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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대기근

last modified: 2019-02-14 20:15:58 Contributors

庚辛大飢饉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 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 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염병이라 온통 움막을 지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의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리을 이미 그르쳤고 수수좁쌀도 다시 벌레가 먹었으니, 이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ㅡ《현종개수실록》 현종 12년 6월 4일, 대사헌 장선징의 상소 중에서.

Contents

1. 개요
2. 원인
3. 경술년(1670년)
3.1. 불길한 징조(음력 정월)
3.2. 우박, 서리, 가뭄과 뒤이은 홍수, 그리고 메뚜기 떼(2월, 윤2월~5월)
3.3. 태풍과 폭우, 그리고 전염병(6월~7월)
3.4. 우역의 발생과 이어지는 냉우, 폭우, 폭풍우
4. 진행
5. 신해년(1671년)
5.1. 지옥도, 아귀도
5.2. 조정 내 상황
6. 2년의 기근, 後


1. 개요

조선 18대 현종 재위 11년, 12년인 1670(경술년) ~1671년(신해년)에 벌어진 2년에 걸친 대기근.[1]

교과과정 한국사에서 제대로 언급되지 않거나 넘어가서 잊혀지는 내용이지만, 실상은 차라리 임진왜란, 병자호란 시기가 더 나았을 것 같았던 참혹함. 조선역사가 500년이고 전근대 사회에서 기근은 흔한 일이긴 했으나,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때의 대기근은 그야말로 대재앙, 대참사라는 단어도 부족할 정도로 끔찍했던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후 조선 역사의 변화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 대사건이다. 일부 사람들은 이 기근을 조선판 흑사병이라 부를 정도다. 재앙의 종류는 다르지만 피해나 끔찍함에서는 흑사병과 비교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을 정도로 참혹했다.

2. 원인

17세기지구의 기온이 1도 정도 떨어지는 소빙하기 기후가 나타난 때였다. (17세기 위기론) 유럽에서는 포도 수확일이 늦어졌고 평균 기온이 떨어졌으며, 알프스 산맥빙하 확산, 운하가 자주 얼었다. 중국에서는 추위로 인해 강남 감귤 농장들이 전멸했으며 천진 운하의 결빙 기간이 늘어났다. 조선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서울 지역 강수량이 가장 많았으며 그외 우박, 벼락, 가뭄, 때 아닌 , 태풍, 지진자연재해가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3. 경술년(1670년)

3.1. 불길한 징조(음력 정월)

불길한 징조는 새해 벽두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1670년 음력 1월 1일 새해 벽두부터 속은 붉고 겉은 푸른 햇무리가 관측되었고, 사흘 뒤엔 달무리가 관측되더니, 1달 내내 햇무리와 달무리가 매일같이 관측되었다. 실제로는 다음날 비가 내리거나 큰 먼지가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매일 관측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심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하늘에 뭔가 다른것이 보이면 큰일이 날 징조로 여겼기에 국왕과 신하들은 크게 놀랐고, 헌부 장령 이관적은 "위망의 모양이고 쇠란의 징조"라고 말했다. 조선을 송두리째 뒤흔든 대재앙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1670년 1월 9일 한 유성평안도 중화땅에 떨어졌다. 1월 10일 한밤중에 서울에서 붉은 색의 유성이 관측되었다. 1월 13일, 21일에도 백색 빛을 내는 유성이 관측되었다. 2월에는 꼬리가 18m나 되는 붉은 색의 대형 유성이 관측되었다. 참고로 유성이 잦고 운석이 떨어지면 엄청난 양의 미립자, 즉 먼지들이 발생해 햇무리, 달무리는 물론이고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는 날이 잦아진다. 해가 보이지 않으니 기온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 다만 이 시기의 소빙하기는 운석의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는 태양의 활동이 약해진 것이 더 영향이 크다.

하늘에서 변고가 나타나더니 이번엔 땅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670년 1월 4일, 5일에 전라도 영암, 영광에서 보름전 대문과 창문이 흔들리는 지진이 있었다고 전라감사가 보고했다. 2월에는 경기도 교동과 통진에서, 경상도 안음[2]거창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5월에는 황해도 풍천, 6월에 경상도 동래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7월에 충청도 대흥에서 지진이 발생했다. 8월 21일, 대기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때 삼남지방(영남, 호남, 충청)에서 상당히 강력한 지진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12월 충청도, 전라도, 평안도에서 지진이 동시 관측되었다.

