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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last modified: 2015-03-30 00:33:14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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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명칭과 관련하여
3. 나라가 망하기까지의 과정
4. 한일병합조약 전문
5. 기타
6. 합방 전후 일본의 움직임
6.1. 행정
6.2. 구 대한제국 황실

1. 개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
庚戌國恥

경술년에 일어난 국가의 치욕.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이라는 이름의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사건.

1910년 8월 29일에 일어난 국치로, 한국 최대의 흑역사. 말 그대로 흑역사인 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역사상에서 사라졌었다. 일제강점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기도 하다. 두번째 흑역사는 당연히 삼전도의 굴욕이다. 인조가 청태종에게 신하의 예인 삼배구궤두를 행해야 했던 그때가 조선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였지만 경술국치 덕에 최악의 자리는 넘겨줬다. 어쨌거나 둘다 지독한 흑역사다.

때문에 한중합방이나 한미합방 처럼 다른나라와 한국이 합쳐지는 가상 시나리오를 재미삼에 예측해 보는 한국인들은 간혹 있으나, 일본과의 합방을 가상 시나리오로 다루는 한국인은 별로 없으며, 오히려 이런 시나리오를 짜는 것 자체를 금기시 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가 참담했을 뿐 아니라 경술국치 이후 일본이 저지른 각종 병크한민족의 민족성 자체를 말살할려고 했던 역사 때문에 강한 반감이 형성됨으로써 가상으로라도 일본과 다시 합쳐지는것 자체를 혐오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 명칭과 관련하여

한국에서는 국권피탈, 한일합방, 한일합병, 경술국치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일한병합(日韓倂合)이라고 부른다. 원래 일본은 '병탄(倂呑)'이란 말을 쓸까도 했지만, 힘이 센 한 쪽이 다른 쪽을 아울러 버린다는 의미가 조선인의 반발을 사서 저항을 불러 일으킬까봐 '병합'이란 신조어를 만들어 침략의미를 흐린 것.# 현재 국어사전에는 병합=합병≒합방이라고 되어 있다. 합병은 둘 이상의 단체, 조직, 국가를 합치는 것, 합방은 둘 이상의 국가를 합치는 것.

이걸 한국에서 '합방'이라는,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는 의미를 가진 말로 바꿔서 부르는 건 정신승리법에 버금가는 자기위안일 뿐 아니라 한국이 일본과 합치는 것을 원했다는 의미까지 가질 수 있지만, 별로 신경쓰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일본은 한국을 동등한 관계로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으니 그냥 국치로 쓰는게 맞다. [1] 조약의 공식 명칭은 일본의 이러한 의지가 반영되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国併合ニ関スル条約)이다.

3. 나라가 망하기까지의 과정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하에 일본조선간에 조인된 이 조약이 1주일이 경과된 이날 공표됨에 따라 순종의 조칙이 발표되어 8월 29일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나는 8.15광복까지 선 총독부의 식민지배 아래 35년간[2] 한국인일본인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이때 조선에서 협조한 개새끼들의 명단은 경술국적 항목을 참고.

그래도 마지막 충신은 있어서, 학부대신 이용직은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면서 뛰쳐나갔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용직이 나가기 전 나는 일당처럼 길거리에서 칼에 찔리고 싶지는 않다라며 어느 견공자제분을 디스하였다.

사실 총리대신이었던 이완용 자체는 초기엔 일진회의 "자발적 병합" 주장을 반대했다. 마지막 양심일까 아니면 총리를 더 하고 싶어서일까 그런데 금방 바꿔서는 자기 스스로 나라를 말아먹으며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이어 자랑스런 삼관왕을 이룩했다. 그리고 일진회의 주장에 비해 더 가혹한 조약이 맺어졌다. 그리고 이완용을 비롯한 일진회는 일제가 주는 오등작을 받았다.

하긴 이완용이 반대했어도 이미 마지막 이자 초대 총독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계획서를 가지고 입국했으니 막을 수도 없었다.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이미 정해져있던 것...[3]

일본근대사(혹은 현대사)에서는 이 시점이 러일전쟁과 함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으로 본다. (청일전쟁대만은 결정적인 시작은 아니니까) 결국 국가 막장 테크의 일반적 이론처럼 무리한 조선의 식민지배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만주를 넘보다가 만주국을 세우고(만주사변), 중국마저 넘보다가 중일전쟁을 일으켜 결국 핵폭탄두방 맞고서야 끝나게 되는 시초가 되었다는 시각. 이 점에서 경술국치는 일본 제국주의의 신호탄이자 동시에 필연적인 멸망을 부르는 시발점이었다고 볼 수 있다.

4. 한일병합조약 전문

한일병합조약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 황제 폐하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합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 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사내정의(寺內正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락한다.
  •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의 조항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손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은사금의 줄임말)을 준다.

  • 일본국 정부는 앞에 지적된 병합의 결과 전 한국의 통치를 담당하며 이 땅에서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변과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 일본국 정부는 성의있게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을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두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5. 기타

일본에서도 안중근의 의거가 워낙 유명한 고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합병 반대파였으며 안중근의 의거 때문에 조선이 합병을 자초하였다는 의견이 매우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3개월 전인 1909년 7월이미 조선의 합병을 의결한 상태였다.

