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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틴트너

last modified: 2015-06-03 04:11:25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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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은 게오르크 베른하르트 틴트너(Georg Bernhard Tintner),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1917.5.22~1999.10.2

Contents

1. 생애
2. 수상 경력
3. 활동상과 사생활
4. 작곡 활동
5. 음반


1. 생애

빈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소년 합창단 단원으로 음악 수업과 활동을 시작했다. 아직 합창단에 있던 열 살 때 작곡을 시작해 몇 곡의 합창곡을 남겼고, 1931년에 변성기가 되어 퇴단한 뒤에는 빈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해 요제프 마르크스에게 작곡을 전공했다. 1935년에 졸업한 뒤에는 당시 지휘계의 본좌 중 한 사람이었던 릭스 바인가르트너에게 지휘를 배웠고, 이듬해 부터는 빈 국민오페라단(Volksoper)의 부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38년에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 전역을 병합하게 되자, 유대인이었던 틴트너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정책으로 모든 일자리를 잃고 자동적으로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결국 병합 직후 게슈타포의 체포를 피해 유고슬라비아영국,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뉴질랜드에 정착했다. 하지만 모국인 오스트리아가 소멸된 탓에 무국적자로 간주되었고, 이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독일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뉴질랜드의 오클랜드에 정착한 뒤로는 동네 교회 성가대 지휘나 양계장 운영 등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고, 애초에 뉴질랜드라는 나라 자체가 클래식 수준이 그리 높은 동네가 아니라서 듣보잡 신세가 계속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이끌고 있던 아마추어 현악 합주단인 오클랜드 스트링 플레이어즈와 쇤베르크의 '정화된 밤' 을 연주해 오스트레일리아 작곡가인 알프레드 힐에게 호평을 받기도 했다.

1954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거처를 옮겼고, 사설 오페라단인 오스트레일리아 내셔널 오페라단의 전임 지휘자를 거쳐 1957년 시드니의 오스트레일리아 엘리자베스 극장 재단의 오페라단 지휘자로 부임했다. 여기서는 일반 공연 외에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텔레비전 오페라 중계에 참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64년에는 뉴질랜드 오페라의 음악 감독에 부임했고, 이듬해에는 지휘자 처드 보닝의 사설 오페라단인 서덜랜드-윌리엄슨 그랜드 오페라의 오스트레일리아 투어에 제2프롬터[1]로 기용되었다.[2]

1966년에는 피아니스트 헵지바 메뉴인의 주선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시립 관현악단에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때문에 한 시즌만 지휘하고 이듬해 사임했다. 사임 직후 영국으로 건너가 새들러즈 웰스 오페라단(현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단)에서 지휘를 맡았고, 이듬해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유디 메뉴인과 피아니스트 데니스 매튜스의 주선으로 BBC에서 런던 모차르트 플레이어스와 런던 교향악단의 방송 녹음을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들러즈 웰스와 계약이 만료되자 런던 활동에 회의를 느꼈는 지, 1970년에 다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갔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온 뒤에는 1971년에 퍼스를 거점으로 하는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해 1974년까지 재임했다. 이 기간 동안 캐나다 국립 청소년 관현악단의 객원 지휘자로도 활동하기 시작했고, 퍼스에서 임기를 마친 후에는 엘리자베스 극장 재단 오페라단을 개편한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임 지휘자로 부임했지만, 예술적 노선을 둘러싼 분란으로 조기 퇴임하고 1976년에 퀸즐랜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전임 지휘자가 되었다.