여기에 자연재해, 전염병, 해충들까지 겹치기 시작했다.

1670년 1월 4일 충청 감사가 보고하길, "전염병이 도내를 돌아 513명이 통증을 호소하고 사망자가 30명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했다. 전라도에서도 598명이 감염되었고 43명의 사망자가 속출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1월에 말이다.

3.2. 우박, 서리, 가뭄과 뒤이은 홍수, 그리고 메뚜기 떼(2월, 윤2월~5월)

2월에 들어 전염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가뭄이 시작되었는데 윤 2월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670년 윤 2월 26일 을 앞둔 이 시점에, 서울에는 아침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정오에 크기만한 우박이 떨어졌다. 이틀 뒤, 경상도에서도 우박이 떨어졌다.

3월에도 비가 오지 않아 새 작물을 파종해야 할 계획은 접어야 할 마당이었고, 우물과 냇가도 마를 지경. 이런 상황에 평안도의 6개 고을에선 서리가 내려 냉해가 예상되기도 했다.

4월에 들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비는 내리지 않고 우박만 떨어지는데다 밤만 되면 서리까지 겹치니, 그야말로 1년 농사는 끝난 거나 다름없는 지경이었다.

5월, 여전히 가뭄이 이어졌으며 우박 세례가 더욱 심해졌다. 평안도 쪽이 피해가 막심했는데, 곡식들은 모조리 결딴났으며 4살짜리 아이가 우박에 맞아 죽고 동물들도 많이 죽었다. 5월 23일에 큰비가 내렸다. 하지만 1년 농사는 이미 끝난 마당인데다, 이번에는 폭우 수준으로 내려 19명이 익사, 압사하고 이 물에 잠겼다. 거기다 전염병까지 창궐해 전국에서 1,400명 이상이 감염되면서 사망자는 계속 늘어났다.

병충해가 이즈음부터 발견되어 보고되기 시작했다. 황군메뚜기 떼[3]였는데 그들이 한번 쓸고가면 뒤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영의정 정태화는 냉해, 가뭄에 이어 병충해까지 등장하자 현재 겪고 있는 재난은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는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그런데 더 큰 것이 몰려오고 있었다.

3.3. 태풍과 폭우, 그리고 전염병(6월~7월)

6월에도 우박 세례는 지속되었다. 6월 중순에 전국에 폭우가 쏟아져 물난리가 났다. 예년과는 다른 차원의 장마전선과 태풍이었다. 원래같으면 한반도 남부만 강타했을 태풍이 그 해에는 한반도 전역을 휩쓸었다.

함경도에선 황충 떼가 급습했다. 천만 마리가 들판을 덮고 닥치는대로 쓸어먹는 바람에 도토리마저 열매를 맺지 못할 정도였다.

7월에도 우박 세례를 포함해 서리와 눈이 내렸다. 추수를 앞둔 작물이 죄다 말라죽었고 함경도 쪽이 특히 피해가 심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비가 올때 날이 개기를 바라는 의미로 지내는 제사인 영제(榮祭)를 지냈음에도, 폭우와 강풍을 동반한 초대형 태풍이 제주도와 경상도 남해안 일대를 휩쓸었다. 제주도가 특히 피해가 엄청났다. 초대형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했는데, 해일로 인해 짠 바닷물이 산과 들로 밀려들어왔고 작물들은 소금물에 절어 말라죽었다. 파도가 어찌나 심했는지, 바닷물이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를 때 숨을 쉬면 짠 소금 맛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농작물은 고사하고 풀뿌리, 나무뿌리 어느 하나 살아있는 게 없었다.

당시 제주도의 전체 인구 4만 2,700명 중에서 안 굶고 있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제주 목사는 급한대로 육지 쪽에 곡물 지원을 요청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겨우 도착한 진휼곡도 얼마 안 가 바닥나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판입니다!!!!"이라고 한 보고에서, 제주 목사의 절박한 심정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것도 물길이 험해서 쉽게 오지 못하자, 제주 목사가 직접 항구까지 나와서 백성들과 함께 배를 기다리다 못해 대성통곡을 할 정도였다.

