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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찬

last modified: 2015-10-09 12:47:59 Contributors

公孫瓚(153 ~ 199)

Contents

1. 개요
2. 정사에서
3. 백마의종
4. 미창을 실전에서 쓰다?!
5. 평가
6. 연의와 정사에서의 차이
7.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군벌이자 소설 삼국지의 등장 인물이다. 는 백규(伯圭)이다.

유비와는 노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사서에서는 자가 백규(伯珪)라고 하나, 185년에 건립된 《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에 따르면 공손찬의 자는 伯圭이다. 공손찬이 이 비석의 건립에 돈을 기탁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공손찬의 바른 자는 伯圭이다.

참고로 성은 공손씨이다. 공손 찬이지만, 삼국지 팬덤에서는 친근하게 손찬이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 정사에서

유주 우북평군(현재의 탕산시) 일대에서 북방의 이민족(주로 선비족)들 정벌 및 하여 변방을 안정시키는 것이 주 임무였던 군벌이며, 특히 백마 위주로 편성된 정예기마부대 백마의종을 이끌면서 큰 공을 세웠던 까닭에 백마장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 흔히 회자되는 백마장군은 사실 방덕의 별칭이었다. 덧붙여 방덕은 항상 백마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백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연의에서는 영세 군벌 정도로 묘사되지만 사실 이름 값이 대단히 높았던 인물로, 군웅할거 초반에는 사실상 산동의 더 나아가서는 하북의 최강자였다. 잘 나가던 시절에는 그의 본거지인 유주뿐만 아니라 기주, 청주, 병주, 연주에까지 세력권이 미쳐 따로 자사를 파견해 다스릴 정도로 하북지역에 엄청난 세력을 이루었다.

원래는 대대로 봉급 2천 석을 받던 태수급의 지위를 가지던 고관의 가문이지만, 모친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적자가 아닌 서자로서의 마음 고생이 많았던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가문의 작위를 이어받지 못했으며, 따라서 말단 공무원부터 관직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말단 관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총명했을 뿐더러 용모와 목소리에 절도가 있었으며, 당당하였고 변설에도 탁월했기 때문에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그를 눈여겨본 태수의 사위가 되어 인생이 펴기 시작했다.

태수의 적극적인 후원아래에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학업을 마친 후에는 다시 군의 계리를 지냈는데, 상관이었던 태수 유기가 비리에 연좌되어 면직되고 낙양으로 소환되자, 곧 벼슬을 버리고 낙양으로 가는 내내 병졸로 행세했으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기가 남쪽의 벽지인 일남으로 유배되자, 그를 수발하기 위해 다시 일남으로 갔다. 이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겨 북망산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비장함에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사면령이 내려지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곧이어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을 지내다가 요동속국의 장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가 요동속국의 장사를 지낼때 그는 북방의 기마민족들에게는 곧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전 중산국상을 역임한 장순과 전 태산태수 장거가 오환 그리고 선비족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하북을 휩쓸자, 진압에 나선 공손찬은 미친듯이 전공을 세우며 곧 중랑장과 도정후로 연달아 승진했고, 속국장사도 계속 겸임했다.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오환의 각 부족들은 아예 공손찬만큼은 피해서 다니기로 약속했으며, 공손찬의 얼굴을 그려 과녁으로 삼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쏴서 이것을 맞추면 모두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강경책으로 인하여 안으로는 백성들의 민심을 잃고 밖으로는 전보다 더 강한 적대감을 모아 전투에서는 연전연승을 이어가면서도 오히려 반란이 더욱 심화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결과적으로는 하북의 유주와 기주 그리고 청주는 물론 서주까지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평소 명망이 높던 유우를 유주목으로 파견했다. 유우는 북방 민족들에게도 신망이 높았기 때문에 오환은 유우가 부임한다는 소식에 자발적으로 귀순해 왔고, 장순은 처자를 버리고 선비에게로 도망갔다가 빈객인 왕정에게 살해당하여 반란은 싱겁게 진압되어 버렸다.

공손찬은 본디 선비과 오환 등의 북방민족들을 아예 절멸시키고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들과 친했던 유우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귀순을 청해오는 오환의 사신을 죽이며 전쟁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지만 이도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전란이 끝나자 유우가 자신의 공을 가로챈 것이라고 생각해 원망했다고 한다.

