세고 씩씩하여, 몸을 바쳐 세상을 바르게 하고, 윗사람을 잘 받들었으며, 호랑이처럼 웅장하고 거셌다.
- 계한보신찬

연의에서야 이 정도의 묘사는 메이저급 무장으로서는 평범한(?) 수준이지만 정사의 서술은 꽤 무미건조하기 때문에(당연하다, 소설이 아니니까) 이 정도의 평가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즉 용장으로서의 관우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는 얘기다. 다만 일신의 무예가 아닌, 병법이나 용병에까지 능한 장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그에 대한 평들은 대부분 그의 용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4.2. 지휘관으로서

정사에서 그가 행한 공적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명성에 비해선 초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무장들에게는 대체적으로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다. 오히려 관우는 한때나마 제후에 버급가는 위세를 누렸기 때문에 분량이 제법 많은 편이고 배송지가 각주로 많은 문서들을 덧붙인 덕에 그의 군사적인 행적을 추적하는 데에 큰 무리는 없다. 적어도 동시대의 무장들 중에서는 매우 충실한 편. 그의 군사적인 행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비의 수비를 맡았다가 조조에게 항복함.

2. 조조 휘하에서 원소와의 전쟁에 투입되어 안량을 참살.

3. 당양에서 패한 유비를 구원함.

4. 주유가 남군을 공격할 때 조인의 퇴로를 끊으려 했으나 이통에게 저지당함.

5. 청니, 심구에서 악진과 문빙에게 패퇴.

6. 여몽에게 형남 3군을 점령당함.

7. 이에 군사를 일으켜 익양에서 노숙과 대치, 도강을 시도했으나 감녕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단념.

8. 우금의 7군과 대립하던 도중 수해가 발생, 수해에 빠진 7군을 궤멸시킴.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참살.

9. 원군으로 파견된 서황에게 패하여 번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남.

10. 여몽의 심리전으로 군대가 와해되어 맥성에 고립, 거짓항복 후 탈출을 시도하다 생포되어 처형됨.

검증된 지휘관은 아니었던 인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지휘권을 잡은 형주 방면을 맡은 이후의 전적은 대체로 초라하여 그다지 높게 평가할 여지가 없다.

관우가 형주의 전권을 위임받은 해가 211년인데 그로부터 4년 후인 215년에 여몽의 공격을 받아 장사, 계양, 영릉의 형남 3군을 점령당한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탈환에 나서 익양에서 오군과 대치한다. 관우는 도강을 시도했으나 감녕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단념, 결국 유비는 손권에게 장사, 강하, 계양 3군을 양도한다. 즉 관우는 이때 자신이 관리하던 영지의 절반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4년이 지나 219년이 되면 나머지 절반도 잃어버리게 된다. 형주공방전에서는 비록 위의 명장인 우금과 조인을 밀어붙이기는 하였으나, 여러 문제가 산재해있었고 결국 패하여 남아있던 형주 내의 모든 거점을 잃었다.

관우의 실패는 비단 국지전에서의 패배 뿐 아니라 후한 13주 중 하나인 형주를 송두리째 날려버린, 전략적인 측면에서 어마어마한 손실을 가져온 사건이다. 제갈량의 융중대에서도 알 수 있듯, 유비의 기본적인 전략은 익주와 형주에서 조조를 압박해 들어가는 것인데 관우가 패망하며 전략 자체가 틀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제갈량의 북벌은 익주의 전력만으로 관중의 험지를 뚫는 하드코어한 경로로 진행됐다. 즉 사령관으로서의 관우는 대실패였다. 그렇다고 전투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냐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이통, 악진, 문빙, 서황 등에게 연달아 패했고 익양에서도 결국 빼앗긴 땅을 탈환하지 못한 채 형남 3군을 양도해 주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승리라고 할 수 있는 기록은 안량을 참한 일과 번성에서 우금과 방덕을 궤멸시킨 것인데 이 중 안량을 벤 것은 초인적인 용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으나 선봉으로 나서 용맹을 보인 것이므로 관우가 지휘관으로서 군사적인 성공을 거둔 것은 번성전투 때가 유일하다. 촉기에 의하면 이때 조조가 천도를 논했을 정도였고 각지에서 그에 호응하는 반란이 일어나는 등 그 위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그것이 승리로 이어지진 못했고, 서황에게 격파당해 물러난 후 여몽의 기습을 받아 형주군이 궤멸당하는 사태에 이른다.

정사는 짧게나마 다양한 인물들의 군사를 다루는 능력을 평하지만, 관우의 용병능력에 관해서 '군사를 부리는 법도가 없다(作軍無法)'는 요립의 평이 있다. 물론 요립의 평이 모두까기식 디스에다가 저 소리를 하다가 쫓겨나기도 했지만, 뼈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에 그 의도야 어떻건 무시하지 못할 기록이다.

군대는 원정을 나서려고 하는데 당신들은 이 일을 주의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에 유비는 한중을 손에 넣지 못하고 오나라로 달려가 그 나라 사람들과 남쪽의 세 군을 다투었는데 결국 세 군은 오나라 사람에게 주게 되었고, 헛되이 관리와 병사들을 수고롭게 하였을 뿐 이익없이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한중을 잃은 후, 하후연과 장합을 파군 깊숙이까지 들어오게 했다가 거의 한 주를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후에 한중으로 진군하여 관후(關候)는 죽고 한 사람도 살지 못했으며, 상용은 패배하여 헛되이 한쪽 지방을 잃었습니다. 이는 관우가 자신의 용맹함과 명성에 기대어 병사를 인솔하는 정확한 법칙이 없으며 자기 기분에 따라 돌발적으로 공격하였기 때문에 앞뒤로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병사를 잃게 된 것입니다. 관우도 상랑(向朗)과 문공(文恭)처럼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입니다. 문공은 치중이 되었지만 기강이 없었고, 상랑은 이전에 마량 형제를 숭상하여 그들을 성인이라고 하였으므로 현재 장사가 되어서도 항상 도에 부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랑 곽연장(郭演長)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했을 뿐이므로 큰 사업을 함께 경영하기에는 부족하여 시중이 된 것입니다. 지금은 약소한 시대이므로 이 세 사람을 임용하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왕련(王連)은 세속에서 흘러가는 자로서 세금을 가혹하게 거둬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기에 오늘같은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 정사 요립전 -

5. 행정관으로서

군사지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행정관으로서의 관우를 본다면 어떨까? 번성 전투에서 물자 부족 현상을 겪고 다른 부하들과의 사이가 안좋고(미방/사인), 외교관계를 다루는 것도 그다지 뛰어난 모습을 보이진 못했다. 병사들에게 잘 대해주거나 봉화대를 짓는 것을 볼 때 군정(軍政)의 사령관으로써는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것 같지만, 여몽의 통치에 백성들이 쉽게 관우로부터 이탈한다거나 의형이 인정한 능력있는 인재와 불화한 것을 보면 행정관으로써 크게 뛰어나지는 못했다.