1987년에는 퀸즐랜드 필의 직위를 사임한 뒤 캐나다 동부의 핼리팩스로 이주했고, 창단된 지 4년 남짓 되었던 소규모 관현악단인 심포니 노바 스코샤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동시에 캐나다 국립 청소년 관현악단의 지휘자로도 계속 활동했고, 미국 디트로이트의 미시건 오페라단이나 캐나디언 브라스 등의 공연에서도 객원으로 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그 시점까지도 이 노장 지휘자는 여전히 주류 음악계 쪽에서 아오안이었는데, 1994년에 홍콩에서 홍콩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했을 때 아내인 타냐가 동향인인 낙소스 사장 클라우스 하이만을 소개했다. 틴트너는 그리 내키지 않아 했지만, 아내와 하이만의 끈질긴 설득 끝에 브루크너교향곡미사 등 종교음악 작품의 전집을 녹음한다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낙소스의 녹음 작업은 1995년 뉴질랜드 교향악단 연주로 녹음한 6번으로 시작되었고, 1998년 00번까지 교향곡 전곡(총 11곡)의 녹음이 완료되었다. 이들 녹음은 곧 CD로 제작되어 시장에 풀렸고, '싼 게 비지떡' 이라고 낙소스 음반들을 디스하던 애호가들까지 충공깽으로 몰아갈 만큼의 고퀄로 화제가 되었다.

이 낙소스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의 성공으로 틴트너는 늦게나마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바그너르지팔을 공연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 중이었고, 스위스의 베른 교향악단과 일본의 요미우리 일본 교향악단도 객원 지휘를 의뢰해 왔다. 낙소스에서도 브루크너 종교음악의 녹음까지 다 끝마친 뒤 추가 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틴트너의 건강은 1993년에 발병한 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으로 인해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고, 몇 차례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상태는 계속 악화되었다. 말년에는 뇌와 척추의 신경 손상으로 이어져 방향 감각까지 잃게 되었고, 진통제로 계속 투여된 모르핀의 부작용도 심해져 1999년 10월 자기가 살고 있던 캐나다 핼리팩스의 아파트 11층 베란다에서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2. 수상 경력

  • 캐나다 댈하우지 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 (1989)
  • 캐나다 핼리팩스 시 예술 부문 우수공로상 (1990)
  • 오스트리아 공로훈장 대상 (1993)
  • 빈 시 명예훈장 은장 (1994)
  • 캐나다 훈장 멤버 (3급. 1998)

3. 활동상과 사생활

나치 치하의 유럽에서 다행히 망명지를 찾아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지만, 하필이면 망명지로 택한 곳이 그 당시로는 완전히 깡촌 취급을 받고 있었던 뉴질랜드였다는 점이 문제였다. 물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받아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야 했겠지만, 신예 음악인에게는 여건이 좋다고는 볼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틴트너 자신도 명예나 부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고 하는데,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계속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남아공 같은 곳을 활동지로 삼았던 것을 보면 그냥 자신의 처지와 주어진 직책 안에서 충실히 활동하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여겨진다. 물론 나름대로 자기 주관이 있던 예술가여서 그랬는지, 오페라 오스트레일리아 시절에는 행정 부서가 예술적 측면에 배려를 안해준다면서 대판 싸우고 때려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성격은 전반적으로 온화했다고 하며, 연습 때도 단원들을 윽박지르거나 거칠게 다룬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지휘할 때도 지휘봉을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만 지휘했고, 단원들에게 엄격한 규율 보다는 자발성을 갖고 연주해줄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음악 교육이나 강좌에도 열성을 보여 청소년 관현악단을 지휘할 때 큰 보람을 느꼈다고 하며, 공연 전 자신이 직접 해설을 맡는 '렉처 콘서트(Lecture Concert)' 로도 유명했다.[3]

주로 다룬 작품은 고전에서 후기 낭만에 이르는 독일/오스트리아계 레퍼토리들이었지만,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캐나다의 근현대 작곡가들의 작품도 많이 다루었다. 오페라단 지휘 경력이 길었던 만큼 오페라 레퍼토리도 50편 이상 취급했고, 그 중 두세 작품은 악보 없이 외워서 지휘할 수도 있었다고 한다. 빈에서 태어나고 배운 음악인이라 그런지 대체로 중후하고 온화한 올드비 스타일의 음악을 뽑아내기로 유명했고, 하이만이 그 점을 제대로 간파해 계약한 것이 만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데 큰 몫을 했다.

