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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군

last modified: 2015-04-11 18:16:58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특징
3. 시초
4. 폭주
5. 확대
6. 최후
7. 관련자
8. 관동군(關東軍)


1. 개요

関東軍(かんとうぐん)

관동군은 일본의 총군의 하나이다. 주둔지는 처음에는 관동주(러일전쟁 직후 얻은 만주 조차지로 요동반도)였고, 후에는 만주 전역이었다.

일본 본토의 지역 구분 중 하나인 관동(간토)과는 무관하다. 중국의 여순(뤼순), 대련(다롄) 일대에 조차하던 일본이 이 지역을 '관동주(關東州)'로 명명하고, 여기에서 기반해 조직된 군대가 관동군이다.

2. 특징

한마디로 군대 자체가 계급에 상관없이 자신이 담당하는 분야만 훈련하는 부대이다. 이 때문에 장교가 장교로서 제대로 훈련받는 병과는 보병 병과밖에 없었으며 기갑이나 포병의 경우도 장교들이 지휘훈련을 받긴 했으나 보병에 비하면 그 비중이 떨어졌다. 이에 비해 비전투병과 장교의 경우는 철저하게 참모부 업무만 훈련시켰다. 이 때문에 계급이 높아도 병과로 서열이 갈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할 경우 비전투병과 대좌가 보병 소위의 지휘를 받는 극단적인 사태까지도 발생했다.

3. 시초

일본은 청일전쟁 직후 요동 반도를 손에 넣었으나, 3국간섭(러시아, 독일, 프랑스)등 각종 외교적 압력으로 다시 되돌려놨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중국을 위협해서 기어이 이곳을 조차지로 확보하였고, 이곳에 주둔할 군대를 1개 사단 규모로 만들었다. 이것이 관동군.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저 1개 사단은 본래 남만주철도가 관할하는 철도 연선을 수비하는 부대로 출발했었다고 한다. 즉 관동군의 시초는 본래 철도수비대인 셈이다.[1]

4. 폭주

관동군은 육군 소속이었지만, 일개 총군 주제에 육군성이 아니라 덴노와 직속으로 이어지는 명령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대본영이 설치된 이후로는 대본영의 작전지도를 받게 되지만, 관동군은 자신들이 대본영과 상하관계가 아니라 수평관계라고 생각했으며, 이런 생각으로 후에 만주사변이나 할힌골 전투를 일으켰지만, 결국 이는 궁극적으로 일본의 패망을 불러온다.

일본군은 관동주를 거점으로 호시탐탐 중국침략을 노렸으며, 1928년에는 중국 군벌장작림(장쭤린)을 폭사시키고 국민당에 덮어씌워 이곳을 차지하려 했으나, 그 아들 장학량이 일본의 침략의도를 간파하고 국민당군에 합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1932년 이시하라 간지 대좌의 음모로 루타오거우 사건을 일으켜서 당시 만주철도의 운영권을 일본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해당 폭파의 책임을 중국측에 돌려 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중국 침략을 개시했다. 이곳에 배치된 중국군 동북변방군(혹은 동북군 , 장학량군)은 20만명이 넘었지만 불과 1만명의 관동군에게 만주를 빼앗기고 만다. 그 이유는 장개석이 "공산당을 토벌하는게 우선이니까 저항하지 말고 산해관 안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런 명령때문에 장학량은 이후 장개석에 불만을 품고 장개석을 감금하여 국공양당의 항일연합을 촉구하는 안사변을 일으킨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전혀 중앙의 명령없이 벌어진 사건들이었고, 중앙정부는 사후추인만 했다. 군부의 폭주가 국가를 막장으로 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예다.

이렇게 만주를 차지한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우고, 관동군을 계속 확대했다. 관동군 사령관은 실질적인 만주국의 지도자였으며, 만주국의 모든 행정은 일본관료나 관동군 참모가 결정했다.

일본은 만주를 중국 침략의 전진기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동군은 그 주변지역에서의 일본 제국의 권익 옹호, 지배 지역의 확대와, 일본의 대륙 침략의 선봉으로서, 다양한 음모 공작과 작전을 수행했으며 중국인과 조선인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100 부대731 부대를 운영하는 등 다양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5. 확대

만주를 침략하여 소련과 국경을 맞닿게 되었기 때문에, 관동군은 소련을 가상적국으로 상정하고 점차 병력을 늘렸다. 1945년 8월의 폭풍 작전시절 관동군은 거의 100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보조부대로서 주국군을 거느렸다. 만주국군에는 조선인들도 많이 입대하였고, 그중에는 박정희도 만주군관학교를 나오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기도했다. 잔혹행위로 악명이 높은 간도 특설대도 정확히 말하면 만주국군 소속이다.