6. 행적

6.1. 초창기

관우의 초창기 행적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부실하며, 이것은 그와 관련된 군사적인 기록도 마찬가지이다. 관우전에 따르면, 하동 해현 출신으로 탁군으로 망명했다가 유비밑에 들게된다. 유비가 평원상으로 진급할 때 관우는 별부사마가 되어 부곡을 다스렸다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관우는 유비의 휘하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선주전에 의하면, 유비는 황건적 토벌과 공손찬휘하에서 원소와 싸워 많은 공을 세웠는데, 그 공으로 벼슬을 받은 것이었다면 유비의 휘하에 있던 관우도 전장에서 활약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계한보신찬의 "藩屏左右,翻飛電發,濟於艱難,贊主洪業"(울타리처럼 좌우를 지키고, 벼락처럼 날아가, 어려움과 곤경에서 구해내어, 주인의 큰 일을 도왔다)를 생각하면 관우는 유비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유비가 조조로부터 벗어나 차주를 죽이고 다시 서주를 재탈환했을 때, 관우는 하비성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관우는 태수의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유비가 조조에게 패해 달아나자, 결국 관우는 조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무제기는 이를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으나, 관우전은 상세한 내용을 전해준다. 무제기에는 '관우가 달아났다' 정도로 짤막하게 기록되었다. 반면에 관우전에는 관우가 조조의 은혜를 갚았으며, 조조는 좌중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관용을 베풀어 놓아주었다는 일화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조조는 관우를 매우 아껴 그를 설득하여 투항하게한 후 그에게 편장군의 벼슬을 주었고, 그가 안량을 벤 후에는 후의 작위를 내리는 등 관우에게 많은 물량공세를 펼치었다. 하지만, 관우는 안량을 베어 빚을 갚은 후 그동안 조조가 보내었던 선물들을 모두 봉해 저택에 고이 두고는 작별을 고하였다. 연의에서 드라마틱하게 묘사된 이 장면은 정사의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다.

유비에게로 돌아간 관우는 다시 유비를 따라 형주로 들어갔다. 유표의 사후,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 당양에서 패했을 때, 관우가 유기가 이끌던 수군을 이끌고 와 유비를 구원하는 활약을 펼쳤다. 적벽대전 이후에는 주유의 남군 공략에 합세하여 조인의 퇴로를 끊는 역할을 맡았으나, 조조측 장수로 참전한 이통의 군대에 막혀 실패했다.

6.2. 형주 진수

관우가 주유, 조진, 사마의처럼 한 주를 진수한 것은 유비제갈량이 촉으로 떠나고 동독형주사로 임명된 다음의 일이었다.

선주(유비)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공이 오를 정벌하니 오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와 나는 본디 입술과 이같은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이 청니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은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 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4] -선주전-

위 기록은 유비가 아직 유장과 교전을 벌이기 전의 일이다. 조조를 핑계로 유장에게 군사와 물자를 요구하며 슬쩍 찔러보았는데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고 장송과의 밀약이 들통나 유장측의 협력을 얻을수 없게 되자 제갈량, 장비, 조운까지 동원해 익주를 함락시켰다.

청니대치에서 관우는 매우 불리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1차로 유비가 방통, 황충, 위연과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촉으로 떠나고 그리고 얼마 후 대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제갈량장비, 조운과 함께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유비를 원조하기 위해 떠났다. 관우는 2차례에 걸쳐 수만의 병력과 핵심 무장, 참모들을 다 떠나보낸 형주에서 홀로 위군과 대치해야 했다.

결국 관우는 악진, 문빙에 의해 패퇴하였다. 남군 바로 위에 위치한 임저가 위에 넘어가고 병참이 문빙에게 불탔으며 부곡 몇 개가 투항하는 피해를 입었다. 청니 대치의 기록이 악진전과 문빙전에만 남아있는 것을 볼 때, 형주 전체를 수복하기 위한 전면공격은 아니고[5] 손권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형주에서의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국지전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비는 익주 공략을 우선시하기 위해 형주 전선을 희생하는 도박을 건 것으로 보이며 결국 관우는 별 수 없이 패했다.

이후 유비의 입촉에 화난[6] 손권이 형주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고, 이에 손권은 군사를 몰아 형주를 공격했다. 관우는 일군을 이끌고 노숙의 군대와 대치했는데, 관우는 감녕의 별동대에 막혀 강을 건너지 못했다. 한편 관우는 노숙에게 회담을 제의하는데, 여기서도 커다란 성과는 보지 못했다. 이후 조조가 한중을 공략함에 따라 유비와 손권간의 화의가 이루어지고, 관우는 형남 삼군을 오에 분할하게 된다.

6.3. 번성 공방전

이후로는 널리 알려진 번성 공방전이 있다.

관우는 후음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간 조인을 요격하기 위해 행동하였으나 이는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관우가 우금과 맞서는 도중의 호우로 인해 우금군은 다수가 수몰되었고 우금을 포로로 잡았으며, 조인은 수몰된 번성에서 관우의 전선에 포위당했다. 이게 어느 정도의 상황이었냐하면 그 조조가 관우의 예봉을 피해 천도를 할 생각까지 품었을 정도다.(물론 주변에서 만류하자 제정신을 차리고 그만뒀다).

羽威震華夏. 曹公議徙許都以避其銳
관우의 위엄이 온 중국에 떨쳤다. 조공은 그의 예봉을 피해 허도를 떠날 것을 논의했다

하지만 조인의 끈질긴 수비, 지원군으로 온 서황의 활약과 관우조차도 아군으로 생각 안 했던 오나라 여몽의 활약으로 미방사인이 항복하며 근거지를 잃은 관우는 결국 격파당하며 원정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삼국지의 세 나라가 모두 얽힌 전투인 만큼 진행과정도 장난 아니게 복잡하고 평도 다양하니 진행과정은 번성 공방전을, 그 평은 형주 공방전의 평 부분을 보도록 하자.

7. 관우의 의

인의지사 유비를 제치고 관우가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물이 된 데에는 그의 용맹 뿐만 아니라 충의와 신의로 대표되는 그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연의나 기타 창작물에서 관우와 같이 무력능력치가 최고점인 여포와 가장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미 삼국 이후 후세의 중국에서 관우의 의로움은 공자와 대비되는 수준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예를들어 중국은 성인의 무덤을 일컬어 림(林)이라고 부르는데, 중국에서 무덤에 수풀 林자를 붙이는 경우는 딱 두 사람에게 한정된다. 하나는 공자의 묘인 공림이고, 또 하나가 바로 관우의 묘인 관림이다. 더 나아가 관우는 황제와 동급의 취급을 받게되었고, 그를 위하여 관제묘까지 만들어졌으며, 나중에는 아주 신화화까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따지고 보면 그의 충의지사의 모습 때문이다.

