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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

last modified: 2016-09-15 15:57:19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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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공군력에 의존하고 있는데, 전쟁사를 통해 볼 때 공군이 결정적인 전력이 된 경우는 없었다"
- 사담 후세인, 1990.[1]

이 발언 직후, 이라크와 후세인은 현대전에서 공군력의 역할이 얼마나 엄청난가를 몸으로 체험했다. 엄밀히 말하면 공군은 2차 세계대전 이래로 결정적인 전력 요소중 하나였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공군력의 우위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이너스 요인이 너무 많아 한국전쟁은 무승부, 베트남 전쟁은 패배한 전쟁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만, 후세인은 이것을 잘못알고 공군력이 별것 아니라는 잘못된 결론을 낸 것. 망했어요. 게다가 애초에 지상군 전력도 다국적군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Contents

1. 개요
2. 전쟁의 원인
3. 전쟁 과정
3.1. 개전 이전
3.2.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
3.3. 불공평한 결과
4. 전쟁이 끝난 후
4.1. 패배한 이라크. 그리고…
4.2. 잘못된 교훈
4.3. 이후의 쿠웨이트
4.4. 이라크 전쟁
5. 이야깃거리
6. 대중문화 속에서

1. 개요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까지 이라크쿠웨이트를 침공하면서 이라크와 쿠웨이트 - 다국적군(Coalition Force) 사이에 벌어진 전쟁. 사담 후세인은 이 전쟁을 '모든 전쟁의 어머니(mother of the all battle)'라고 불렀다.

걸프(gulf)는 바다(灣, bay)을 의미한다. 전쟁이 벌어진 지역의 이름은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 만 주변 지역. 그래서 1차 이라크 전쟁 혹은 페르시아 만 사태로 부르기도 한다. 일본, 중국, 북한에서는 각각 '만안전쟁(灣岸戰爭)', '해만전쟁(海灣戰爭)', '페르샤만전쟁(Persia灣戰爭)'이라고 한다. 북한의 경우, 줄여서 '만전쟁'이라고 하는 경우가 잦다. 사실 주변 국가들이 페르시아 만의 이름을 가지고 하도 싸워대서 페르시아 만은 아예 'The Gulf'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언론보도 초기에는 페르시아만 사태 페르시아만 전쟁이라고 불렀다가, 나중에 상기의 이유 때문에 걸프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2] 반면 걸프(gulf)는 만을 뜻하는 영어 일반명사로서 한국어 명칭으로는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스텔스 공격기, MLRS, 패트리어트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미군하이테크 무기들이 대중에게 처음 선보여 그 위력을 가감없이 보여준 전쟁이며, 전 과정이 TV로 중계되면서 여러 면에서 전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아넣은 전쟁이기도 하다물론 충격과 공포란 단어는 10여 년 후에 쓰였다만 심지어 미군이 발사한 크루즈 미사일에 부착된 비디오 카메라를 통해 미사일이 목표물을 찾아서 파괴하는 과정까지 선보일 정도였다 흠굉무.

2. 전쟁의 원인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전쟁이었던지라 당시 국제정세 전문가들과 해외 언론들은 이라크쿠웨이트 침공과 그 배경에 다양한 가설과 주장들을 내놓았다.

  • 1. 제국주의 시대 영국이 중동 지역들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원래 같은 언어, 같은 민족, 같은 이슬람 문화권에 원래 하나의 나라였던 곳을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분할시키면서 영국의 식민유산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설.
    • 하지만 이라크와 쿠웨이트가 영국이 중동을 지배하기 전 원래 한 나라였는지는 논란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이라크를 지배하기 전 역사/문화적으로 이라크와 하등관계가 전혀 없는 나라였고 당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쿠웨이트의 이라크 강제 합병을 정당화하려고 지어낸 헛소리라는 이야기도 있다. 자세한 건 쿠웨이트 항목 참고.

  • 2. 쿠웨이트의 석유가 탐났던 후세인 대통령이 더 많은 석유 자원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일으켰다는 설.
    • 이 가설은 전쟁 당사국이었던 이라크도 산유국인 이상 별 설득력이 없다.

  • 3. 협소한 자국의 해안 국경선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라크가 더 넓은 해안선,영해 확보를 위해 쿠웨이트를 침공했다는 설.
    • 실제로 이라크의 해안선은 이란과 쿠웨이트 국경 지역 부분에 약간의 해안가 영토만 있어 진짜 협소하다.

