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HRSS

공작원

last modified: 2015-04-03 21:14:57 Contributors

국가 안보! HELP!

이 문서는 대한민국의 국방과 안보에 관한 내용을 다루며, 대중과 언론에 공개된 수준의 정보만을 제공합니다.
문서에 문제가 있을 경우 관련 기관으로의 신고와는 별도로 즉시 [http]위키워크샵에 제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Contents

1. 개요
2. 내국인을 선발하는 경우
3. 훈련
4. 무기·장비 체계
5. 침투, 탈출 방식
6. 북파 공작원
6.1. 북파공작부대
7. 북한 공작원
7.1. 남파 공작 사건


1. 개요

공작관(Agent handler)의 지시를 받아 현장에서 공작(Operation) 활동하는 정보기관 협력자.

예를 들어 1997년 한국 정보기관이 북한의 미사일기지에 접근해 사진을 촬영하고 싶다고 하자. 그러면 한국에서 보낸 정보사 장교는 북한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중국 동북3성에서 사무실을 차려놓고 공작망을 관리한다. 책임자가 직접 들어갔다가 잡히기라도 하면 외교적 문제는 물론이고 많은 것을 자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직접 북한에 들어가 첩보를 수집하는 것은 탈북자, 중국인, 조선족 등 현지에서 포섭한 협력자이다. 예를 들어 미사일기지 근처에서 복무하다 탈북한 북한군 출신이라면 미사일기지에 접근하는 경로를 잘 알고 있다. 이들 2명을 모아서 카메라를 주고 사진을 찍어오게 시킨다.

  • 고정간첩에게 공작금, 간첩용 장비, 본국에서의 정보 및 지령을 전달한다.
  • 통신망이 없는 상황에서 기밀문서 마이크로필름 중요 샘플 등을 전달받아 본국으로 가져온다.
  • 위성, 사진 촬영만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시설에 직접 무장하고 잠입해 첩보를 수집한다. 70년대 북한군이 DMZ에 콘크리트 수로 방어벽을 세우자, 북파공작원이 직접 방어벽에 들어가서 수로의 깊이와 폭을 줄자로 재어 오고 방어벽 콘크리트를 일부 샘플로 떼어 와서 분석했다. 2000년대에는 핵실험장 근처에 침투해 흙/물 샘플을 담아와 분석하거나 사진을 찍어왔다.
  • 고정간첩의 탈출을 돕고, 여의치 않은 경우 사살한다. 적에게 고정간첩 1명이 체포되는 것은 100명의 공작원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손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국경선 근처(50km 이내)의 적 시설물을 정찰, 확인, 폭파하기 위한 단거리 요원들도 필요하다. 전쟁처럼 헬리콥터나 중화기의 지원을 받으며 해당 지역을 '다 때려부수고 나오는' 특수부대식 작전이 불가능한 대치상황에서, 하루~이틀 거리를 비밀리에 잠입해 이러한 활동을 한다.

장거리 공작원과 단거리 공작원의 차이는 업무 외에도 크게 2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단거리 공작원은 잠을 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트(은신처)를 구축할 필요도 없고, 식량도 많이 들고 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무장이 장거리 공작원보다 강화된다. 두 번째로 단거리 공작원과는 달리 장거리 공작원은 전투를 무조건적으로 피해야 한다. 발각되면 거의 무조건 죽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2. 내국인을 선발하는 경우

24시간중 어느 때나 깨어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지금도 어느 하늘 아래에는 꽃다운 청춘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음식도 아닌 거 조금씩 먹어가면서 반잠 들어 있을 것이고, 어느 청춘의 불꽃은 산비탈 어느 곳에서 산짐승이 되어 뛰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 북파공작원 수기 중

공작원은 내국인을 쓰는 경우가 드물다. 괜히 잡혔다가 뭘 불어버릴 지 알 수도 없고, 모국의 개입을 부정할 수 없어서 외교관계가 경색되기 때문이다. 또 자기나라 사람은 아무리 훈련시켜도 적국 민간인처럼 보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1950년대~1980년대의 남북관계처럼 특수한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 북한 입장에서는 월북하거나 중공을 여행하는 남한 민간인이 없어서 도저히 포섭을 통해 간첩으로 훈련시켜 남한 사회에 잠입시킬 만한 인원이 없다. 나빠질 외교관계도 없다. 이 때문에 현지화/현지언어 훈련이 부족하더라도 무장공비를 파견해 간첩활동을 돕게 했다.
  • 남한 입장에서도 탈북자가 없으니 포섭할만한 대상이 없으며 중공도 수교가 없어 조선족을 포섭할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북파공작원을 보내 간첩활동을 돕게 했다.