정사 및 삼국지연의에서 관우의 의를 보여주는 일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뭇 사람들이 의리를 돌보듯 하고 배신을 밥먹듯 하던 혹독한 난세에 관우는 탁현에서 돗자리를 짜던 유비를 만나 도원결의를 통하여 의형제의 연을 맺은 후, 황건적의 난 이후로 쭉 아우 장비와 함께 군신의 관계를 뛰어넘어 평생 유비와의 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 서주에서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여 유비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조조에게 항복하게 되었을 때, 관우는 유비의 가족을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고 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조조에게 항복할 때 내건 세 가지 조건 중 두 번째가 바로 "두 부인(미부인감부인)에게 유 황숙의 봉록을 내리고 그 분들의 집에는 외부인들의 출입을 일절 금하게 하라."였다. 다른 두 조건은 "난 조조가 아니라 한나라에 항복하는 것이다"와 다들 잘 아는 "주군 유비의 위치가 확인되면 곧바로 그를 찾아 그곳으로 가겠다"였다.
  • 관우의 마음을 얻으려던 조조로부터 온갖 환대를 받고 장군의 직위도 받으며 제후에 봉해졌다. 조조는 사흘이 멀다하고 잔치를 베풀었고, 귀한 비단 옷을 지어주는 등 정성을 다했다. 또한 온갖 금은보화와 아름다운 미녀들을 수시로 보내주었지만 관우는 그때마다 이를 모두 거부해 돌려보냈다. 이에 조조는 여포의 적토마를 관우에게 주는 초강수를 두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관우가 기뻐하며 받았으나 이는 (이당시에도 여전히 생사여부조차 모르던) 주인인 유비를 더 빨리 찾아 갈 수 있다는 것이 그가 기뻐했던 이유였다. 결국 조조는 비통해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유비를 부러워하였다. 하지만 관우는 조조가 자신을 위하였음을 알았기에 은혜를 갚고자 원소와의 전투에서 조조가 불리해지자 직접 나서서 안량과 문추를 베었다.[* 김홍신 평역판 삼국지에서는 본래 관우가 자청했지만, 조조가 관우에게 공을 세우게 하지 않으려고 반대했다(장요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으면 승상 곁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간언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관우는 마냥 대기하고 있었지만, 송헌위속이 싸움에서 져서 결국 관우를 불러들였다. 또한 순욱이 "유비가 살아 있다면 보나마나 원소 밑에 있을 테고, 이 때 관우가 안량을 죽이면 원소가 성이나서 유비를 죽일테니 관우를 내보내는 게 좋다"라고 간언한 탓도 있었다.
  • 원소와의 중요한 전투에서 원소의 최고장수들인 안량과 문추를 베는(정사에서는 안량만) 엄청난 전공을 세워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편지 한통을 관우에게 보내자마자 하루종일 운 후 많은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동안 쌓은 공적과 관직을 모두 내놓은 채, 유비의 가족과 함께 유비를 찾아 길을 나섰다.
  • 오관참장
  • 화용도

일단 관우의 얼굴이 빨갛게 묘사된다는 점부터가 "충의"를 상징한다. 실제 관우의 얼굴이 붉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빨간색은 충의(와 동시에 좋은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한 붉은 색에 대한 해석은 적토마에도 적용된다. 이에 상응하는 다른 증거는 바로 조조의 얼굴색이다. 경극에서 조조는 얼굴이 하얗게 묘사되는데, 이는 흰 얼굴색이 "거짓말과 간사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삼국시대로부터 후대의 인물인 남송의 충신으로 평가받는 악비를 주인공으로 하는 경극에서도 악비의 얼굴을 빨간색이다. 반면 그 악비와 대립하는 진회의 얼굴색은 흰색이다.

충의지사로서의 관우의 모습은 연의와 정사 모두 일관되게 기술한다. 연의에서는 그의 '의'를 나타내는 대목으로는 오관참육장- 조조 버리고 유비한테 가는길에 지나가는 관문마다 족족 통행증을 요구하는 조조의 장수들의 목을 베어버렸다는 이야기-과 화용도 사건- 적벽대전에서 크게 진 조조를 사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조조가 관우에게 옛 정을 상기시키며 비는 바람에 관우가 살려준 일화-가 있다. 이중 화용도는 완전한 나관중의 창작이며, 오관참육장 역시 절반은 진실이고 나머지 진실은 허구다. 실제로는 유비에게 더 빨리 갈 수 있었는데, 소설의 묘사를 따르면 빙 돌아서 가는 셈이었다.-인데 이는 나관중이 관우의 의로움을 좀더 부각시키기 위하여 첨가한 연출로 생각된다.

오관참육장은 관우가 조조에게 은혜를 갚았다 생각해 원소 밑에 의탁하고 있던 유비에게 돌아간 얘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본디는 유유히 그냥 떠났지만 민담에서는 그게 심심하다고 여겼는지 관문의 문지기들을 베며 관문을 통과했다며 이야기를 부풀렸고, 그러한 민담이 삼국지평화에 기록되어있다. 삼국지평화에서 관우는 항우의 환생으로 여마동 등 그의 시체를 유방에게 팔아먹은 장수들이 오관의 장수로 환생해서 복수를 하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삼국지평화에서 그려지는 화용도사건은, 적벽대전에서 크게 패한 조조가 북쪽으로 도망치다가 미리 매복하고 있던 관우를 만나게 된다. 관우는 조조를 보내줄 생각이 전혀 없는데, 갑자기 자욱하게 낀 안개로 인하여 사방이 잘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조조는 전력을 다해 관우를 지나가 버린다.[7] 삼국지연의에서는 오관참육장때 자신을 용서해줬던 조조를 생각하여 군령이냐 정이냐에 괴로워하다가, 결국 조조를 보내주는 이야기로 바꾸었는데 중국소설사략에서 루쉰은 이 부분을 매우 칭찬하였고, 중국 고전 소설을 짜게 평가한 학자 왕궈웨이도 삼국지연의는 순문학이 될 수 없지만, 화용도의 구절만은 대문학자가 아니고는 쓸수 없다며 극찬하였다.