주러 공사로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헤이그 특사 중 한 명인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국권피탈의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 그 외에도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등 많은 선비들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 때와는 달리 현직 고위 관료 중 자결한 이는 없었다.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 # 이는 이미 을사조약, 군대해산, 고종퇴위 등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다들 체념한 상황이란 분석이 있다. 을사조약 체결 시에는 온 나라가 뒤집혔고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는 유생들의 기록이 있다.

2010년은 이 흑역사가 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물론 짧은 기간은 아니지만,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면 항상 기억해두며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상당수는 이미 잊었다...아니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이들도 있다. 중학생들 중 한일합방의 흑역사를 모르는 학생들이 한 반에 1/3이 넘는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게다가 성인들 중에서도 이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이 늘어나는 모양이다. 캐리어 가야합니다

여담이지만 2009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은 2010년 경술국치 100년 기념으로 일본의 덴노를 국내에 초대한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아 리그베다 위키에서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덴노라고 쓰지만 정부에서 일본의 임금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천황이 맞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에서 천황으로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이전 문서에도 그렇고 일부 사람들이 '기념'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잘못이라고 하는데, 사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기념은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닌 뜻깊은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라는 긍정이나 부정 어느 한 쪽에 치우지지 않은 단어이다. 당장 전쟁기념관이나 6.25전쟁 OO주년 기념식같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당연한 거지만 긍정적인 일 등에 쓰이는 비율이 압도적이라 착각하는 사항.
2012년이 대통령 독도 방문일왕 사과 발언을 해서 한일관계가 최악이 된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이 든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경술국치가 일어난 날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를 찍은 사진이라고 알고 있다. 한 때 본 항목에도 그러한 설명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이 사진은 경술국치 때 찍힌 사진이 아니다#. 링크 된 글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 사진은 1915년 10월 1일 조선물산공진회의 개막식날 행사용으로 섭외한 비행기를 담은 사진이다. 동아일보가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란 책을 내면서 이 사진을 경술국치 때의 사진이라고 소개하고 또 그 뒤로 비행기가 찍힌 부분을 잘라낸 사진이 여기저기 실리면서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6. 합방 전후 일본의 움직임

6.1. 행정

일본은 1909년 7월의 각의에서 조선 병합을 방침으로 잡은 이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선 건강상으로 골골거리던 통감 소레 아라스케를 경질하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했으며 부통감직을 신설하여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임명했다. 이들이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조선을 통치할 엘리트 관료들의 모집이었다. 한일합방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조선의 주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얻는 일본은 즉각 조선의 관청과 통감부 조직들을 개편하여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이 흡수, 통합, 폐지되었고 1434명의 직원들이 해고되었다. 조선인 고등관들은 모조리 해고되었고 각 도관찰사들도 6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당연히 빈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이 중엔 전 대만총독인 고마다 겐타로 밑에서 대만 통치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의 실무경력도 경력이었지만 고마다가 데라우치와 동향 사람이라 같은 파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후일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무능하단 이유로 내쫓긴 인물들로 인맥, 지연, 학연을 통해 등용된 무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조선의 개발을 위해 감찰관으로 내무성 지방국장 고바시 이치타를 파견했는데 그는 일본인 도장관들이 지극히 무능하고 상당수가 대장성 출신이라 이들 밑에선 조선이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 혹평했다. 겨우 남은 조선인 장관들도 실질적으론 허수아비라서 밑의 내무부장, 재무부장이 모든 일을 담당했고 이에 괜히 조선인 장관들의 기분만 상할 판이니 조선인 도장관을 전폐하잔 주장이 제기되었다.

6.2. 구 대한제국 황실

대한제국 황실은 일본 황실의 일부로 편입되어 상당한 대우를 받았고 기존 지배층들도 조선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 순종을 이용했는데 특히 순종을 매우 이용하여 순종은 조선 역대 국왕 중에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 1917년의 함흥 순행은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는 순종을 거의 억지로 끌어내렸다. 일단 일국의 황제에서 일본의 제후로 강등된 대한제국 황실이었지만 일본은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황제 대접을 해주었고 경성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되는 일이었지만 총독부는 이를 눈감아주었다. 또한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에만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다. 또한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 생활을 제공했고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물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1917년 함흥 순행도 눈여겨볼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 의례를 지내는 순종도 황제의 복식을 갖추었다. 일본군함을 타고 도쿄까지 행행한 것은 여러모로 조선에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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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니면 강제병합이라고 하던지.. 강제로 병합시킨거니까.
  • [2] 흔히 알려진 36년은 햇수만을 계산한 것이고, 실제로는 만 35년에서 정확히 1주일 부족하다.
  • [3] 물론 메이지 유신 초기만 해도 정한론은 반대론이나 시기상조 소리를 들었으며, 1880년대만 해도 보호국 수준의 지배가 대세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조선 식민지배가 필연이 아니었다는 해석은 타당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러일 전쟁 이후로는 조선은 식민지배가 확정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