이렇게 내국인을 선발할 경우 체제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은 자를 뽑아야 한다. 조금만 충성심이 흔들려도 붙잡히면 적국에 정보를 제공하고 전향하며, 더 흔들리면 아예 자수해버릴 수 있다. 따라서 적국과 전혀 연고가 없어야 하며, 매우 강한 신원조회를 시행하여 합격한 자만 선발한다.

내국인을 선발할 경우 현지인과 외모/체구가 비슷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예를 들어 북파공작원의 경우 북한 남자 평균 신장 158cm를 고려해 키가 작은 사람으로 뽑는다. 북한 사회에 숨어 지내면서 키가 크면 주목받기 쉽기 때문이다.

장거리 공작원의 경우 가급적 체구가 작을 것도 요구된다. 위의 이유뿐 아니라, 비트를 구축할 때 체구가 크면 은신이 힘들어지고, 식량을 더 많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적인 조건을 갖춘 자 중에서 몇 가지 조건이 추가된다.

첫째, 인내심이 극히 강한 자여야 한다.
적에게 쫓길 경우 수풀 틈에서 12시간 동안 똥오줌을 싸 가면서 같은 자세로 엎드려 있어야 하는 경우조차 있으며, 비트를 구축할 때는 야삽은 커녕 모종삽으로 3시간동안 꾸역꾸역 구덩이를 파고 흔적을 처리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낙엽 위를 걸을 때 낙엽을 한 손으로 치우고 한 발자국을 내딛고, 다시 그 자리에 낙엽을 위장해 자국을 없애는 방식까지도 동원되는 형편이다.

둘째, 지능이 평균 이상이며, 특히 암기력이 매우 우수해야 한다.
이것은 적국의 언어나 문화 등에 대한 많은 암기사항이 필요하며, 접선 장소나 귀환 방법에 대해서도 철저히 암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만일 기록해서 가지고 있다면 해당 공작원이 붙잡힐 때 다른 공작원이나 고정간첩들까지 붙잡힐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작원이 적군에게 쫓길 경우 본국에서는 일기예보나 암수표 등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탈출 방법을 암호로 송출한다. 이걸 해독하지 못하면 무조건 적국에서 죽기 때문에, 반드시 암호를 해독할 최소한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셋째, 매우 민첩하고 운동을 잘 하는 자여야 한다. 간첩이라면 현지 사회에 동화되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당당하게 출입하겠지만, 오래달리기만이 유일한 침투방법이라면 산악 달리기를 매우 잘해야 한다.

넷째, 성격은 과격해도 안 되고, 우유부단해도 안 된다.

회사원처럼 위장 직급을 쓴다.
사장엔 현역(지상대:대령 / 지구대:중령),
전무는 중령/소령,
과장은 대위,
계장은 중위 혹은 소위.

3. 훈련

북파공작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래달리기, 무장공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상적 측면이다.