3.4. 우역의 발생과 이어지는 냉우, 폭우, 폭풍우

를 죽게 하는 우역(牛疫)이라는 역병이 이즈음부터 돌기 시작했는데, 황해도에서 7월 한 달에만 역병으로 죽은 소가 897마리나 되었다. 경기도에선 137마리가 죽었다. 사람들 또한 역병으로 인해 505명이 감염되었고 26명이 죽었다.

8월이 되면서 냉우, 즉 차가운 비까지 더해졌다. 함경도 쪽은 더욱 상황이 나빠졌는데, 냉우와 우박이 번갈아 내리며 물에 빠져 죽거나 우박에 맞아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 물에 잠기고 산삼 싹이 냉해로 말라죽었으며 도토리까지 열리지 않으니,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압록강두만강을 넘어 만주 땅으로 들어가 산삼, 도토리 채취는 물론 담비까지 사냥했다. 물론 이것은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을 야기했고 새로운 외교 문제로 등장했다.

8월 중순에 또다시 폭풍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익사자만 67명에 달했다. 8월 하순, 폭풍우가 또다시 한반도 남부를 강타했다. 어린이가 강풍에 날아가다가 추락해 죽고, 수확기인 목화가 죄다 말라 죽는 등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전라도에선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내리 닷새동안 서리가 내렸고, 8월 1일과 22일엔 냉우가 쏟아져 작물이 침수했다. 거기에 녹색풍(錄塞風) 내지 살곡풍(殺穀風)이라 불리는 동풍이 불어와 들이 말라죽었다.

황해도에선 우역이 크게 번져 8월 한달에만 죽은 소가 도합 1만 6천마리나 되었다.

9월 초, 강원도가 폭풍우에 휩쓸려 물난리가 났다. 황해도에선 우역의 피해가 지속되었고 9월 1달에 8,418마리가 추가적으로 죽었다. 경기도에서도 우역으로 인해 3,500마리가 죽었다.

10월 말에 폭풍우가 또 한차례 전국을 휩쓸었는데, 경상도에선 이듬해 수확해야 할 밀과 보리 씨가 말라버렸다. 경기도에선 우역으로 1,800마리가 추가적으로 죽었다.

11월, 우역으로 2,350마리가 죽음으로서 황해도에선 도합 22,165마리의 소가 죽었다. 대략 전체 농가의 4%가 소를 잃었다고 추정된다고 한다. 이 즈음 전염병의 기세는 수그러들기는 커녕 더욱 거세졌다.

여름에도 눈과 서리가 내릴 정도였던 이 해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고, 거리로 나선 유민들이 얼어죽은 사태가 빈번했다. 유민들은 얼어죽지 않기 위해 남의 옷을 빼앗거나, 심지어 시신의 옷을 벗겨입기도 했다.

4. 진행

1670년 한 해 동안 냉해, 가뭄, 수해, 풍해, 병충해 등 총체적인 자연재해에 시달린 조선은 거의 대부분인 전국 360개 고을이 대흉작이었다. 예전 기근은 한쪽이 기근이면 한쪽은 평년 수준이거나 풍년이었는데, 이 해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전국 8도가 모조리 흉작이었다. 이런 사태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이었다.

굶주리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것은 당연했으며, 그해 4~5월의 냉해로 밀과 보리가 흉작일 때부터 기아자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자기가 살던 곳을 버리고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전국 규모로 먹을것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판국에 누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겠는가? 아사자(굶어죽은 사람)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1670년 7월에 최초로 아사자가 보고되었고, 8월부터 급속도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주로 가장 재해를 심하게 입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보고되었다. 서울에서도 아사자가 보고되었다. 평민이고 양반이고 굶주림 앞에선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기근이 심해지자 조정에선 그 동안 금지되었던 소의 도살을 폐지해야 할지 고민하였다. 농사를 위해서 그동안 소를 도축하는 것을 막아왔지만, 이번에는 워낙 심해서 도저히 도살을 막을 상황이 아니었다. 농사를 짓고 싶어도 못 짓는데[4] 다음 농사를 대비해서 도축을 금지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장의 식량이 더 급하다는 의견이 대세여서 일시적으로 도축 금지령을 폐했다. 하지만 이미 이전부터 소고기를 먹거나 팔아서 식량을 얻기 위해 소를 도축하는 일이 잦았고, 우역으로 죽어 묻은 소를 파내서 먹는 일도 허다했다. 물론 이러다가 전염병에 걸려 죽거나 갑작스런 소고기 섭취로 사망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5]