강자(사대부)에게는 오만한 반면, 약자에게는 온화했던 관우의 성격은 그가 패망했던 번성공방전에서 잘 드러난다. 조조가 8만 원소군을 생매장한데 비하여 관우는 우금과 3만의 포로들을 살려두었고 이들도 먹여살리기 위해 동맹국이었던 오나라의 군량을 탈취했다. 다만, 그가 군량을 탈취했던 상관 지역은 번성에서 한참이나 후방에 위치한 촉-오 접경지역에 위치해 있어서 진짜 관우가 우금과 그의 삼만 군사들을 먹여살리기 위하여 본인이 직접 오나라의 군량고를 턴 것은 아닐 것이다.

7.1. 관우의 초창기 도피생활

몰락한 기득권층이 아니었을까 하는 썰이 나오는 장비와 달리 관우는 하층민 출신임이 거의 확실하다. 정사 관우전 첫줄은 하동 해현 출신으로 망명해 탁군으로 달아났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망명원인에 대해 이런저런 설이 나오는데 하동은 당시 중국 최대의 소금 원산지중 하나였던지라 소금에 관련된 일, 꼭 찝어서 말하자면 소금의 밀매[8]에 관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게 지목되고 있는데, 같은 소금 밀매업자간의 항쟁에서 뭔가 트러블이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외에는 악덕 관리가 미녀를 겁탈하려 해서 죽였다든가, 고리대금업자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말도 안되는 금액을 요구해서 갚지 못하자 노비로 팔아먹는것에 분노해서 죽였다는 등등. 다양한 전설이 전해지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유야 어찌됐건 관우가 고향을 떠날 정도의 죄라면 "살인"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이 때문인지 (혹은 그 대상이 관우여서 그런지) 도망다니던 중의 이야기를 다룬 전설도 꽤 많다. 이 중에는 관우의 얼굴이 어떻게 빨개졌는지에 대한 기원을 밝히기도 한다(물론 신빙성은 확 떨어진다). 사례를 들자면,
  • 관우가 어떤 마을에서 숨어살던 중, 경비병들에게 들킬 위험에 처했다. 그러자,
    • 어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서는 옆에 있는 연못에 세수를 하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방사능 오염?!
    • 어떤 할머니가 갑자기 관우의 얼굴에 흰 천을 씌우더니 냅다 두들겼다. 그 때문에 코피가 터지더니 그 피 때문에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 이 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얼굴을 보더니 "얘는 아니네" 하고 갔더란 이야기.
전자는 그럴듯한데, 후자는 충공깽이다. 지나가는 할머니 최강설도 아니고(…).

이야기 하나 더. 이 숱한 전설들 중에는 관우라는 이름과 자가 모두 "가짜"라는 설도 있다.
  • 관우가 어느 도성(혹은 마을)의 관문을 지나가야 할 때였다. 그 때 경비병들이 관우의 체격을 보고 의심하면서 누구냐고 물었다. 그 때 관우는 급한 김에 일단 관문을 보고 "성은 관(關)이오."라고 대답했다. 이후 시간을 끌다가 새의 깃털이 떨어지기에 "이름은 우(羽)요."라고 둘러댔고, 하늘을 보자 긴 구름이 둥둥 떠다니기에 "자는 운장(雲長, 긴 구름)."이라고 대답했다.
카이저 소제어디까지나 전설이다. 그냥 야사로 알아두자.

7.2. 관운장천리독행

관우가 조조를 떠나 하북의 유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에피소드. 직역하면 "관운장, 천리 길을 떠나다"라는 뜻이다.

관우가 조조를 떠나는 부분과 일명 "오관참육장"으로 불리는 부분으로 나뉜다.

7.2.1. 조조군을 떠나다

원소의 신하인 진진을 통해 하북에 있는 유비의 소식을 듣게 되자, 관우는 당초에 약속한 대로 조조에게 이별통보를 하고 떠나가려 했다. 하지만 조조는 피객패[9]를 걸어서 접객을 하지 않으려 했고, 장료 역시 조조의 밀명(으로 추정)에 따라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이에 관우는 조조로부터 받은 물건을 모두 집에 보관한 뒤, 조조에게 투항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개인적인 물건들만 챙겨서 하북으로 떠나갔다.

이에 조조는 뒤늦게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고민하며, 정욱채양은 "감히 승상님의 말을 거스르다니!"/"내 잡아서 죽여주마!"라며 관우를 치라고 했다. 그러나 조조는 "이미 그와 약속한 바 있으니 어쩔 수 없다."라면서 그를 전송하러 쫓아갔다. 그렇게 조조와 대면하게 된 관우는 유비의 두 부인이 탄 마차와 그에 딸린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파릉교 위에서 홀로 조조군을 맞이하였다. 조조는 노자로 쓰라면서 황금을 선물하였으나, 관우가 이를 거절하였고, 이내 조조는 다시 전포를 선물하였다. 조조의 호의를 두번씩이나 거절할 수 없었던 관우는 전포를 받았으나, 만약을 위해 청룡언월도 끝에 전포를 걸치며 받은 뒤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마차를 쫒아갔다.

선물을 칼끝으로 받은 관우의 버릇없는 태도를 두고 조조의 휘하 장수들이 불평을 했지만, 조조가 그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달랬다.
그는 혼자이고 우리는 여럿이니 그가 우리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대들은 무인다운 무인을 만났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이 부분에서 "약속을 지킨 관우도 대단하지만, 그도 조조와 같은 대인을 만났기에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당당하게 떠나갈 수 있었다"라며 조조의 넓은 아량을 칭찬했다.

7.2.2. 오관참육장

다섯 관을 지나면서 여섯 명의 장수를 베었다는 삼국지연의의 에피소드. 관우가 형님인 유비를 찾아 하북으로 향할 때 수비대장들이 적국으로 가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10]며 막아서자 단칼에 썰어버리고 갔더란 이야기다. 판본에 따라 "오관돌파"라는 게임공략 같은 명칭도 종종 사용된다.

각 장수에 관한 설명은 항목을 참고.
하지만 이 에피소드 자체는 거의 허구이다. 무제기에는 원소 진영으로 달아났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관우전에는 좀더 자세한 서술이 나오는데 안량을 베어 은혜를 갚고 작별의 편지를 쓴 후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수의 평에도 '은혜를 갚았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사실 삼국지연의 이전부터 관우의 오관참장은 유명한 에피소드였다. 환생을 바탕으로한 삼국지평화에서는 항우의 환생인 관우가 이때 자신의 시체 조각을 가져가 유방에게 바쳤던 다섯 장수의 환생들을 죽여 복수한다는 이야기로 설명하였다. 아무래도 그냥 관우가 훌쩍 떠나는건 관객에게 재미없는데다가, 아무래도 적국으로 간다는데 아무도 막지 않는건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이런 에피소드가 탄생한것 같다.