오래달리기가 중요한 까닭은, 낮에는 숨어 지내야 하고 밤에도 비트를 구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이 극히 한정되기 때문이다. 온 몸에 모래주머니를 달고 모래조끼를 입고 산지를 1~2년씩 계속해서 뛰는 훈련을 한다.
북한에서도 오래달리기를 중요시하기는 하지만, 개방된 남한 사회에서 죽어라 뛰어서 도망칠 이유가 떨어지기 때문에 필수적인 훈련은 아니었다. 하지만 북한 무장공비 중 네팔에서 곤경에 처한 후 도보로 탈출한 사례가 생기면서 최근에는 오래달리기 훈련 또한 매우 중요해졌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은신술이다. 위에 썼듯 모종삽으로 3시간 동안 비트(두더지굴)를 구축하고, 흔적과 발자국을 없애며, 치약이나 비누를 사용하지 않아서 야생동물로부터 냄새를 없앤다. 그리고 발각될 경우 몇 시간이고 같은 자세로 먹지도 잠자지도 움직이지도 않은 채 은신한다. 산지의 경우 10m 거리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사격이나 총기 분해 및 조립, 적 화기 운용에 대해서도 배운다. 1970년대의 북파공작원들은 가볍고 휴대가 편리하며 조준사격이 가능하고 고장이 적다는 이유로 M1 카빈을 사용하였다. AK-47은 북한의 제식 총기이기는 하지만 공작원은 필사적으로 숨어서 도망다니므로 위장하는 의미가 없어서 사용하지 않았다. 1996년 당시의 무장공비들은 M16RPG-7 등을 사용하였다. 1960년대 김신조 일당이 침투했을 때는 가볍고 속사가 가능한 PPS-43을 들고 왔다.

적 언어 및 문화, 관습, 상식 등에 대해서도 배운다. 주로 적국의 전향자를 교관으로 활용하나, 북한의 경우 일본인을 납치해 교관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97년 최정남 강연정 부부간첩사건에서는 북한 간첩이 버스요금 잔돈을 받는 방법을 몰라 당황한 적이 있었고, 메밀소바를 먹으러 가서는 소스를 국수에 붓는 바람에 바지를 더럽히고 황급히 도망나온 적이 있었다. 이때 여간첩은 생리대와 아기기저귀를 구분하지 못해 두 번이나 아기 기저귀를 사기도 했다.[1]

또한, 탈북 문서에는 휴전선의 위험함에 대하여 기술되어 있다.
가까운 휴전선을 통해 탈북하지 않고 중국-북한 간의 국경을 거쳐 탈북하는 이유는 휴전선이 몹시 위험하기 때문이다.[2] 북한군 육군의 70% 가량이 휴전선 근처에 전진배치되어 있다. 이것을 통과하면 민경(민사행정경찰)부대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들은 북한 정권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높으며 잘 훈련되어 있다. 민경부대의 GP나 GOP를 통과하면 여러 장애물들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수색대 3명이 무조건 사살 태세로 근무하는 잠복호(참호), 수십m 이상의 지뢰밭, 5m 높이의 콘크리트 수조[3], 최대 1만 V의 전기 철조망.

따라서 침투, 지뢰제거, 수영, 잠수, 자물쇠 따기, 담장 넘기 등의 지형지물 극복 훈련을 받게 된다. 안내 전문가는 지형만 보고도 지뢰가 어디 묻혀 있을지 판별하여 제거하는 경지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잠수 실력의 경우 2~3분까지도 버틸 수 있다고.

그리고 식량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장거리 공작원의 경우 많은 양을 가지고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식량은 약간 부족하게 가져가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해결한다. 즉 산나물을 구별해서 먹거나 적의 민가에서 표시나지 않게 식량을 훔치는 것[4], 또는 작은 동물을 잡아먹는 것 등이다.

그 외 무성무기의 사용도 있는데, 그 당시는 K7 소음기관단총이나 독총 등의 무성무기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나이프를 사용했다. 북파공작원 관련 영상에서 젓가락이나 드라이버를 던져 30m 거리에서 꽂아버리는 묘기가 자주 나오는 까닭은 이것 때문이다. 소리없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비술도 배웠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소음권총은 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평균 3인 1정 수준으로 보급되었다고. 태권도나 유도 등의 맨손격투도 배웠으며, 나무와 돌 등 별것 아닌 자연물을 위험한 무기로 사용하는 훈련도 받았다.

각종 탈것, 기관차, 경비행기, 소형 선박의 운전법을 배운다. 북한 공작원들의 경우 200t 이하의 배는 누구나 조종할 수 있다고 한다. 지하철이 파업했을 당시 특전사가 투입되어 지하철을 운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독도법이 있다. 원래 독도법이란 지도를 읽어서 지형과 위치를 파악하는 기술이지만, 지도를 가지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적국 전역의 지도를 외워서 갔다.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는 축소 입체모형 등으로 훈련했다는 것.