5. 신해년(1671년)

보리 수확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1671년 봄으로 넘어갔지만, 상황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사자는 더 늘어나 수천명 단위로 보고되었고, 어딜 가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를 메우고 있다고 했으며, 이때부터는 아예 전국 아사자가 1만명씩 집게된다. 참고로 이건 공식 구휼소에서 죽은 사람들만 집계한 수준이다.

전염병 또한 수그러들지 않았는데,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은 오랫동안 굶어서 면역력이 떨어져 쉽게 사망하는데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시키는 매개체가 되었다. 또한 그 이전부터 사람들은 기근으로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에 평시에 비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떨어졌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671년 1월에 정부에서 서울에 진휼소를 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유민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물론, 그에 따라 전염병은 빠르게 서울 경내로 퍼져나갔다.

서울 주민들, 양반, 심지어 궁궐을 지키는 군인까지도 감염자가 발생해 임금 경호에 비상이 걸렸다. 감염되어 밖으로 추방된 궁녀 중엔 사망자도 발생했다. 1월에 임금의 다섯째 누이인 숙경공주까지 마마병에 걸려 사망하니 급기야 2월 2일 임금은 왕대비, 세자와 함께 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전염병의 기세가 다소 꺾인 4월에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궁궐 밖 상황은 달라진게 없었다. 진휼소에 설치된 움막에서 죽어가는 자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사대부들도 감염되어 죽어갔다. 심지어는 왕실 종친들도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이를 피해 서울을 떠나가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로 인해 행정 공백이 상당히 발생했다. 텅 빈 지방관청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역참 또한 정상적으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서울에서 평양까지 보통 같으면 1~2일밖에 걸리지 않으나, 기근과 역병으로 역참이 텅비고 파발이 부족해 5~7일이나 걸렸다. 전라 우수영에서 서울로 공문서를 가지고 오던 사람이 과천 즈음에서 병에 걸리는 바람에 쓰러졌는데, 다른 사람이 교대해서 가지고 왔다. 보통 같으면 7일 정도 걸리는데 이때는 무려 19일이나 걸렸다.

서울을 탈출하기 위해 관리들은 온갖 갖은 핑계를 갖다대며 임금에게 사직서를 제출했고, 임금 또한 그들의 속셈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기에 이를 수락했다. 붙잡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가, 서울을 떠나게 하지 않으니 양반들이 병에 걸리지 않은 멀쩡한 평민의 집을 강제로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영의정 허적조차 14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했다. 다만 현종은 다른 관리는 안 잡아도 허적만은 사직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서울에선 굶어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의 시신들이 날로 쌓여갔다. 일가족이 모두 죽거나 길거리에서 쓰러져 죽은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원래대로라면 한성부의 관원들이 이를 수습해야 하지만, 인원에 비해 시신들이 너무나 많은데다 하급 관원들도 기근으로 인해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승려들을 동원해 시신을 수습했는데, 수천 구의 시신을 서울 밖에 합동 매장한 일이 수차례 있었다. 이 때문에 세월이 지나 도성을 정비하면서 한꺼번에 매장된 사람 해골 수천 기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1670년과 1671년에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5만 2천명이 보고되었고, 이 중 절반에 해당하는 2만 3천명 이상은 사망했다고 보고되었다. 사망자 비율은 전라도가 가장 높았으며(1만 2,500명, 54%) 경상도가 그 뒤를 이었다(4천명, 17%).