  • 4.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후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채들을 지게 된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자국내 불만을 나라 밖으로 돌리기 위해 일으켰다는 설.
  • 5. 이란-이라크 전쟁 때처럼 미국이나 영국등 서방국가들이 뒤를 봐줄 거란 판단하에 전쟁을 일으켰다는 설.
    • 몆몆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이라크가 미국 빽 믿고 쿠웨이트를 치려 했다는 둥의 소리들이 난무하는데 확실히 증명된 건 없다.

공식적으론 당시 이란-이라크 전쟁 종전후 전비 조달 등으로 지게된 막대한 차관상환 부담 등 국내외적으로 경색상태인 이라크의 국정에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쿠웨이트가 자신들의 석유를 훔쳐가는 건 물론 석유를 과잉 공급하여 이라크 경제를 위협한다며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8월 2일 오전 2시를 기해, 이라크군은 최정예 공화국수비대를 중심으로 한 30만 대군을 전 국경에 투입하는 공세기습적으로 감행했다.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완벽한 기습이었고, 이라크와의 갈등을 흔한 주변국과의 분쟁 정도로 생각하고 전쟁은 생각치도 않던 쿠웨이트군은 전쟁준비도 안 되어 있었던데다 급작스런 기습에 제대로 대응도 하지 못했다. 물론 전면전 상황이라는 사실을 파악해도 승리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쨌거나 3만에 달하는 쿠웨이트군은 곳곳에 분산된 채 각개격파당하고, 항복하거나 도주했다. 동시에 이라크군은 헬리본 부대를 투입하여 전격적으로 쿠웨이트의 주요 공항과 활주로들을 점거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국경을 차단한 데 이어 이름뿐인 쿠웨이트 해군을 격파하여 쿠웨이트를 외부와 차단하였다.

이 와중에 쿠웨이트의 왕실이 거주하는 다스만 궁으로 이라크군의 맹공이 펼쳐졌다. 개전과 동시에 벌어진 특수부대의 1차 공격을 격퇴하고, 오전 5시에 감행된 이라크 해군육전부대의 공격까지 막아낸 쿠웨이트군이었으나 결국 시가지를 장악한 이라크군이 탱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막아내지 못하고 수비부대 병력 대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왕제 셰이크 파우드 알 아마드 알 사바는 국왕과 나머지 왕족들을 피신시킨 후 남아서 수비대를 지휘하다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그리고 이라크는 같은해 8월 8일 쿠웨이트의 이라크 합병을 선포했다.

이에 국제연합은 이라크에 쿠웨이트에 대한 합병 철회와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철군시한은 1991년 1월 15일까지였다. 그러나 이라크는 도리어 쿠웨이트 합병을 중단하지 않았고 철군시한까지 철군을 거부하였다 1월 17일 미군을 중심으로 한 다국적군이 토마호크 미사일로 이라크에 폭격을 가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여담이지만, 첫 테이프를 끊은 게 누구냐는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먼저 발사한 것으로 따지자면 B-52ALCM이지만, 가장 먼저 이라크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외곽지역의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며 돌아다닌 아파치들이다. 보통은 Fail-Safe Line을 최초로 넘은 B-52의 순항유도탄 발사한 시간을 개전 시점으로 보는 편.

3. 전쟁 과정

3.1. 개전 이전

당시 세간에는 (후세인 대통령을 포함해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무적이 아니라는 인식이 많았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걸프전이 베트남전의 재판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으며, 과연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베트남전은 사실상 미국이 치뤘던 세계전으로는 최근이자 마지막으로 치룬 전쟁이었다. 물론 그 후에도 여러 군사작전은 전개됐었지만 유고사태는 NATO로서 치뤘던 연합작전이었고 파나마 사태는 국지전으로 치뤄진 소규모 작전이었다는 점에서 그다지 부각되지는 않았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주축이 되어 치른 최근의 전쟁이었다.