면도칼만으로 이발하는 기술도 배운다. 민간인들에게 수상하게 보이면 안 되기 때문.

마지막 상황에서는 자살하도록 배운다. 청산가리 등의 독약 캡슐이나 자폭용 수류탄이 사용된다. 북한 공작원들은 이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훈련을 받고 나면 자폭을 옆집에 물 길러 갔다 오는 정도로 여기게 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자신의 주특기에 조금씩 따라 다른데, 안내·사진 촬영·흔적 제거 등이 있다. 단기공작원들의 경우는 위와 약간 다른데, 이들은 전투를 전문으로 했기 때문이다.

통신, 음어, 독도법, 관찰, 촬영, 북방한계선지대침투, 사격, 수영, 유격, 공수, 잠수, 해건(자물쇠 따기), 무술, 생존, 구보 30kg배낭-12km산악-55분대 주파, 각종 총기류 분해 및 조립특성, 폭약제조 및 산출법, 북한언어-행동-제식, 게릴라전술.

4. 무기·장비 체계

  • 1.21사태 당시의 북한 공작원들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목표로 다음과 같이 무장하였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습[5],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벌[6],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약품, 찹쌀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등 비상식품, 그리고 30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련제 기관단총(PPS-43과 실탄 300발),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토카레프),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
 
- 김신조 목사의 회고 중

  • 1970년대의 북파공작원들은 다음과 같이 무장하였다.
소음권총 3인1조에 하나, M1 카빈 소총 1인 1정, 실탄 100발, 수류탄 2~4알, 단도, 청산가리 캡슐(자살용), 응급약(아스피린, 진통제 등의 구급약 종류를 포함. 붕대와 실, 바늘로 어지간한 상처는 혼자서 꿰매버린다.), 만능열쇠, 지도, 나침반, 머리빗, 면도칼, 뻰찌, 라이터, 수통, 숨쉬기빨대, 바닥 밋밋한 농구화. 3단식 삽자루(모종삽과 야전삽 중간 크기), 낙하산 줄(밧줄 대용), 소형 망원경, 배낭(뭐든지 안에다 하나씩 넣고 묶게 되어 있는 소형), 식량(마른 걸로만 날짜 계산하여 부족하게 가져간다. 나머지는 훔쳐먹고 잡아먹고 구해먹고.), 수신 전용 소형 라디오(조장만), 올림푸스 망원카메라(촬영 전문가만)
전투를 목적으로 하는 파괴부대가 아니기 때문에 무장이 매우 빈약하다. 실탄이 적기 때문에 사격 시에는 무조건 단발로 조준사격한다.

RPG-7 (1문), AK 소총(4정), M-16 소총(2정), 권총(6정), 수류탄 등 각종 화기
사건 당시의 투항 유도 전단 같은 걸 보면 이 때 북한 공작원들의 인상착의는 위장복이 아니라 항공점퍼나 남방 같은 상의에 청바지 같은 사복이었다.

5. 침투, 탈출 방식

공작원은 전투 이외의 목적으로 침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전투를 최대한 피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흔적 없이 침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탈출할 때에도 최대한 흔적 없이 적의 추격을 피해서 탈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따라서, 공작원의 침투·탈출은 은신에 초점이 맞춰진다.

일반적으로 1970년대의 침투방식은 휴전선을 통한 육로 또는 잠수정을 통한 해로 침투가 대부분이었다. 육로로 침투할 경우, 해당 지역의 수색대(pathfinder)가 군사분계선 근처까지 공작원들을 안내한다. 이후 알아서 콘크리트 수조, 지뢰지대를 극복하고 목적지까지 달려가는 것이다. 해로로 침투할 경우도 많았는데 이는 소형 잠수정을 이용해 고정간첩과 미리 약속해 놓은 시간에 접선하는 방식이었다. 다른 방법도 그렇겠지만 매우 위험하니까, 1~2분이라도 약속 시간과 틀어지면 침투는 무산되고 각자 되돌아가는 것이다.

HALO 강하로 고고도에서 침투하거나 An-2, 허큘리스 프로펠러 수송기 등으로 저공 침투하여 낙하산 강습[7]하는 것들을 구상 했지만 실제로 시행된 적은 없다.