동탁이 집권하자 공손찬을 분위장군과 계후로써 임명되었다. 190년, 동탁이 황제를 갈아치운 것에 반발한 원소는 명망이 높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며 동탁에게 도전했는데, 공손찬은 산동지역의 군벌들 중 이에 반대한 몇 안되는 군벌 중의 한 명으로, 사승서에 의하면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모아 원소를 쳤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191년, 원소 요청에 따라 한복을 공격하여 격파하지만, 그 사이에 원소는 기주의 여론을 장악하고 한복을 협박해 기주목의 자리를 빼앗았다. 소설에서는 원소가 공손찬에게 기주를 같이 공격해 공평히 나누자고 제안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당시 한복에게 반 종속상태였던 원소의 위치상 한복을 공격하면 내부에서 호응하겠다고 제안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에 공손찬은 원소와 대립하던 원술과 연합했는데, 공손월을 예주로 파견해 원술이 친원소계 군벌을 공격하는 것을 돕다가, 그가 전사하자 이를 빌미로 군대를 출진시켜 원소를 공격했다. 당시 최강의 군벌이었던만큼 엄청난 위세를 떨쳐 그 위세에 하북 전체가 두려워 떨었으며, 수많은 군현이 원소를 버리고 공손찬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가 마침내 192년 1월에 군세를 이끌고 공손찬을 벌하러 갔었다. 공손찬은 군사의 양, 질, 장비, 보급 모든 면에서 원소를 압도했는데도 불구하고 회전에서 원소에게 연전연패했고 이후 원소의 부장 최거업의 군대를 대파하고 전세를 회복하는가 했지만, 192년 겨울에 다시 원소와 붙어서 또 다시 거하게 졌다. 결국 193년에는 마침내 기주를 포기했고 원소와 화친을 맺었다.

하지만, 193년 4월. 원소가 장연의 뒷치기에 본진인 업을 함락당해 위기에 몰리자 공손찬은 얼씨구나하고 다시 원소를 공격했다고 한다. 동시에 유주에서도 평소 이민족 정책 등의 문제로 사이가 나쁘던 유주목 유우의 본거지인 계의 옆에다가 성을 쌓고 대립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유우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선공했다.

공손찬은 유우를 매우 만만하게 봤는지 유우의 본진 앞에다 성을 쌓고는 유우의 교섭 시도를 모조리 무시하면서도 주력병력은 전부 밖으로 돌려서 유우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당시에는 가지고 있던 병력이 거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두려워하며 달아나려고 했지만 곧 유우군이 오합지졸인 것을 파악하자 정예병 100명을 선발해 화공을 펼치며 역공에 나서 철저히 무너뜨렸다. 유우는 관속들을 데리고 거용현으로 달아났고, 오환과 선비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공손찬은 수백 배가 넘는 유우군을 박살낸 것도 모자랐는지 그대로 유우를 추격하였고, 불과 3일만에 거용성을 함락시키고 유우를 산채로 붙잡았고 사태를 정리해버렸다. 공손찬은 유우가 원소와 짜고 천자를 사칭하려 했다고 모함하였고 이를 빌미로 그를 처형했다.

이렇게 공손찬은 유주에 대한 그의 지배권은 굳혔지만, 그를 향한 민심은 완전히 잃고 말았다. 더불어 북방민족들과는 원래 사이가 나빴던 판국에 북방민족과 한족(漢族)양쪽에 신망이 높던 유우를 죽임으로 인하여 공손찬은 하북 전체에서 완전히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여기에 원소의 선동이 더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유우를 처형할 때 공손찬은 유우를 저잣거리에 세워놓고 그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비가 오지 않았고 공손찬은 유우를 처형했다. 나름대로는 유우를 죽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듯 하기도 하고, 공손찬의 잔인한 성격상 죽음을 앞에 둔 유우를 조롱하려는 의도로 한말 일수도 있다. 예수가 죽기 전 조롱한 로마병사의 사례와 매우 닮았다.