게다가 당시 이라크군은 이란-이라크 전쟁을 사실상 승리로 이끌면서 100만이 넘는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이는 지금의 북한군보다도 뛰어난 수준이었다. 특히나 수도 바그다드의 방공능력은 저고도 구형 위주라고는 해도 웬만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들 뺨치는 수준으로, 바그다드보다 방공망이 강력한 곳은 모스크바, 바르샤바, 평양, 캄차카 반도 등 모두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때문에 미군은 베트남 전쟁 이후 가장 큰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기 전에 중부사령부에서 걸프전과 유사한 시나리오로 실시한 워게임에서 져버린 적이 있는데다, 쿠웨이트에 주둔한 이라크 병력은 당초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로 증강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미군 중부사령관 H.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은 개전 전까지 휘하 병력을 2배로 늘리고, 서유럽 방위의 중핵이나 다름없던 7군단의 배치를 요구했다. 당시 미 합참의장이었던 콜린 파월도 이라크군의 전투력이 상당하리라고 판단하여 중부사령부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였고, 거기에 본토에 대기하고 있던 1기계화보병사단을 추가로 더 얹어준다. 소모전을 예상한 것이다.

미군은 자국의 정예병력은 물론 다수의 최신예 병기와 동맹국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다국적군과 함께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다. 이들은 '다국적군'으로 불리며 사령관은 슈워츠코프 중부사령관이 맡았다.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드문 규모의 '다굴전'이기도 하다.[3]

미국은 이 전쟁을 길게 끌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베트남전의 악몽도 있었으며, 겨울(10월부터 4월까지)기간에 맞춰 전쟁을 끝내야 더운 기후로 인한 전투력 저하를 막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맞춰 철저한 작전 계획(헤일-메리 기동)과 분명한 목표(정예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섬멸/ 쿠웨이트의 해방)가 세워졌으며, 전속결을 의도하였다. 파월 의장이 유럽전선에서 최정예 군단을 빼서 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들어준 것도, 거기다 본토의 사단을 더 얹어준 것도 압도적인 전력으로 빨리 전쟁목표를 달성하고 빠져나오라는 뜻이었다.

미군 스스로도 이 전쟁에서 쉽게 이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전사자들을 담기 위해 만 단위의 시체 주머니를 준비했고, 전문가들 역시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자체적으로 추정한 전사자 수만 무려 3만 명에 달했으므로 주머니 재고가 부족할 거 같아서 부랴부랴 1만 개를 더 질러서 쌓아두었다. 전후에 보면 다행스럽게도 삽질이었지만. 비슷한 일로, 미군은 전차포탄 소요량을 대규모 소모전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 22만 발 가량으로 어림잡고 미친듯이 실어날라 쌓아놨는데 그 중에서 실제로 쏜 건 고작 수천 발 수준이었다. 아마 미군 역사상 전쟁규모 대비 전쟁준비가 이 정도로 철저한 경우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쓰였던 생화학무기가 위협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미군은 M1 에이브람스 전차의 엔진의 열로 화학무기를 제독하는 방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한 것은 후세인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미국을 소모전으로 몰아넣어 일정 이상의 인명피해를 입게 되면 미국 내 반전주의 여론 때문에 미국이 손을 뗄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1980년대까지 전세계에서 벌어졌던, 그리고 각국이 준비했던 전쟁의 양상인 소모전식 전쟁을 생각하면 심각할 정도로 틀린 생각은 아니었지만.

3.2. 사막의 폭풍 작전(Operation Desert Storm)

전쟁이 발발하여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자 미국의 F-117이라크의 심장을 찔렀으며, 곧바로 토마호크의 대공세, B-52의 폭격, 그 외 다양한 공군기의 공격이 이라크의 중심부를 강타하였다. 39일간의 강력한 미 공군 & 다국적군 공군의 공습으로 이라크는 생화학무기 생산처로 의심받는 공장들, 군의 지휘부, 발전소, 대공망이 무력화 되었다. 미군은 베트남전 당시의 미국과는 또 다른 훨씬 발전된 정교한 화력을 보여주었으며, 베트남전과 달리 적의 목표물을 계획적으로 착실하게 파괴하며 전쟁을 수행해 나갔다.

이라크군은 스커드 미사일사우디아라비아, 이스라엘 등을 보복 공격하여 전쟁을 확대하려 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 국경에는 이미 다국적군이 배치되어 프지 전투에서 이라크군의 진격을 막았고, 스커드 미사일은 상당 부분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요격되거나 특수부대&항공전력에 파괴되었다. 이라크군은 가질 수 없다면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식으로 쿠웨이트의 유전들에 불을 질렀고, 걸프전 내내 이러한 풍경이 목격되었다(진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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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쿠웨이트의 유전들.