5.1. 지옥도, 아귀도

사람이 아무리 이성의 동물이라지만 생존조차도 불가능한 벼랑 끝에 몰리면 천륜도, 인륜도 저버릴 수밖에 없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에 따라 전국에선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현재도 마찬가지일 정도의 비상식적인 패륜적인 사건들이 속속 보고되었다. 부모들이 아이를 도랑이나 강물에 던져버리고 가는 사건들이 일어났다. 아이를 그냥 나무둥치에 묶어놓고 가는건 그래도 마지막 양심은 남아있는 수준.

배식을 받기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서 기다리다가 남편은 결국 쓰러져 죽었는데 아내는 그 옆에 남아있는 을 모조리 긁어먹은 뒤에야 곡을 했다. 어머니를 업고 다니며 구걸하던 아들이 어느 순간 어머니를 버리고 가버렸는데, 어머니는 오랫동안 아들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굶주림 앞에서는 가족이고 인륜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우려하던 서로 잡아먹는 상황, 즉 인육을 먹는 식인 사고까지도 보고되었다. 충청도 깊은 산골에서 한 어머니가 5살 된 딸과 3살 된 아들을 죽여서 그 고기를 먹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같으면 나라 전체가 완전히 뒤집할 만한 엄청난 사건이었으나, 이때는 워낙 흔한 일인지라 별 반응도 없었다. 오히려 승정원에서는 "굶주림이 절박했고 진휼이 허술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조선 정부도 대책을 마련. 진휼소를 열긴 열었으나 모자라는 곡물, 전염병 등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휼소를 억지로 운영할 수도 없는 노릇. 법적으로 기한이 정해진 진휼소를 정부는 예정대로 철수시킨다고 통보했는데, 이에 관리들은 아사자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항의했다. 하지만 결국 5월 15일에 진휼소를 철수시켰고 관리들의 말대로 진휼소에서 주는 죽조차 못 먹은 자들이 굶어죽는 상황이 크게 늘어났다. 물론 식량 자체가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진휼소를 무작정 연다고 해서 대량 아사 사태를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5.2. 조정 내 상황

'이런 마당에 오직 정쟁[6]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인식이 있으며, 사실 예송논쟁이 벌어진 시기에도 경신대기근만큼은 아니지만 여러가지로 나라 꼴이 말이 아니긴 했다. 딴에 집권한 서인들은 왕실에서 사치로 판단될 만한 행사들을 비판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자구책을 내놓거나, 척신 세력과 함께 상대 당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왕궁까지 전염병이 번져서 대피하는 소동도 있었던 때이며, 전근대 시기의 대기근은 그 특성상 누가 집권해도 비극을 막을 수 없는 게 현실이었으며, 조선 정도의 행정력이 있었기에 국가 붕괴의 위기를 그나마 넘긴 것이다. 물론 이전 세금을 너무 적게 거두는 등 사전에 쌓아놓은 게 없어 피해가 커진 책임은 부정할 수 없으나, 최소한 일이 터지고 나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일본텐메이 대기근 시기 봉기 급증만 보아도 조선의 처리는 우수한 편이었다.

이 대기근 기간 동안 재상급 인사들마저 10여 명씩 죽어나갔다. 대표적으로 당시 병조판서 김좌명을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대동법 확립에 큰 공을 세운 김육의 장남이며 그의 동생이 바로 숙종의 외할아버지 김우명이다. 이런 정치명문가의 인물이 죽었을 정도면,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김좌명의 후임으로 병조판서가 된 서필원도 몇 달 후에 목숨을 잃었다. 즉, 피해가 덜한 지배층까지도 팍팍 죽어나가는 진정한 대위기였던 것. 지배층이 이 지경인데 민생 수준은 어떠했겠는가. 지배층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대기근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지배층이 아무리 대책을 세우려 해도 워낙 답이 안 나오니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었던 것이다.

1671년도 저물어가는 12월, 윤경교가 "이때까지의 사망자가 100만 명을 상회합니다."라고 보고한 것이었다. 물론, 추정치가 100만이란 것이고, 실제 구휼소에서 기근으로 죽었다고 판정한 인원은 8만 5천이다. 평소 조선의 기근에서 죽는 인원이 3천명 내외라는걸 생각하면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지방 수령들이 근무 성적 때문에 축소 보고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므로, 보통 작게 잡으면 20~30만, 크게 잡으면 구휼소 사망자의 5~10배인 40~85만명 정도로 본다.