관우가 조조에게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자 떠났다는 주장이 있다. 백마전투 후 관우가 받은 편장군은 장군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직책이고 '수정후(壽亭侯)' 역시 별 볼일 없는 관작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 유비 진영에서는 2인자 대접을 받던 그가 조조 휘하에 뛰어난 인물이 많은 것을 보고 뜻을 이루기 어렵다고 생각해 유비에게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실과는 다르다. 편장군은 관도대전 직후 조조에게 투항한 장합과 문추를 벤 서황에게도 돌아갔다. 특히 장합의 경우엔 조조가 장합을 한신에 빗대는 엄청난 극찬을 하면서 투항을 받아들이는데 편장군이 잡직이라고 보는 건 정말 멍청한 소리다.[12] 최소한 관우는 장합-서황과 동급이었으며, 후한 대접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한수정후(漢壽亭侯)가 '한(漢)나라의 수정후(壽亭侯)'라는 것은 중국에서도 잘못 알려진 것으로서 본 뜻은 한수(漢壽)[13] 땅의 정후(亭侯)라고 한다. 정후는 관내후 가운데 최하 등급이지만[14] 사실상 왕족이나 권신이 아닌 일개 무장이 받을 수 있는 작위로서는 최고 등급으로서 조조의 심복 중에서도 이 정도의 직위를 받은 자는 많지 않다. 관우전에도 조조가 관우를 두텁게 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는 관우를 붙들어매기 위해 금은보화와 미녀 10명, 좋은 집, 높은 관직, 그것도 모자라 레어템 한정판 적토마를 주는 것으로 묘사한다. 물론 연의에서는 관우의 의리를 드러내기 위해, 금은보화는 봉인해두고 미녀는 형수님들에게 시녀로 주며, 적토마를 받고는 '형님에게 돌아갈 때 편하겠다'면서 기뻐하도록 묘사한다.

장수를 베었건 안 베었건 기껏 세워놓은 공과 받아놓은 벼슬까지 버리고 유비에게 돌아간 것은 사실이다. 당시 유비는 근거지로 삼았던 서주를 잃고 원소 신분으로 잔여 세력을 추스리고 있을 뿐. '헌제의 밀서를 받았다'는 정치적 입지를 제외하면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유비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은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주군의 부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조 휘하에 남는다면 1인자는 못되어도 평생 누릴 권력과 부귀영화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남의 식객 노릇이나 하는 옛 주인을 찾아간 것이다. 천 년도 더 지난 현대에까지 의리의 화신으로 추앙받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관우가 조조의 환대에 응하지 않은 데에는 '의리' 외에도 치정적인 면도 있지 않았는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조심스런 추정도 있다. 촉서 관우전 배송지 주석에는 관우가 여포의 부장 진의록의 처 두씨에게 마음이 있어[15] 조조에게 전후 전리품으로 달라고 했으나 두씨가 미인임을 안 조조가 그만 약속대로 하지 않아역시 인처모에 관우가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일화를 전한다.[16] 물론 가십에 가까운 흘러온 정보라 신용도가 떨어지지만 말이다.[17] 여자라면 조조밑에서 열이고 스물이고 거느릴 수 있었다. 애초에 그정도로 속이 좁은 인물이었다면 조조라는 거인이 그토록 공을 들였을까? 연의 한정이긴 하지만 조조는 관우가 항복하겠다면서 군사를 물리라고 하자 정말로 군사를 물렸고, 이에 부하들이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반발하자 "그럴 사람이라면 도망가라고 해라, 붙잡지 않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진지하게 따져보자면 오관참장은 영락없는 관우의 범죄행위이다. 연의에서는 관우를 중심으로 사건을 묘사해서 그를 가로막는 여섯 장수가 악인으로 보이겠지만, 사실 저들로서는 관우를 막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관문같은 중요한 장소를 법적 허가 없이 한 명의 말만 듣고 그냥 통과시켜 주는 것은 오히려 관리로서는 실격이다. 조조 직속 장수라도 관문을 통과하려면 통행증이 반드시 필요한데, 하물며 진심으로 항복하지도 않은 관우를 무얼 믿고 통과시켜 주겠는가. 현대로 따지면 북한 간첩으로 의심받는 사람이 높으신 분의 허가를 받았다면서 38선 통과를 허가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저 관우의 의리를 부각시키기 위해 희생당한 관리들만 불쌍할 뿐.[18] 사실 처음부터 통행증을 깜박한 조조의 잘못이 제일 크다.

덧붙여 관문을 통과하는데 승상 같은 초고위직 실세의 통행증이 필요한걸로 봐서는 당시는 거주지 이전이나 여행의 자유가 크게 제한되어 있었나 보다. 한나라가 본래 그랬는지, 아니면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대 + 조조와 원소가 전면적으로 맞붙던 시기라 취해진 특별 조치인지는 아시는 분이 추가 바람. 원래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의 여행 및 거주이전의 자유는 그 자체가 근대 시민국가의 증표로 취급될 정도로 전근대엔 없었던 제도였는데, 자급자족을 위해 필요한 공동체 크기도 작고 3차 산업의 비중도 거의 없다시피하던 그 때 성문 밖에서 온 사람, 특히 (관원에게 뇌물을 찌를 수 있는) 캐러밴이나 (권위를 증명할 수 있는) 벼슬아치를 제외한 사람을 받는다는 건 그 자체로 성내의 분란 요소를 들여보내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7.3. 관우의 오만함

정사 삼국지의 서술자들은 모두 관우는 '사대부에게 오만한' 성격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들이 직간접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마초가 촉에 귀순했을 당시 제갈량과의 에피소드이다.

마초에 새로 들어왔을 때 형주에 있던 관우가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물어봤는데, 제갈량은 관우가 이런 문제에 민감하다는 걸 알고 답장을 이렇게 썼다.

"맹기는 문무를 겸비했으며 용맹함은 일반인을 뛰어넘는 이 시대의 걸출한 인물로 한나라경포팽월 같은 수준이라서 익덕과 나란히 선두를 다툴 수는 있겠지만, 염(髥, 관우의 칭호였던 미염공[19]을 뜻함) 그대의 절륜한 출중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관우는 이 답장을 받고 아주 기뻐해 빈객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한다.