유우를 죽였을 때 이에 대한 반대 세력이 조성될 것을 두려워해서인지 유주의 관리와 이름이 알려진 사대부의 대부분을 숙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공포통치에도 불구하고 유우의 관속들 중 상당수는 공손찬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였고 군대를 조직해 저항했으며, 여기에 원소가 유우의 아들 유화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기폭제가 되어 안팎으로 수만 명이 가세해 공손찬을 공격하게 된다.

계교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에도 원소보다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공손찬은 유우를 죽이고 불과 2년 사이에 병주, 청주, 연주가 모조리 원소 혹은 원소계 군벌들에게 각개격파 당하는 형태가 되어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또한 민심의 이탈로 인하여 공손찬의 부하들도 그에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즉 유우 처형이 공손찬에겐 죽을 죄나 다름없는 패착이었던 것이다.

195년 12월, 원소와 선비, 오환의 연합군에 거하게 털리고 2만 명의 전사자를 낸 공손찬은 이후로는 아예 나가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이전부터 우주방어 용도로 세우고 있던 역경성에 칩거하는데, 역경성은 10중의 참호가 있고 참호 뒤에 각기 5, 6장 정도(12~14m) 높이의 벽이 있었고 그 위에 망루를 세웠는데 그 망루만 수천개에 이르렀으며, 공손찬 자신이 거주하는 중앙의 망루는 특별하게 건축하여 벽의 높이가 10장(23m)이 넘었고, 그 위에 고층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군량미 3백만 섬을 쌓아두었는데 장기전에도 대비했기 때문에 성 안에서 둔전까지 가능했다. 당대의 건축기술과 공사 기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초월적인 규모의 요새였다. 애초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성을 세운 것부터가 공손찬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역경성을 쌓기 위해서 백성들을 무제한적으로 수탈하고 노역을 부과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손찬이 역경성에 칩거할 무렵엔 곡물값도 비정상적으로 올라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할 지경이다.

원소는 부하들을 보내 역경성을 공격했지만 몇 년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역경성의 칩거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원소를 꽤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던 방법이기는 했다. 공손찬이 역경에 틀어박힌 196년 무렵 조조는 황제를 봉대하여 슬슬 원소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공손찬이 찌그러들었다곤 해도 군사력만큼은 결코 무시할 세력이 아니었던 터라 당시 원소는 조조에게 신경을 쓸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고 실제로 원소는 조조에게서 대장군 관직을 빼앗은 것 외에는 특별한 견제도 하지 못한 채로 황제를 옹립하지 않아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을 후회했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소 쪽에서 먼저 공손찬에게 화친을 제의하기도 했었다.

문제는 역경성에 들어갔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활동하면 농성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텐데, 이때부터 공손찬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벌인다. 중앙의 고층 누각에 철제문을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는데 좌우의 측근들을 모두 만나지 않았으며 아예 7세 이상의 남자는 공손찬이 사는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직 첩들만이 공손찬을 시중들었는데, 모든 공문서는 누각 위에서 끌어올리는 식으로(…) 받거나 내렸으며 첩들에게 목소리를 크게 내는 훈련을 시켜 수백 보 밖에서도 들릴 수 있게 해서 별도로 지시사항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식을 벗어난 편집증 증세를 보인 데다가 나중엔 직접 출격해서 싸우는 일도 거의 없어지며 완전히 히키코모리가 돼버렸기 때문에 공손찬의 측근들도 공손찬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나마 휘하에 남아 있던 맹장과 모신들은 공손찬의 말도 안되는 행동에 질려 원소에게 투항하거나 그 휘하를 떠나 도주해버린다.

이후 장연과 공동전선을 펼치고, 원소군 내부의 불만세력들을 영입하며, 반원소 세력를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넘기 어려운 벽이 된 원소를 상대로 성공한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 198년, 원소가 전군을 동원해 공손찬을 치자 요격에 나선 공손찬은 아들인 공손속을 보내 장연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별도로 자신도 기병을 거느리고 출진해 흑산적과 연계하여 원소의 배후를 칠 계획을 세웠지만, 관정이 이를 제지하자 단념했다. 그런데 나중에 관정은 그를 말린 것을 후회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전사했다.