관동군은 육군대국인 소련과 맞닿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육군에서는 관동군을 최정예군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일본 육군장교가 거쳐가는 출세코스이기도 했다. 도조 히데키도 관동군 출신이다. 소련도 이 지역을 중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병력을 늘렸다. 그러다가 결국 1938년에는 한국-만주-소련 국경인 두만강 유역에서 충돌이 벌어졌다. 이 전투가 하산호 전투(장고봉 사건)이다. 이 하산호 전투에서 관동군은 초반 전투에서는 소련군을 후퇴시키는등 선전하는듯 보였으나 그뒤 반격을 당했고 그뒤에 군사적 적대행위를 금지하면서 그뒤로는 군사적 충돌이 없었다. 그러다가 다음해 여름(1939년 5월)에 몽고-만주 국경에서 군단급으로 맞붙었다가 소련군의 화력과 기갑부대에 정말 박살이 난다. 이것이 바로 할힌골 전투. (일본측은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전투들은 모두 대본영의 명령을 어기고 관동군이 제멋대로 일으킨 사건이었기 때문에 패배의 책임을 물어 관동군 사령관, 참모장 및 사단장 여러명이 예편되었다. 그런데도 관동군은 정신을 못차리고 독소전쟁이 개시되자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 1941년 100만의 병력을 동원한 "관동군 특종연습"이라는 무력시위를 하였다. 일본이 침략해 올것을 경계하고 있던 소련의 움직임을 볼때, 사소한 국경충돌이라도 벌어지면 전면전으로 확대될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관동군은 이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련에 책임을 덮어씌우면 완벽한 자위전쟁. 만주사변때나 중일전쟁때도 이런식으로 전쟁을 도발한 예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적어도 관동군보다는 정신을 차리고 있었고, 전쟁이 확대될 것을 두려워한 외무성의 도요타 데이지로 장관이 소련측에 자세한 훈련상황을 통보하여 별다른 충돌없이 지나갔다.

6.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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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영화인 퍼플 선셋의 한 장면. 소련군의 압도적인 기갑전력에 완전히 개발살나는 관동군의 모습이다.
GAZ-67대신 Willys MB가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랜드리스 받은건가 보다.

1941년 12월에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관동군은 우선순위에서 처졌고, 휘하 정예 부대들이 중국전선이나 남방전선로 이동하게 되어 관동군은 거의 2선급 부대의 집합소가 되었다. 여기에 더 병크는 이런 정예부대들의 장비들은 혹한에 대비된 것이었기 때문에 열대지방인 남방에서 갖은 문제를 일으켰다는 점이다. 야마다 오토조 사령관부터가 실전과는 거리가 먼 기병학교 교장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앞서 언급했듯이 머릿수만 따지면 100만명에 육박하는데다가, 아직까지는 장비와 보급도 충실한 상태였다. 그러나 2차대전의 교훈을 거의 반영하지 않고 마지노 선과 비슷한 요새로 소련군을 막는 동안 예비병력으로 소련군이 뚫은 방어선의 구멍을 막겠다는 어이없는 계획을 세운다. 이는 기동전이 뭔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데다가 독소전쟁초기에 독일군에게 전해받은 소련군의 추태만 반영하고 소련군을 얕잡아본 결과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사태였다.

결국 1945년 8월 9일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을 때(8월의 폭풍 작전)는 체계적인 반격을 하지 못하고 1주일만에 궤멸당하였으며 민간인들을 방치한 채로 도망쳤다. 한마디로 말해서 위의 동영상에 나올 정도의 반격도 일부 부대만 했지 나머지는 도망쳤으며, 그나마 속도가 느렸다는 이야기다. 그 동안 소련군은 1주일만에 거의 천km를 전진해 와서 개전 초기에 이미 북한에 진입하여 8월 15일에는 함경북도 중간의 청진까지 진입했을 지경이었다. 세계최강 독일육군과 대적하여 승리한 실력의 쏘련군과 싸우니 상대가 될리가

결국 일왕의 무조건 항복 선언 후인 1945년 8월 19일, 관동군 사령관은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까라면 까야지 근데 안까도 으앙 죽음 만주에서 잡힌 관동군 60여만명의 포로는 1955년까지 소련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하다가 석방되어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7. 관련자

8. 관동군(關東軍)

삼국시대의 반동탁연합군, 18로 제후군이라고도 한다. 함곡관의 동쪽인 관동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관동군이란 이름이 붙기도 한다.

당연히 1의 항목과는 관계없으며(...) 인지도도 역사 삼국지 매니아 외에는 아득히 1에 미치지 못한다.(...) 자세한건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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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이야기는 일본의 고바야시 히데오가 쓴 "만철:일본제국의 싱크탱크 "란 책에 나온다. 국내에도 출판되었으니 한번 읽어보자.
  • [2] 근데 전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