관우의 이러한 성격은 나아가 그것이 그의 최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는 동맹국 군주 손권에게 함부로 대한 일[20]이나 미방을 업신여긴 일 등이 제시되며 진수는
그러나 관우는 강이자긍(剛而自矜-굳세고 자부심이 강함)하고 장비는 폭이무은(暴而無恩-난폭하고 은혜롭지 않음)하여 자신의 단점으로써 패망하게 되었으니 이수(理數-도리,이치)의 상례로다.
관우가 죽은 것은 이런 단점으로 인해 패망했다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손권 또한 유비가 자리를 비운사이 무단으로 손부인을 데려가고 유선을 납치하려 했으며 더 깊게 생각하자면 손가와 유가는 원래부터 원수지간이다. 촉한의 유비는 유표와 형 동생하며 지낸 적이 있었고 유비는 유표의 후사 문제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유표와 어느 정도 의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문제는 유표가 동오의 손권에게는 뭘로도 갚을 수 없는 커다란 원한이 있다는 점. 유표가 손권의 아버지인 손견을 죽게 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손권에게 형주쟁탈은 단순한 땅따먹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인 손견의 넋을 달래줘야 한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었다. 유비는 친한 형님이 물려준 땅을 함부로 남에게 내줄 수 없는 노릇이고 손권으로서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원한을 풀어줘야만 했다.[21] 굳이 관우가 아니어도 형주 문제로 인한 촉한과 동오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그 자리에는 삼국지에서 가장 욕을 안먹기로 소문난 조운을 앉혀놔도 결과는 다를 게 없는 상황이였다. 다만 유비로서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영토였기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사람을 앉힌 것일 뿐이였다.

형주 침략 전, 관우가 손권이 사신을 보내서 요청한 정략결혼을 반대한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입장이라면 거절할 수도 있다. 앞서 유비의 뒷통수와 손권의 손부인을 통한 납치 시도 그리고 익양대치를 통해 험악해질 때로 험악해진 두 가문 사이의 화친을 위한 목적일 수도 있지만 위의 손씨와 유씨 집안 사이의 문제도 있는데다가 국경지대를 지키고 있는 사람의 딸을 달라는 건 암만 봐도 인질극이 될 가능성이 농후. 물론 그럼 '관우가 인질극에 휘둘릴 정도로 마음 약한 사람이냐?'라는 비판도 할 수 있고[22] 밑의 오소리 새끼드립이나 번성공략전 당시에 관우군이 오의 군량을 털어간 점등 관우가 손권에게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것도 사실이다.

특히 연의에서 관우가 손권을 "개"라고 호칭한 것은 지나치긴 했다.(연의가 아닌 정사에 의하면 실제로는 개는 아니고 오소리새끼라고 했다고 한다.) 술처먹으면 개가 되니까 옳은 말이긴 하다 이 일은 관우빠인 종강조차 "손권이 개라면 관우와 의형제를 맺은 유비는 손부인과 혼인을 했으니 호랑이 형과 개 누이가 혼인을 맺은 것이고, 호랑이 시동생에 개 형수가 있는 셈이다."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형주 침탈은 멸망 때까지 오라는 국가의 방향을 결정지었던 사건으로 어제의 적도 오늘의 아군이 되는 난세에 이같이 중대한 결정을 단순히 개인감정 때문에 그런 일을 했다고 생각하는건 지나치게 단편적인 생각이다.

어떻게 보면 손권과의 외교에서는 관우가 굿캅 배드캅(Good Cop, Bad Cop) 모델에서 '배드캅'을 맡은 측면이 있다. 분명히 관우는 형주 영토 문제에서 유비의 의사와는 별개로 독단적으로 움직일 리는 없는데, 손권의 부하를 쫓아보내거나 노숙과의 단도회에서 회담에 임하는 등 형주 문제에서는 전면에 나서는 사건이 많다.

미방의 경우는 명백하게 자기 자신이 군법에 연루될 죄를 지었던 것이고, 관우가 이를 질책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으나, 이 일이 있기 전에도 평소 그가 미방 등에 대해 '업신여겼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형주의 한나라 소속 태수들 가운데 손권이 공격해오자 항복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 모든 사람들이 관우와 사이가 안 좋아서 손권에게 항복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미방은 유비의 인척이고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숙장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의 맥없는 항복에 의아해하며 분노했고, 또한 그 이유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정사는 미방의 항복을 당대 사람들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혹은 설득력이 높다고 생각한) 근거로 설명해낸 것이다. 관우와 미방/부사인간에 불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미방이 항복한 이유가 "관우의 오만한 성격을 견디지 못해서" 였다는 것은 증명될 수 없다. 정사에서의 묘사와 같이 미방이 어쩔 도리가 없게 된 상황이라면 목숨이 아까워서 항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도의적으로는 비난을 받겠지만 말이다.

차라리 제갈량 사후 위연처럼 양의가 싫어서 명령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움직인 사례를 개인 감정에 기인한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언정, 미방의 경우는 관우에게 당한 것에 대한 앙갚음보다는 당시 전황 상 본인의 살 길을 찾아갔다고 보는 게 좀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한가지 주목할 점은 관우가 적대하거나 업신여긴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전부 호족, 사대부같은 당대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를 형처럼 따랐던 장비와 가장 대비되는 점인데 장비가 사람을 군자와 소인으로 나누어 군자는 지위와 경력을 막론하고 예우하고 소인에겐 가혹했다면 관우는 아랫사람들에겐 적장 여몽조차 인정할 정도로 관용을 베풀었지만 기득권층에 속하는 사람들과는 지역, 경력, 능력 막론하고 트러블을 일으켰다. 이런 차이때문에 관우와 장비의 출신은 정반대일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7.4. 관우-제갈량 대립설

이 설은 소설 삼국지연의를 기반으로 합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 처음 시작된 해석. 고우영은 화용도의 대목에서 제갈량이 관우가 조조를 살려줄 것을 알고도 화용도로 보낸 것은, 관우가 군공을 어기게 만들어서 2인자인 그를 제어하려는 것이었다는 해석을 했다. 마치 제갈량이 "2인자 부정론"을 내세운 파울 폰 오베르슈타인처럼 보이는 대목.

하지만 삼국지연의의 화용도 대목에서는 제갈량이 "조조가 죽지 않을 운세일 것을 알고, 관우가 과거의 은의를 갚도록 하기 위해서" 화용도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이것은 겉으로 둘러댄 것일 뿐이고, 속셈은 저랬다고 해석한 것인데…. 사실 삼국지연의는 고전소설이라서 등장인물의 심리 자체가 그렇게 깊지 않다. 대사로 설명되어 있으면 그냥 그런 묘사가 맞는 것이다.(…) 별로 더 이상 깊은 의도는 따지지 않는 것이 고전소설로서 삼국지 연의를 읽는다면 올바른 해석이다. 내면에 복잡한 의미가 있는 현대소설과는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물론 이런 재해석은 재해석을 하는 작가의 자유지만, 삼국지 연의의 본래 뜻은 그런게 아니다.