공손찬은 결국 퇴각을 거듭해 역경루에 틀어박혔고, 마침내 199년 3월에 원소에 의해 역경루가 함락당하자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자살했다. 원소가 공손찬의 머리를 허도로 보내자 조조는 정신이 아득해져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3. 백마의종

백마의종은 돌기병으로 유명한 유주의 특수부대로 좌익과 우익을 합쳐 교차사격을 행하는 전술을 이용한다. 전장에서는 국의가 이들을 격파하기 전까지 병귀신속의 전형으로 손꼽혔다.[1]

4. 미창을 실전에서 쓰다?!

除遼東屬國長史。嘗從數十騎出行塞下,卒逢鮮卑數百騎。瓚乃退入空亭,約其從者曰:「今不奔之,則死盡矣。」乃自持兩刃矛,馳出衝賊,殺傷數十人,瓚左右亦亡其半,遂得免。-공손찬 전
후한서의 기사가 말하듯 공손찬은 요동속국장사시절 실전 미창술을 해내고 말았다. 저 역사왜구 왜곡만화 센고쿠에서 야마자키 센페에나 센고쿠 히데히사가 했던 바로 그 미창술이다. 요새를 순찰하다가 선비족을 만나 10배 미만의 적을 상대로 2개의 창을 잘라 날을 양쪽으로 붙여 세우고 진·무쌍난무를 시전해 버렸다. 빨피에서 쓴거라 더 감쪽같군 마구잡이식 개돌같기도 하지만 마상창의 진화한 형태라고 할 만하다.

5. 평가

당시 중국 최강의 세력이었으며 자기 자신의 미칠듯한 능력과 포스를 자랑한 마치 항우와 비슷한 이미지를 지녔지만 항우가 군주로써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처럼 공손찬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극단적인 경우에는, 공손찬은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유교 도덕 자체를 거부하는 파천황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러한 평가는 대체로 과해 보이지만, 전체적인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공손찬은 사대부를 비롯한 후한의 기존 지배층 자체에 혐오감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어쩌면 모친의 신분이 낮았던 것 때문에 차별을 받다가 자수성가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출세한 과거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시선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자면, 점쟁이나 장사치를 관료로 기용했던 것은 사대부를 배제하면 그나마 관료일을 시킬 만한 지적능력이 있는 계층이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2]

다만 공손찬의 개인 사상이야 어쨌든 그가 대놓고 유교적 가르침을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공손찬의 참모 관정은 죽기 전 "군자는 남을 위태롭게 만들고 혼자 살아남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또한 유교에서 강조하는 '충(忠)'은 지배자로써는 더없이 유리한 미덕. 장인 유태수가 좌죄 되었을 때 북망산에 가서 흠향하고 죽음을 다짐하였던 것이나 스스로 의종(義從)[3]을 이끌고 적(오랑캐)를 친 것은 오상의 하나인 義[4]에 해당한다.

공손찬은 이민족에게 심각한 적대의식을 가졌는데 서강족을 멸해버린 태위 단경과 같은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북방에서는 흉노를 써는 자, 요서의 공손백규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5]

공손찬이 이민족을 적대한 것이 이민족과 유화 정책을 추진한 유우와의 불화 원인이 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주전파가 주화파를 겁쟁이배신자, 심지어 부의 적으로 까지 여기고 적대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공손찬과 유우 역시 이민족 정책에 대한 이견이 두 사람 사이에서 불화의 불씨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는, 공손찬의 생각으로는 이민족들은 싸그리 죽여버려야 할 놈들(...)이지만, 유우는 후한 자체가 내분에 휩쌓여 있는 상황에서 이민족을 적대시하기보다는 그들을 유화적으로 대하여 다스려서 소모를 줄이고 내부 수습에 전념해야 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공손찬에게는 유우가 이민족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그들의 생활을 보장해주는 것이 장래의 적을 키우는 행위로 보았을 것이라고 여긴다.

사실 어느 쪽이 옳다고 보기는 어려운 문제다. 당장은 유우의 판단이 올바르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중국은 아마도 공손찬이 염려했던 대로(...) 이민족에게 반쯤 망하고 오호십육국시대로 접어들게 되니.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러리에서는 이민족들을 너무 괴롭혀댔다는 이유로 공손깡패라는 별명이 생겼다.

6. 연의와 정사에서의 차이

연의에서는 왠지 히로인 포지션이다(…).