침투하는 인원은 일반적으로 3명이다. 독도법, 라디오 암호해독, 지뢰제거 등에서 뛰어난 '조장'이 맨 앞에서 뛰고, 가장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는 대원이 중간에서 뛰고, 흔적 제거에 가장 뛰어난 대원이 끝에서 뛰는 것이다.

중요한 임무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며, 정말로 중요한 임무의 경우 안기부의 정보요원이나 영관급 정보장교를 중간에 넣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보요원 중에는 여자도 꽤 있었지만 침투시키는 데는 별 무리가 없었다고…

6. 북파 공작원


통합 첩보부대
국 군
DIC
과거 첩보부대 HID UDU AISU  미 군 
KLO
CIA
 영도유격대 

북파공작원은 과거 대한민국 국군이 운용한 첩보부대 소속으로, 북한으로 파견되어 활동한 공작원이다. 대표적으로 1940년대 후반에 활약했던 림부대가 있겠다.#호림부대 재판장면#

1950년대에 각군별로 첩보부대들을 만들었는데, 육군 첩보부대는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 해군 첩보부대는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 첩보부대는 AISU(Airforce Intelligence Service Unit)이다.[8] 이들을 통틀어 북파공작 부대라고 한다. 북한에서는 우리 북파공작원들을 남조선 첩자라고 부른다.

휴전 후에도 남북 양국은 자국의 생존을 위해 많은 수의 간첩과 공작원을 파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 휴전 이후로 1972년 7월 남북공동성명 때까지 북파된 공작원은 모두 7,726명으로, 이중에서 사망 300명, 부상 203명, 북한에 체포 130명, 행방불명 4,849명, 기타 2,244명이다. 실종자 중 상당수는 자수자나 투항자로 간주하고 있다. 과거에는 북파공작원들의 근무사실조차 부정되었으나, 2002년에는 북파공작원을 인정하는 판결이 최초로 나왔으며 북파공작원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법안인 특수임무수행자 지원 및 단체설립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사실 남북대결사에서 한국에서는 북한측의 만행만 강조되었지만, 60년대 남측이 보낸 공작원들의 행동도 북한에서 이와 별로 다를바 없었다. 60년대의 남북의 공작원 파병의 주목적은 정보수집보다는 상대방 내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었으므로.

위의 상설 첩보부대들 외에도, 1968년에 북한의 김신조 부대가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침투했던 1.21 사태가 벌어지자, 이에 대한 응징보복을 위해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에 각각 보복 임무부대들을 만들게 된다. 이 중 공군 소속의 보복부대가 바로 영화 실미도로 대중들에게도 유명해진 684 부대로서, 김일성 암살 임무를 맡았던 부대이다. 이들 보복부대들은 보복임무를 위한 훈련을 마치고 출동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 남북간의 정치관계가 화해모드로 바뀌면서 당초의 보복계획이 계속 연기되다가 결국은 사실상 취소되었고, 그에 따라 존재목적이 없어진 이 보복부대들은 제대로 지원과 관리도 받지 못한채 그저 방치되었고 곧 해체될 운명이었다. 그러자 공군의 684부대원들은 이에 반발하여 1971년 8월 23일 기간요원들을 살해하고 육지로 와서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진입했지만 결국 대부분 사살되고 생존자들도 사형에 처해지면서 부대가 비극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각군의 나머지 보복부대(육군 선갑도부대, 해병대 MIU)들도 차례로 해체되고, 예전부터 있었던 상설 특수부대인 육군 HID와 해군 UDU, 공군 AISU만 계속 남게 된다.

정보사에 따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이 서로 공작원 파견을 자제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공작원 파견은 하지 않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그 이후로 신호정보(SIGINT) 체계가 발달하면서 공식적으로 장거리 공작원과 고정간첩을 파견하는 일은 없으며, 정보사 특수부사관만을 계속 양성하고 있다. 1990년대에 중국에 있던 많은 수의 남한측 간첩도 수효가 크게 줄어들었다.