고우영 삼국지는 나중에는 심지어 제갈량이 관우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해석까지 했다.[23]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도 이 해석을 따왔다고도 하는데, 이문열 삼국지에서는 관우와 제갈량의 다툼이 설령 있었다 하더라도 관우의 죽음을 방조한 것이 아니라 제갈량의 사정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관우가 제갈량과 대립했다는 논리가 제기된 이유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제갈근이다. 제갈량의 친형이면서 오나라의 막료로 일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제갈량이 촉한에서 친오파가 된 반면 관우가 오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라 후대의 삼국지연의 창작자들은 관우가 제갈량과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대립했다는 묘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제갈량은 형 때문에 오나라편이 되는 거고 관우는 이를 띠껍게 여겨서 대립했다는 점. 이러한 점을 반영한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에게 찾아오는 오나라의 사신을 항상 제갈근이라 묘사하고 있으며 관우는 제갈근을 항상 구박[24]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동맹국인 오와 손권을 대하는 태도 등을 볼 때 둘의 정치적인 행동 방식엔 뚜렷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이점은 둘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형주를 수비하는 무장과 국가를 경영하는 정치가의 차이라고 보는게 맞겠다. 다만 중간에 들어온 제갈량 입장에서 경력도 높고 자부심이 강한 관우가 대하기 어려운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이둘의 구체적인 관계는 제갈량이 마초에 대해 묻는 관우의 서신에 답한 내용말고는 기록이 없는탓에 명확하게 알 순 없고 추론하기 나름이다.

8. 관우 사후의 일들과 그에 관한 설들

219년에 관우가 사망하자 조조여몽이 제꺽 죽어버렸고 감녕은 생명이 위독한 상태가 되었다. 조조의 경우는 노환이고 여몽은 병사한 것이지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세간에서는 관우가 잡아갔다고 많이 쑥덕거린 모양이다. 연의에서도 이를 적극 채용하여 조조에게 배달된 관우의 머리가 눈을 부라리며 여몽은 연회 도중 손권에게 꼬장을 부리더니 그 자리에서 피를 뿜고[25] 급사한다.

연의에서는 옥천산에 나타나 보정[26]에게 원한을 토로하고 조조의 꿈에 나타나 정신공격을 일삼는 등 사후에도 현역임을 과시하더니 끝내는 이릉전투에서 모습을 드러내 아들 관흥에게 도움을 준다. 이후에는 강족, 특히 월길과의 싸움에서 위기에 처한 관흥을 구출하고 장포에게 지시를 내리는 등 촉나라의 숨겨진 결전병기로 활약한다. 당연히 모두 허구이지만 이는 관우의 인품이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켰는지를 알려준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관우와 관련된 민담이나 전설이 생전이나 사후를 막론하고 수도 없이 많다.

배송지가 정사 주석으로 썼던 동진의 왕은이 쓴 촉기에 의하면 나중에 촉이 멸망할 때 참전한 방덕의 아들 방회는 그 동안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갈고 있었다. 종회의 부장으로 촉 토벌전에 참여해서 등애와 종회가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촉이 멸망하자 촉 전체를 뒤져 관이를 포함한 관우의 자손을 모두 멸했다. 그러나 위나라 어환이 쓴 위략만큼 이 책은 말이 안되는 부분이 많아서 무조건 신뢰하기는 어렵다.

설마 왕은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방회가 몰살시켰다는 관우의 자손은 촉나라 익주에 있던 차남 관흥의 자손들이다. 왜냐면은 2001년 관우의 후손이 발견되었는데 관우의 67대손 관중진으로 족보도 가지고 있었다. 족보에 따르면 관중진은 관우의 장남 관평의 후손으로 비록 오나라 군에게 관우와 관평이 죽었지만 형주에 남아있던 관평의 자손들은 계속 대를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또 족보에 의하면 관평의 아내는 조운의 딸 조씨라고 한다.[27] 관평은 조씨와의 사이에서 관월(關樾)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28] 족보에 의하면 조씨와 관월은 사인의 보호 하에 있었는데 형주가 함락되자 익주로 피신하지 못했고 오나라에 억류된 채로 관(關)씨에서 문(門)씨로 성을 바꾸고 평민이 되어 공안에 숨어 살았다. 이 때 여몽이 배려해준 덕분에 이들이 몰래 숨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후 서진사마염이 오를 멸하고 삼국을 통일하자 관씨로 복권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왔고 지금도 호북성 공안현에 관우의 후손들이 사는 집성촌이 있다. 이 족보는 내용이 충실해서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된 흔적이 없다고 결론내렸다.

참고로 관중진은 한국전쟁에도 참전했었다고 한다. 또 관우의 삼남으로 등장하는 관색은 실존하는 인물은 아니고 연의에서 지어낸 허구이다. 아마 방회에 의해 몰살당해 관우의 자손이 없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만들어진 인물로 추정된다.

그렇지만 삼국지 관련 미디어믹스들이 기본적으로 연의를 기준으로 하고 있고, 연의가 나온 시점이라든가 지금까지 삼국지 미디어믹스들에서 관우와 조운이 사돈 관계라는 설정은 당연히 없고, 두 사람도 그냥 서로 믿음직한 아군이라는 것 이외에 의외로 접점은 많지 않게 묘사.

9. 관우 신앙

관우에 대한 숭배는 관성제군을 참조.

10. 다른 매체에서의 관우

삼국지삼국지연의를 제외한 다른 작품에 등장하는 관우들. 항목이 길어져 따로 분리한다.