다만 학구적이었던 바인가르트너의 제자이기도 했고 자신이 작곡도 했기 때문인지, 선배 지휘자들이 자주 행했던 작품에 대한 자유로운 첨삭 행위를 엄격하게 배제하면서 악보 본위에 충실한 연주를 지향했다. 고전 작품 연주에서는 도돌이표 반복도 가능한한 충실하게 지켰고, 바이올린 그룹들을 지휘자 양 옆에 놓는 구식 악기 배치법을 고수했다.[4]

결혼 생활은 그리 평탄치 않았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 처음 도착했다가 체포되었을 때 신원 보증을 해준 여성과 처음 결혼했다가 거기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즈음이었던 1950년대 중반에 이혼했다. 이어 퍼스의 웨스트 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단에서 재임하던 당시 부속 관현악단의 여성 첼리스트와 두 번째로 결혼했지만, 이 결혼도 상당히 짧게 끝나버렸다.

세 번째로 독일 출신의 음악비평가이자 음악행정가였던 타냐 부흐달과 결혼하고서야 안정적인 가정 생활을 누리게 되었는데, 이전 배우자들과 달리 틴트너의 엄격한 채식주의 식습관[5]을 비롯한 극히 검소한 초식남 스타일의 생활 습관[6]을 잘 이해해준 것이 좋은 부부금슬에 도움이 되었다는 듯 하다.

타냐는 남편과 사별한 뒤에도 틴트너의 자필 악보와 녹음을 비롯한 유산을 관리하고 있고, 음반의 라이너 노트를 작성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4. 작곡 활동

생전에 틴트너는 주로 지휘자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초기 경력에서 보이듯 작곡 활동도 경력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해외로 망명할 때 뉴비 시절 작곡한 작품들의 자필보 대부분을 챙겨갔기 때문에 많은 수의 작품들이 살아남았고, 망명 후에도 1962년까지는 계속 지휘 활동 사이사이 작곡을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무슨 이유인지 창작 활동을 아예 접고 지휘에만 열중했고, 출판된 곡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 틴트너 사후인 2005년에 미망인 타냐의 승인을 얻어 피아노곡 몇 곡과 바이올린 소나타가 낙소스에서 세계 최초로 녹음되어 2년 뒤에 CD로 발매되었는데, 일반 대중들에게 작곡가 틴트너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보여주어 화제가 되었다. 비교적 중후한 지휘 스타일에 비해 작품들의 대부분은 오히려 당시 서유럽에 충공깽을 안겨줬던 러시아크랴빈을 비롯한 근대 작곡가들의 악풍을 받아들인 진보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주요 작품 목록
  • 피아노곡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 (1934)
  • 피아노 소나타 F단조 (단악장. 1930년대 중반 추정)
  • 피아노곡 '친구의 죽음을 접하고(Auf den Tod eines Freundes)' (1930년대 중반 추정)
  • 피아노곡 '전주곡-동경(Vorspiel-Sehnsucht)' (1936)
  • 피아노곡 '두 개의 푸가' G장조/C단조 (1939)
  • 피아노곡 '장송곡(Trauermusik)' (1939-41. 1958년 관현악용으로 편곡)
  • 바이올린 소나타 (1941-1944)
  • 현악 4중주와 소프라노 독창을 위한 '타원(Ellipse)' (1959)

이외에 오페라 등의 작곡도 시도되었지만, 만족하지 못하고 스케치를 파기 또는 철회했다고 한다.

5. 음반

틴트너는 낙소스와 계약하기 전에도 몇 종류의 음반을 낸 바 있었다. 1982년에는 캐나다 국립 청소년 관현악단을 지휘해 브루크너의 8번 교향곡 미개정 초판을 북미 지역에서 초연한 실황이 쥬발(Jubal)이라는 소규모 음반사에서 LP로 나왔었고, 1989년에는 베토벤5번 교향곡과 웰링턴의 승리, 극음악 '에그몬트' 서곡을 금관 합주용으로 편곡해 캐나디언 브라스+뉴욕 필하모닉보스턴 교향악단의 금관 주자들을 이끌고 녹음한 LP와 CD가 필립스에서 출반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94년에 오이로디스크(Eurodisc)에서 나온 체코 즐린의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브루크너의 교향곡 6번이라던가 오스트레일리아 방송 협회(ABC), 캐나다 방송 협회(CBC) 등에서 나온 이런저런 앨범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별 인기나 주목을 받지 못하고 폐반 혹은 절판되고 말았다. 후새드.