처음으로 등장할 땐 역전의 용사 백마장군이라는 식으로 조금 띄워주는 듯 하지만 그런 공손찬을 압도적으로 쳐바르는 적장이 등장해 위기를 겪고, 그 순간 유비 진영의 주연들에게 구출되는, 그야말로 완벽한 자버 역할에 가깝다.

호로관전투에서 여포와의 일기토에 패해 도망치다가 장비에게 구출되면서 유관장vs.여포라는 떡밥매치를 성사시켰고, 이후 동생 공손월이 원소군에게 살해당한 것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실상은 기주 점령의 목적명목으로 벌인 계교 전투의 서전에서 문추에게 그야말로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죽기 직전의 상황에 조운에게 구출되면서 조운의 인상적인 첫등장을 장식한다(…). 다시 계교에서 본격적인 회전이 시작되자 기세등등하게 백마진을 펼치며 원소를 공격하지만 간단히 파해당하고, 공손찬 진영 한복판까지 짖이겨온 국의에게 관광을 타는 분위기에서 다시 조운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겨 역공을 시도하나 이번엔 원소가 앞장서 서병사들을 독려하며 반격을 개시해서 다시 관광을 탄다.

기세가 오른 원소가 선두에서 공손찬군을 짓밟고 있을때 구세주처럼 유관장 삼형제가 나타나 원소를 꾸짖고, 호로관에서 유관장 3형제의 용맹함을 직접 봤던 원소는 겁에 질려 칼까지 떨어뜨린 채 뒤도 안돌아보고 도망을 치고 이후 가드만 굳게 해서 기주를 지키고 동탁이 칙사를 보내 화해를 권하자 싸움에 지친 공손찬 또한 이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 공손찬의 눈부신 군사적 전공에 비하면 온갖 굴욕의 너프를 당했으나 정작 공손찬의 참패로 끝난 계교 전투는 어쩌다보니 공손찬이 이긴 것으로 되어버렸다.

대체로 영세 군주 같은 인상에 사람 좋은 인물로 묘사되는 편. 역시 친구는 잘 사귀고 봐야 한다. 연의 초반 듣보잡 레벨이었던 유비의 최대 조력자였다.

하지만 실상은 굉장히 악독한 인물로 삼국지연의와는 달리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며, 비록 전투력이 강해 반란군들을 싸그리 쓸어버리는 등 대단한 전과를 올렸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 사병조직을 양성하고 백성들을 약탈해서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는 등 반란군과 별 차이가 없는 짓을 했다(…). 이런 행패를 부렸기에 결과적으로 자신은 승리를 거듭하는데도 반란은 더욱 심화되는 막장 상황을 초래했다.

경쟁자였던 원소가 연의, 정사에서도 모두 실제 이상으로 까이기 때문에, 원소의 하북 통일은 가문빨로 인한 장수빨, 공손찬이 원소보다 역량은 뛰어난데 가문빨이 없어 휘하장수들이 무능하고 모사가 없어서 졌다는 식으로 간혹 묘사된다. 하지만 원소도 가문빨은 아니었다. 공손찬도 서자긴 했지만 원소는 노비의 자식인데다 사생아란 말까지 있었기에 공손찬은 원소의 출신성분을 구실삼아 원소를 가열차게 깠다. 게다가 영지와 군사력, 위세에 있어서 원소보다 단연 압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공손찬의 휘하장수들이 없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역사의 패배자인 원소 세력이 묻혔던 만큼 패배자한테 패배한 공손찬이 묻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재주 있는 인물들은 내쳐버리고 점쟁이 유위대, 비단장사 이이자, 말장수 악하당 같은 인물들을 신임하고 관료로 기용했는데, 이들이 용렬한데다 난폭하고 부정축재에만 열심이라서 백성들이 싫어했다는 기록도 있고, 삼국지 시리즈에 공손찬군의 유일한 모사 정도로 알려진 관정 역시, 가혹한 관리로 원대한 계획도 없으면서 아첨하기만 잘하는 소인배였지만 유독 공손찬에게 신임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는데, 이런 예들을 보면 인재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인재라면서 기용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막장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조운이나 전예같이 특급 인재도 있기는 했으나 둘 다 중용되지 못했다. 애초에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 모으거나 적절한 곳에 잘 기용하는 것도 군주의 능력과 덕망에 달린 일이다.