1669년 기준으로 조선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516만 명, 추산되기로는 최대 1,500~1,600만 내외로 일본의 3분의 2 정도였다.[7] 즉, 2년간의 대기근으로 인구의 절대 다수가 기아를 체험했고 그 중에 최소한 1.5%. 많게는 5% 가까이 죽어나간 것. 가히 현세에 도래한 지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당시 노인들 중에선 임진년 병란도 이것보다 참혹하지는 않았다란 말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1671년 여름 아사자가 최고도에 달했을 때,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나라의 수입할 것을 현종에게 건의했는데, 당시 조정은 운송과 후환을 두려워해 반대했다. 그해 말 기아를 구제하기 위한 정부의 미축미가 바닥나자 현종이 청나라 쌀 수입건을 다시 꺼냈는데, 신하들은 국가의 위신이 훼손된다고 반대를 했다. 명분에 집착하는 신하들에게 현종은 "이곳의 사세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으나 신하들은 그 조차도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정묘호란병자호란으로 더럽게 많이 수탈당하고 비록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서로간에 악감정이 엄청나던 상황에서, 과연 청나라를 믿고 곡식을 들일 수 있을 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강희제도 조선의 사정을 듣고는 "군약신강이 문제니 왕권을 강화하라"고 대놓고 비난할 정도로, 청나라도 조선에 대한 시각이 별로 좋지는 않았으니. 게다가 요동도 기근에 시달렸으며, 20년 뒤 벌어진 또 다른 대기근의 실상을 보면, 들여온다고 해도 대량 아사 사태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당장 텐메이 대기근만 해도 6년간 지속된 기근의 인명 피해가 2년간 지속된 조선과 비슷했던 것은, 일본이 평소 쌓아둔 게 많아서였을 뿐, 대책을 세우는 면에서는 오히려 조선보다 더 형편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애초에 좀 쌓아놓지라는 생각도 할만하지만.[8]

6. 2년의 기근, 後

경신대기근은 대동법에 대한 지지 여론을 높여주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이때까지 대동법은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 호남 연해[9]에서 시행되었고 호남 내륙 일대의 시행을 논하던 시점이였는데, 경신대기근 이후 대기근에서 그나마 백성들이 살아남은 건, 대동법으로 부담이 완화되었기 때문이란 인식이 지방 산림들에게서 퍼지면서 대동법이 더더욱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실제로 충청도의 경우, 그때까지 결당 10두였던 세금을 12두로 높이는 한이 있어도 대동법을 계속 시행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올 지경이였다고.

불운하게도 대기근은 이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경신대기근이 끝난지 24년 뒤, 갑술환국 다음 해인 1695년(숙종 21년)에 또다시 2년에 걸친 대기근인 을병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이때도 사망자 숫자는 기록상 경신대기근 때에 못지 않았다. 이 때는 그나마 청나라에서 쌀을 들여오자는 논의가 수용되어 3만 석의 쌀이 들어왔지만, 기근을 막지는 못했다.

이러한 대기근을 겪은 후, 당연하게도 조선 내부에는 체제에 대한 불만 세력이 많이 생겼다. 이건 체제가 노력을 하건 안 하건, 당시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건 아니건 불가피한 현상으로, 숙종 때는 흔히 알려진 장길산이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비기, 도참, 미륵 신앙 등이 흥성했다. 이에 조선 정부도 호패법을 강화하고 오가작통제를 본격적으로 행정에 활용하면서 유민의 통제에 나서게 된다.

17세기 말의 대기근을 거치면서 발생한 다수의 유민들은 비교적 미개척지였던 북방과 만주로 많이 향했다. 여기에 인삼[10] 등을 찾아 북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면서, 폐4군의 개발 논의가 활발해지는 한편 청나라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는데, 본의 아니게 이것이 간도 문제를 촉발하게 된다.