그나마 낙소스랑 낸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에서 대박을 친게 다행이었는데, 초기 작품들인 1번, 2번, 3번과 8번에서는 그 당시 그리 잘 쓰이지는 않았던 미개정 초판본을 사용해 녹음한 것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물론 연주는 가격 대 성능비 같은거 안따져도 수준급이라고 하지만, 녹음에 기용된 관현악단들이 최상급은 아닌 탓에 브루크너 특유의 묵직하고 풍성한 파이프오르간 스타일 소리가 아쉽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낙소스에서는 틴트너가 브루크너의 나머지 작품들에 손을 못대고 세상을 뜬 게 아쉬워서였는지, 2004년에 캐나다 방송 협회가 차곡차곡 녹음해 놓았던 심포니 노바 스코샤의 연주회 실황과 스튜디오 녹음들을 추려내 열 장의 추모 선집(Tintner Memorial Edition)을 내놓았다. 일곱 장은 처음으로 음반화된 실황 녹음들이었고, 나머지 세 장은 캐나다 방송 협회가 자체 음반사를 통해 내놓은 음반들을 재발매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온 앨범들은 당초 예정했던 열두 장에서 두 장 못미치는 상태였는데, 원래 선집의 8집과 9집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던 캐나다 국립 청소년 관현악단의 실황은 녹음 테이프의 보존 상태가 영 좋지 않아서 더 좋은 음질의 음원이 발견될 때까지 발매가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다가 2010년 12월에 인터넷 스트리밍/다운로드 전용으로 나머지 음원들이 발매되었고, CD 수록 시간 기준으로 총 13장 분량의 완전한 선집 발매가 이루어졌다.

미발매였던 음원들이 뒤늦게나마 선보여진 것은 좋은 소식이었지만, 음반사 측에서 그 이상의 좋은 녹음 테이프를 찾지 못했는지 음질은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틴트너가 실내 관현악단 수준의 아담한 심포니 노바 스코샤로는 연주하기 거의 불가능한 말러의 교향곡 1번이나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같은 대규모 곡을 지휘한 녹음은 이게 전부나 마찬가지라서, 레어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한 상태다. 한국에서는 2011년 1월 말부터 클래식 사이트인 '고클래식' 에서 낙소스와 계약해 장당 5000원 대의 유료 다운로드 음원(WAV 포맷)으로 판매 중이다.

그리고 2015년 2월에는 영국의 복각 전문 음반사 테스타먼트에서 1969년 9월 21일에 런던 교향악단과 BBC에서 방송용으로 녹음했던 브루크너의 교향곡 5번이 처음으로 음반화되었다. 틴트너의 음반들은 그 동안 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악단들과의 녹음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악단과 녹음한 음원으로서 첫 공개라 관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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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무대 앞의 조그마한 프롬터 박스에서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악보나 대본을 넘겨보면서 가수가 노랫말을 잊어먹을 경우 슬쩍 불러주는 역할.
  • [2] 틴트너의 미망인 타냐의 증언에 따르면, 이 때 보닝은 틴트너를 젖뉴비로 여겨 상당히 모질게 대했다고 한다.
  • [3] 낙소스에서 나온 브루크너 교향곡 전집의 라이너 노트도 자신이 직접 썼고, 사후 나온 추모 선집에서도 공연 전에 행해진 틴트너의 해설이 같이 수록된 경우가 많다.
  • [4] 이 때문에 낙소스 음반들의 속지에는 '지휘자의 의향에 따라 바이올린이 왼쪽과 오른쪽에 배치되었음' 이라는 안내문이 실려 있다. 헤드폰이나 이어폰으로 들어보면 다른 악기 배치법과 확실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 [5] 뉴질랜드에서 양계장을 하던 때 닭을 잡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오스트레일리아로 거점을 옮기자마자 모든 동물성 음식과 제품을 기피하는 비건(Vegan)이 되었다고 한다.
  • [6] 타냐는 어느 인터뷰에서 틴트너의 집에 처음 찾아갔을 때, 그랜드 피아노 빼고는 허름한 옷 몇 벌과 삐걱대는 중고 가구 몇 개, 자전거 한 대가 놓여 있는게 전부였을 정도로 살풍경이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