2012년 5월 29일, 주한미군 특수전사령관이 한미 연합 특수부대가 북한에 HALO 강하로 침투, 땅굴이나 공군기지 등 여러 지하시설물의 정보를 직접 탐지하고 왔다는 발언을 했다는 해외 언론 보도가 나와 국내외 언론이 발칵 뒤집혔으나 하루만에 한미 국방부 당국에서 공식 부인한 사건이 있었다. 언론 보도

1990년대 후반에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다가 가혹행위를 당한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서 승소했다. 사망자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러한 지옥훈련 훈련은 실미도 사건 이후 사그라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를 보면 1990년대까지 그런식의 지옥훈련이 계속된걸로 보인다.[9]

북파 공작원이 된 아버지를 찾아 부대를 찾았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6살에 아버지와 같은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게 된 어처구니 없는 실화가 보도됐다. 결국 북한군에 잡힌 아버지는 역으로 남파된 후 바로 당국에 자수했지만 불법 구금 후 사형되었고 아들은 59년만에야 법원으로 부터 아버지의 무죄판결을 받아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게 됐다고 한다. 관련보도 대체 무슨 약을 빨면 6살짜리를 공작원으로 키울 생각을 하게 되는걸까

부대원들은 군번과 계급이 없다. 다만 공작원들은 임무해제(전역) 후 예비역 하사의 계급이 부여되며 전역하고 나서야 군번이 부여된다. 책임자의 경우 역시 현역때는 군번과 계급이 없으며 전역과 동시에 준위 내지는 소위 정도의 계급과 그에 걸맞는 군번이 부여된다. 적발되었을 경우 공작원의 정체를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군번과 계급을 부여하지 않는다.

북파공작원을 다룬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이 다름아닌 장포스

6.1. 북파공작부대

1951년 육군 첩보부대로 창설되어, 1961년 AIU로, 1972년 AIC로 개편되었다.
HID(설악개발단)은 68년 3월 창설되어 1994년 폐쇄되었다. 전방군단 5곳의 특수공작대로 파견된 것으로 추측되며, 파괴공작, 응징보복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최대 480명 규모였으나 단계적으로 축소되었다. 표어는 잔인한 응징, 처절한 보복. HID 전역자 중 한 명이 캄보디아특수부대를 창설하였다.
해군 첩보부대는 UDU(만포개발단), 공군 첩보부대는 OSI로 불리었다.
1990년 육해공의 첩보부대가 국군정보사령부(DIC)로 통합된다.

  • XX 회사 / OO 상사 / xx 공사
북파공작원들은 회사나 상사, 공사 등의 회사원으로 위장한다. 교관들도 과장, 부장, 전무 등의 회사원으로 위장하며, 현직 군인인 교관들의 경우 회사원 명칭을 사용하며 군복을 벗고 출입한다. 이것은 보안 유지 뿐만 아니라 만에 하나 북파공작원이 발각될 경우에 너희 민간인 중 불순분자의 소요로 일축하기 위해서이다.[10] 따라서 여기에 소속되면 군번도, 계급도 없다.

  • 공작원 중앙양성소, 809대, 판교목장
'목장'인 이유는 돼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 돼지들에서 소개된 부대로 추측되며, 소설에 등장하는 악마산은 그 일대에 있는 청계산이다.
1967년부터 1969년까지는 교관(선생)들이 서약서를 제출한 후 비무장지대에서 루트를 개척하거나 침투 기술 등의 공작원 양성 능력을 배양한 것으로 추측된다. 1975년에 폐쇄되었다.

1.21사태 직후 실미도 사건의 주역으로 김일성 암살을 위해 창설되었다. 중앙정보부와 공군의 요원들이 민간인들 중 자원한 인력들을 모아 무인도에 몰아넣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1월 23일에 미군의 푸에블로호를 나포해 승무원들을 인질로 잡아 보복을 막았다.
승무원들을 석방하면서 남북간에 화해 무드가 조성된 이후에는 이들을 북파할 이유가 없어졌다. 따라서 작전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이 상황에서 복지에 대한 배려가 계속 줄어들고 목적없는 훈련이 반복되자 부대원들이 반란을 일으켜 기간요원들을 살해하고 무작정 서울 시내로 돌입하다가 교통사고로 인해 수류탄이 폭발해 대다수가 사망하고, 생존자들도 사형당했다