11. 삼국지 안에서 등장하는 혈연자

12.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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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른바 오호대장으로 불리는 촉한의 다섯 상장 중 정사에서 생몰년이 모두 확인되는 사람은 마초뿐이다.
  • [2] 그래서 중국 사람들 중에는 관우라고 하면 누군지 못 알아듣거나 관공이라고 수정해주는 경우도 있다. 김홍신, 이문열 등의 한국의 연의 번역/평역본에서는 관우가 죽기 전인 형주공방전 무렵(10권 체제 기준으로 대략 8권 전후)부터 호칭이 관우, 관운장에서 관공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하는 반면, 중국 원나라 때 초기 판본인 삼국지통속연의에서는 아예 도원결의 때부터 유비는 현덕, 관우는 관공, 장비는 그냥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고, 이렇게 삼형제를 부르는 패턴은 유비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선주로 바뀌는 것만 제외하면 세 명이 죽을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리그베다 위키에서 관공이라고 검색해도 본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된다.
  • [3] 리동혁의 "삼국지가 울고있네" pg259에서
  • [4] 212년. 10월 이전의 일.
  • [5] 조조가 악진과 문빙만을 보낸 점, 악진전, 문빙전 외의 기록이 전무한 점 등을 볼때 번성 공방전때와 같은 전면전 상황이 아님이 확실시되며, 이 해 겨울 10월에는 손권을 치기 위한 전투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굳이 형주 전체를 복속시키기 위해 공격함으로서 전선을 확장시킬 필요는 없다.
  • [6] 손권이 함께 유장을 공략하자고 했을 때 친척이라고 공격하지 못한다고 한 뒤 유장을 공격했다.
  • [7] 삼국지평화의 진주인공은 장비라 관우의 입지는 좀 줄어든 감이 있다.
  • [8] 당시 귀중품이었던 소금은 정부의 관리하에 엄청난 고가로 판매가 되고 있었다. 때문에 많은 소금상인들이 소금의 밀매에 관여했는데, 이를 염적(塩賊)이라 불렀다. 쉽게 말하면 마피아. 관우가 상업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도 이 때문.
  • [9] "손님의 문 두드림을 거절함"이라는 내용의 손님을 받지 않음을 알리는 패. 이게 걸려 있으면 손님은 조용히 돌아가는 게 예의였다.
  • [10] 적국으로 간다는 말은 곧 적국과 내통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 [11] 안량과 문추가 쳐들어 왔을 때 그들을 베어 유연을 구원해 주었다.
  • [12] 마등의 사례를 보면, 편장군은 목이나 자사의 부장 정도에 필적한다. 참고로 조조가 마등을 회유하려고 위위로 부르면서 마초에게 준 것도 편장군이고, 여몽이나 반장 등 중요한 목을 맡아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편장군이 내려졌다. 여몽을 대신하면서 육손이 받은 것도 편장군, 한당황개가 말년에 받은 것도 편장군으로,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다. 게다가 조조는 당시 어디까지나 한 왕실의 신하였고, 주요한 관직은 측근 혈연 장수들에게 내려졌다.
  • [13] 현재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더(常德)에 있는 현(縣)으로 이 쪽 출신으로는 대표적으로 반준이 있었다.
  • [14] 후는 크게 2가지였는데 봉토가 있는 열후와 봉토가 없이 수도에서 거주하는 관내후로 나눠진다. 열후는 등급에 따라 현후, 향후, 정후가 있었는데 자신의 봉토에서 세금을 거두는 역할을 했다.
  • [15] 다만 당시 진의록이 원술에게 사자로 갔다가 원술의 주선으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해버린 상태라, 두씨는 을 맞은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던 듯 하다.
  • [16] 두씨의 이야기가 원대부터 시작된 잡극/경극에서는 초선의 이야기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선 조조가 사로잡은 초선을 이용해 관우를 꼬드기려 하지만 관우는 여기에 넘어가지 않고 초선의 목을 베어버린다는 내용이다. 일명 '관대왕이 달 아래서 초선을 베다(關大王月下斬貂蟬)'가 이것인데, 버전에 따라서는 관우가 초선의 미모에 잠깐 넋이 나가 청룡언월도를 놓쳐 초선의 달그림자 목부분에 떨어졌는데 그대로 초선의 목이 잘렸다는 스토리가 되기도 한다.
  • [17] 이때 진의록과 두씨 사이의 아이를 조조가 입양해 키워 조예와 친우 사이로 크게 출세하는데 그 아이가 진랑이다. 연의에서는 사마의가 얼굴을 속여 거짓 투항해 제갈량을 낚으려다 죽은 장수다.
  • [18] 다만, 변희나 진기같은 장수는 통행증을 떠나 관우의 화를 돋구기는 했다.
  • [19] 관우가 조조 아래에 있을 무렵, 조조가 헌제를 뵈야 할 때 관우도 데려갔다. 이 때 겨울이라 조조가 관우에게 수염 주머니를 하사했는데, 헌제의 질문에 관우가 주머니를 끌러 수염을 보여주자 헌제가 감탄하여 "실로 아름다운 수염이다. 그대는 미염공(美髥公)이다."라고 하여 미염공이 호칭이 되기도 했다.
  • [20] 정략혼 제안을 거절한 일 등에서 보여준 손권에 대한 태도.
  • [21] 물론 손견이 먼저 침공을 하다 죽은것이니 어찌보면 적반하장으로 볼 수 있다.
  • [22] 근데 이 비판은 말이 안되는게 인질극에 휘둘리는거랑 인질극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곳에 딸을 맡기는건 엄연히 다르다. 생각해보라. 어느 아버지가 인질로 붙잡힐 수 있는 위험한 곳에 선뜻 딸을 내놓겠는가. 아무리 관우가 대를 위해 딸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이 딸이 위험에 처했을 때나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위험지역에 잡힌 사람의 희생을 감수하는것과 아예 위험지역인걸 알고도 사람을 보내는것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 [23] 이 해석 자체는 무서운 기세로 성장해 나가는 촉한이 갑작스런 관우의 죽음을 시작으로 기울어져 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묘사하는 절묘한 포석으로 그 자체만 놓고 보아도 어디 하나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복선이다. 다만 이걸 역사적 사실인양 포장하는 무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다 것이 문제점이다.
  • [24] 형주 일부분을 넘겨주라는 유비의 글(당연히 이는 공명이 손권의 계략을 꿰뚫어보고 책임을 관우에게 넘긴 것이다)을 들고 간 제갈간의 얘기를 듣고도 "장수는 밖에 나오면 명령을 듣지 않을 수도 있다"며 씹었다. 이 때 관우가 제갈근의 애원을 듣다못해 칼을 꺼내려 하자 관평이 말렸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관우가 맥성에서 고립되었을 때, 제갈근이 항복을 권하는 사신으로 갔다. 관우는 이번에도 거절했지만 구박하진 않았다. 이때는 관평이 제갈근의 목을 베려 하자 관우가 말렸다는 것.
  • [25] 버전에 따라서 그냥 피를 토하는 것도 있고,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 피를 뿜더라는 것도 있다. 어쨌든 끔살이거나 손권이 죽이지 말라고 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죽이자 독살
  • [26] 위에서 말한 오관참육장 대목에서, 변희를 대신해서 관우를 접대하다가 변희의 밀계를 미리 귀띔해준 스님이다.
  • [27] 이게 사실이라면 관우와 조운은 사돈지간이 되는 것이다.
  • [28] 건안 18년(서기 213년) 생이라고 한다.
  • [29] 가공의 인물.
  • [30] 이쪽은 실존인물은 맞는데 그냥 존재만 나오고, 이름은 진짜가 아니다.
  • [31] 수호전에서 나오는 관우의 후손이다.
  • [32] 관색전에 나오는 관우의 아내.
  • [33] 설명을 좀 붙이자면, 엠엘비파크의 한 유저가 자유게시판격인 불펜에 "어떤 특정 여성이 가지고 있는 상식의 정도를 알아보려면 관우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어보면 된다"(…)고 말하여 논쟁과 키배를 불러 일으킨 떡밥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일종의 컬트적인 인기를 끄는 표현이 되면서, 불펜에선 뜬금없이 "관우 아세요?" 라는 댓글을 종종 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