경신대기근에 의해 직접적으로 유발되었다고 보기까지는 어렵지만, 대기근은 17세기 후반 조선의 변화를 일정 부분 가속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양반의 경제력이 기근으로 감퇴하면서 농장의 해체 경향이 나타나고, 노비제도 이에 힘입어 해체 국면에 들어간다. 조선의 역량이 서울로 특히 집중되는 경향 분기 현상도, 대기근 당시에 구휼 체계가 그나마 마지막까지 작동할 수 있었던 서울로 사람들이 몰리면서 일어났다는 분석이 있다. 이 기근을 계기로 지방민들이 서울의 외곽지역이었던 성저십리로 모여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한편 당시 조선의 기근에 대해 '조선의 구휼 체제가 열등해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으나, 전술했듯이 조선의 구휼책은 충분히 체계적이고 전국적으로 시행된 편이다. 물론 유교적 검약 사상에 의거해 세율이 낮은 탓에 비축된 재정이 적었고 그로 인해 구휼 재정이 금방 바닥났다는 것은 문제라고 볼 수 있긴 하지만, 최소한 당시 조정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텐메이 대기근 같은 에도시대 4대 기근 당시 막부의 구휼책이나 잉글랜드자유방임주의에 의거해 구휼 자체를 놓아버린 아일랜드 대기근에 비교해도 후진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11]

사실 전근대의 기근은 언제 어디서나 기후의 악화와 재해 등에 의해 발생하여, 통치자들이 어떤 노력을 하건 간에 큰 피해를 입히고는 끝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걸로 조선을 비판하는 건 무리수. 조선의 지배층이 비판할 거리가 많긴 하지만, 적어도 이 시기의 조선 통치계층은 대기근을 극복하고자 노력을 할 만큼 했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참사를 막기에는 전근대적인 사회 및 경제 체제&기술적 한계가 명백하여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리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떠한 국가라도 위와 같이 정말 엄청난 재난(지진, 냉해, 가뭄, 홍수, 우박, 태풍, 전염병, 해충)이 한꺼번에 닥치는 상황에서도 대처를 완벽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나마 21세기에는 선진국을 중심으로 기아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많이 낮아진 건 식량의 장기보관 기술, 운반 기술 등이 많이 발달하여 1~2년의 기근으로는 최악의 사태에 이를 가능성이 낮아졌기 때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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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0년 뒤인 숙종 때인 경신년(庚申年, 1680년)에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한자가 다르다. 유의하자.
  • [2] 현재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 [3] 당시엔 황충(蝗蟲)이라 불렀다. 아니, 메뚜기보다 더 질긴 것이 황충이다. 이른바 누리 떼.
  • [4] 취소선을 긋긴 했지만 장난이 아니다. 조선시대를 넘어서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악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 [5] 극심한 굶주림 이후에 함부로 음식을 먹을 경우 소화를 못하고 사망한다. 기록에도 "흉년에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할 때, 쇠약해진 몸이 소화할 수 있는 묽은 죽과 같은 음식부터 주라"고 되어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9부 강제수용소 해방 장면을 보면 유사한 상황이 나온다.
  • [6] 1차 예송논쟁은 10년 전인 59년, 2차 예송은 현종 말년인 74년에 발생했다.
  • [7] 호적에 등록된 인구보다 양반의 외거노비, 머슴으로 들어간 인구나 유랑민이 상당했다.
  • [8] 이것은 조선이 성리학적 근검정신에 입각해 정부를 작게 운영했기 떄문이다. 정치 도덕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
  • [9] 경상도, 평안도는 각각 사신 문제로 논외였고 함경도는 아예 거두질 않았다.
  • [10] 모피와 그것으로 만든 방한용 모자는 조선 후기 조선이 청나라에서부터 수입한 대표적인 물품이었다. 개간이 활발해지면서 모피를 얻을 만한 야생동물이 줄었을 뿐더러, 소빙하기로 날씨가 추워졌기 때문. 한편으로 17세기 후반 쯤에는 주변국의 수요 상승, 조선 내의 자연삼 고갈 등으로 조선 내에서 인삼을 찾기 힘들어졌고, 만주로 향하는 발걸음이 18세기 재배삼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 [11] 참고로 텐메이 대기근 때의 사망자가 대략 90만명으로 추산된다. 조선으로 치면 4~50만의 인구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조선의 효과적인 구휼책을 감안하면 50만 이상의 사망자는 쉽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