2002년 이후 국군정보사령부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북파공작원 부대이지만 실제로 북파를 하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한민국 국군 가운데 가장 지독한 훈련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무성무기체계에 있어서 매우 뛰어나다. 여기는 가족의 동의를 받아야만 입대할 수 있으며, 입대하면 하사 계급을 받고 양성교육기간을 제외하고 4년간 복무한 후 전역시 1억 4천만원 가량의 보상금을 받는다. 사실 이 1억 4천이라는 게 다른 것이 아니라 복무 중에는 휴가 외에는 돈을 쓸 일이 없어서 급여를 가지고 정기적금을 들고 전역시 이자와 함께 수령하는 것이다. 복무기간 동안 영내 거주하며, 원칙적으로는 4년간 일반적인 외출 외박은 없고 분기당 1회 1박2일 외박이 실시되며 휴가는 원래 없었는데 2003년부터 1년에 1주일씩 주어진다고 한다. 2012년부터는 완전 비공개 모집으로 전환되었다.

7. 북한 공작원

북한에서는 연락군관[11], 남한에서는 무장공비라고 부른다. 공비는 공산 비적의 줄임말이다.

북한 공작원들은 장비 전달과 사진 촬영을 주 임무로 하는 북파공작원과 달리 실제적인 암살, 테러, 납치를 실행하거나 전쟁에서의 승리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북파공작원은 먹을 것이 많고 침투하기 쉬운 여름철에 침투하지만, 북한 공작원은 북한이 자랑하는 기갑사단이 임진강을 건널 수 있는 겨울철에 침투한다.

북한에서는 노동당 3호 청사, 제8군단, 조선노동당 작전부,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 통일전선부, 225국 등에서 공작원을 운용하고 있으며, 1992년부터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정규 공작원을 양성하고 있다.

2011년경 기밀해제된 문건에 따르면, 정치인 이진삼 의원이 현역 군인(당시 대위)이던 1960년대 후반에 방첩대(현 국군기무사령부) 예하 609특공부대에서, 대남 도발에 대한 비밀 보복 작전을 위한 인원을 추릴 때 전향한 전직 북한 공작원들을 데려다 쓰기도 했다고 한다.

7.1. 남파 공작 사건

자세한 정보는 국가정보원 과거 자료를 참조

최근 자유진영에서 대간첩작전은 언론에 의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어, 라디오만 있으면 적 정규군의 배치를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당시 한국군이 매우 애를 먹은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책 '공수부대 이야기'의 저자가 작중에서 한 평가는 시X 내가 간첩이면 라디오부터 뽀리겠다라며 그 정도로 정확했다고 한다.

----
  • [1] 그러나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상하다고 생각하진 않기 때문에 이 실수들을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 [2] 이 부분은 민경부대 출신으로 대남 방송 공작원이었던 주성일의 저서 DMZ의 봄을 참조한 것이다.
  • [3] 전기철조망 앞에 있어서 감전될 확률을 높이고, 넘어가는 순간에 잠복호의 사격 대상이 된다
  • [4] 부대 근처 민가를 대상으로 하는 훈련을 마치면 대위(과장)이 찾아다니며 돈으로 배상해준다
  • [5] 이들은 서울에 들어와서 검문에 발각될 때까지 훈련 중인 군부대로 위장하였다.
  • [6] 당시 계획상 서울로 진입한 후에는 취객으로 위장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 [7] 실미도 부대의 예정 침투법
  • [8] OSI의 명성이 커지다 보니 OSI를 공군의 대북정보부대로 잘못 안 사람이 많아졌다
  • [9] 관련 내용은 그것이 알고 싶다 886화에서 다뤘다. 충격적인 내용이 많으므로 시청시 주의를 요한다.
  • [10] 6.25 전쟁 발발 이전에 북파한 호림부대의 경우에도 당시 군은 청년들이 북한 인민군과 보안군 등의 억압을 견디다 못해 들고 일어나서 발생한 의거라고 발표했다.
  • [11] 북한에서 공작원은 장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