게다가 나중에 가면 포악성은 극에 달해서 백성들을 학살하고, 영내에서 재주가 알려진 인물들은 시기해서 반드시 트집을 잡아 죽이고, 심지어는 눈을 똑바로뜨고 쳐다봤다는 이유로 죽여버리는 등 조폭 폭군의 모습을 보인다. 이런 관계로 기록에서는 대부분 악당 취급을 받는데, 그래도 원술과는 달리 군사적인 전과만큼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고, 간지나는 일화도 제법 많다.

후한서》를 쓴 범엽은 공손찬이 유우와 대립하지 않았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 하였다.[6]

그렇기 때문인지 삼덕후들 사이에선 삼국지연의에선 여포가 악당이면서도 간지나는 역할로 등장해 인기가 많은데, 정사에서의 여포의 찌질함을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공손찬에게 그런 기믹을 주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도 있는 듯 하다.

유비는 공손찬의 막장성을 보다 못해 서주구원을 빌미로 공손찬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유비가 도겸에게서 서주목을 양도받았을 때 원소에게 진등을 보내 이를 알리고 허락을 구하는데, 원소가 유비를 칭찬하며 서주목 취임을 긍정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토록 본디 공손찬의 영향권에 있던 유비와 서주 일대의 호족들이 모두 원소에게 돌아선 것을 보면 유비가 서주목 취임을 계기로 공손찬과의 관계를 끊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연의에서 공손찬이 이렇게나 우대를 받는 이유는 단지 노식의 밑에서 유비랑 같이 동문수학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덧붙여서 이민족들을 때려잡는 일을 했고, 실제로 이민족들을 때려잡았다는 점을 들어서 손찬이 형도 남북조 이후 시대가면 여포라는 농담이 나오기도 한다. 손찬이형이 이민족은 잘 족쳤지…[7]

삼국지평화에서는 반동탁연합을 위해 정주로 조조가 태수 공손찬을 만나러 간다거나 조조가 오나라를 공격할 때 보낸 편지에서 여태까지 조조가 없앤 적들을 언급하는데, 하내에서 공손찬을 참수했다는 언급으로 나온다.

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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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국의는 본가가 양주에 있어 강족을 진압하는 데에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맹상군의 말에 '장군의 가문에는 장군이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는 재상이 나온다'라는 말이 적절한 것이다.
  • [2] 만일 후한에서 다른 이념이나 종교가 발전했다면 공손찬은 불교도교로 선회하는 것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교는 막 도래된 시점이었고, 도교 역시 발전이 미흡했다.
  • [3] 양주의종과 같은 것들은 오랑캐 귀순 용사를 의미하나 여기서의 의종은 의로 뭉친 종사에 해당한다. 즉 자원병. 또 <<한서>> 이현의 주에 50세 이상의 즉시 소집가능한 잡색군의 의미로 쓰인 것 등이 있다.
  • [4] 부당함을 참지 않고 일어서는 것을 말한다.
  • [5] 단경은 그야말로 강족을 썰고 또 썰어서 걍 씨를 말려버리고 영제에게 오랑캐 장수의 인새를 수도 없이 바쳐 비단과 금, 부절 등을 하사받았다. 출전은 <<후한서>> <영제기>.
  • [6] 물론, 평가는 대체적으로 이민족에게도 추앙받는 유우의 인덕을 더 높게 평가한 것이다.
  • [7] 初平二年,青、徐黃巾三十萬眾入勃海界,欲與黑山合。瓚率步騎二萬人,逆擊於東光南,大破之,斬首三萬餘級。賊棄其車重數萬兩,奔走度河。瓚因其半濟薄之,賊復大破,死者數萬,流血丹水,收得生口七萬餘人,車甲財物不可勝筭,威名大震。拜奮武將軍,封薊侯。대략 기병 2만으로 약 30만의 황건떼거지(영제기의 별칭으로 개미떼(蟻軍)라고도 한다)를 털고 다시 턴뒤 또 털어 3만의 목을 자르고 수만을 더 죽였으며 7만을 산채로 포획 + 병장기&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