사막의 폭풍 작전 중 공중 폭격이 주가 된 3단계가 끝나고, 마지막 4단계로 넘어가자 다국적군은 2월 24일부터 본격적으로 지상전에 돌입하였다. 사막의 폭풍작전 전투 지도

다국적군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대기하고 있던 30만의 지상병력과 장비를 수백km 기동시켜 이라크를 가로질러 쿠웨이트를 포위하게 했고, 뒤가 막혀 도망치던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를 성공적으로 포위, 섬멸하였다. 이 작전은 헤일 메리 기동작전(Hail Mary Play)로 이름 붙여졌으며,[4] 고대로부터 이어진 불후의 전술인 망치와 모루 전술이 현대전에서 전략적인 차원으로 적용된 성공적인 사례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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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하는 미 3기갑사단.

헤일 메리 기동작전 막판에 미군 제1기갑사단과 제3기갑사단은 바스라 서쪽 50마일 근처에서 이라크 공화국 수비대의 함무라비 전차사단과 조우하였다. 이 전투에서 미군 800대, 이라크군 300대의 전차가 격돌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때 일어난 쿠르스크의 프로호로프카 대 전차전(독일군소련군) 이후 최대규모의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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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64헬파이어에 피격된 함무라비 사단 소속 T-72. 1991년 3월 2일

참고로 이 일련의 전투는 미군의 최신 기갑장비 VS 러시아제 최신 전차 T-72간의 집단 대결이라, 냉전 말기에 중요한 군사기술 대결로도 여겨졌다. 결과적으로 미군의 압승이 되었으며, 당시 미군의 기갑사단은 주로 M1A1(HA) 에이브람스를 운용했는데, 이는 열화우라늄 장갑을 가져 당대 최고의 방호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미군은 여기에 더해 1991년 부터 배치 시작한 신형 열화우라늄 날탄인 M829A1을 대량으로 보급해서 공격력까지도 최고 수준으로 유지했다.[5]. 반면 이라크의 T-72는 M1을 단 한대도 터트려보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개박살 났는데, 때문에 소련의 것과 달리 다운그레이드 된 물건이란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훗날 밝혀진 진실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일단 방어력과 공격력 측면에서 다운그레이드 된 것은 없는 T-72였고, 미군이 너무 고급포탄을 쏴대서 잘 뚫린(...) 것이었다. 걸프전 시점에서 T-72가 쓸 수 있던 가장 강한 전차포탄은 역시 소련에서 1991년 부터 배치한 3BM-46 탄이었으나, 이 탄 조차도 M829A1 보다 살짝 위력이 낮은 판국에 소련에도 매우 희귀했기에 이라크에게 팔 포탄 따위는 없었다. 심지어 86년에 개발된 이전세대 탄인 3BM44 조차도 소련군에 모자란 상황이었고, 결국 이라크군에 판매된 탄환은 대부분 70년대~80년대 초에 생산된 소련제 포탄이었으나, 이 포탄들은 M829A1에 비하면 관통력이 2/3 수준 이하에 머물고 있었다. 반면에 M1A1의 열화우라늄 장갑은 걸프전 기간 동안 같은 M1A1이 오인 발사한 M829A1에 4번 맞았으나, 100% 방어해 내는 결과를 보였다. 이런 판국이니 T-72의 포탄이 M1A1을 격파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게다가 T-72는 전자장비도 거지같고, 이라크군이 따라했을 러시아군 훈련시스템 자체도 NATO 표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을 합격점으로 두고 있으니 답이 없다... 포탄을 맞춰야지 뭐 관통이라도 기대를 해 보지... 전투에는 결국 미 공군과 육군의 A-10AH-64 등도 가세하여 함무라비 사단은 전차 대부분을 잃었고, 공화국 수비대의 메디나 사단 등 정예사단들 대부분이 무력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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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죽음의 고속도로.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퇴각하면서 이용한 이라크-쿠웨이트 간의 도로로, 모여든 이라크 전차들과 차량으로 인해 병목 현상이 생겨났다. 이곳에 집중적으로 가해진 다국적군의 폭격은 치명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민간 피난민도 오폭당하기도 했다. 위키백과

그후 연합군은 쿠웨이트를 수복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수도 쿠웨이트 시티를 탈환하게 된다. 이때 쿠웨이트 시티에는 아랍국의 군대가 먼저 진입하게 하여 정치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수만 명의 전사상자를 내는 등 심각한 손실을 입은 이라크군은 철수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지상전 돌입 100시간[6]만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전쟁종결을 선언했다. 전쟁은 더 없이 깔끔하고 신속하게 미군의 의도대로 끝났다.

이라크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으며, 특히 대공망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라크군의 대공망 70%가 전쟁 당일에 파괴되었으며, 이중 남은 30%도 대부분 이라크 북부에 설치된 (즉 침공루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대공레이더와 지대공 미사일들이었다. 사실상 하루 만에 전투기와 휴대용 SAM을 제외한 모든 대공망이 마비된 상황. 물론 이는 이라크 방공망이 현대 전쟁에는 걸맞지 않은 구형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비슷한 이유로 북한군 역시 개전 초 방공망이 쓸려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게다가 이라크와 달리 북한과의 전쟁에서는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한국 공군이 건재한데다 태평양 지역의 미 공군 전개 전력이 워낙 막강하여 굳이 준비할 시간조차 필요없는 상황이다.

당시 이라크군은 MiG-29 등에 이란-이라크 전쟁 등에서 활약한 베테랑 파일럿들을 탑승시켜 미 공군과 붙어보려고 했지만 장비에서 밀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설사 장비가 비슷하다 해도 소련군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여 준비되어 온 미국의 프로 조종사들을 당해낼 능력이 있을 리 없었다.[7]

이라크군도 전쟁 당시 나름대로 반격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스커드 미사일이스라엘에 발사하여 아랍국들이 미국에게서 등을 돌리게 하려는 작전이 실행되었다. 이에 미군은 스커드 미사일 발사대를 추적하여 파괴하거나 패트리어트 미사일로 요격하였다. 대부분의 스커드 미사일은 요격되어 성과를 못 냈지만, 한발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군 기지로 떨어져 미군 병사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전투로 인해 사망한 150명가량의 미군 전사자 중 30명가량이 이 한발에 희생된 것이다. 이라크가 스커드로 성공한 유일한 케이스. 다만 이마저도 온전한 성공이 아니라 해당 기지의 패트리어트 시스템이 정비에 들어가 작동되지 않는 것과 맞아떨어진 결과라 이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또한 생화학무기 등을 사용할 우려가 있었지만 연합군의 핵보복 등을 우려해서인지 생화학무기는 사용되지 않았다. 스커드 공격도 생화학무기가 아닌 통상 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사용했다. 사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 및 자국 내 시아파/쿠르드족 학살 때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등 화학무기를 자주 써먹은 전력이 있어, 다국적군 측도 이라크군이 화학무기를 쓸 명분을 주지 않으려고 상당히 조심했다. CS탄 사용요청을 화학탄 사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며 거절할 정도.

3.3. 불공평한 결과

이 전쟁에서 60만에 달하는 이라크군을 토화하는 동안[8] 미군은 단 294명만 전사하는 기염을 토한다. 그나마 그중 145명은 사고사이고 실제 전투 희생은 149명이며, 이중 35명이 아군 오인사격 희생자였다. 그나마 이 오인사격의 숫자도 절대 많은 게 아니다.[9] 이런 적은 사망자를 낸 미군과 달리 이라크군은 20,000~35,000명이 죽고 75,000명이 다쳤다. 전쟁 전체에서 거의 1:100의 교환비를 낸 셈.

중국은 이 결과를 보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불타는 이라크 무기 상당수가 메이드 인 차이나였던 것. 과거 마오쩌둥의 교시를 받들어 게릴라전을 통해 전쟁을 이기는 전략을 생각하던 중국은 베트남과의 중국-베트남 전쟁 이후 군의 현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걸프전의 결과를 보고 앞으로 전쟁이 나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과학 병기에 밀려서 정규전에서는 100% 진다며[10] 군 현대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벌써 20년 전으로, 중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린 오늘날에 이르러선 중국군의 질적 팽창이 엄청나게 강화되는 중이며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의 군사력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신속대응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쿠웨이트가 점령당한 근 몇 달간 느려터진 해상 수송부대[11]가 주요 군사장비를 옮기기까지 미군은 고작 급히 공수되어 온 M551 셰리든으로 눈치를 보는 것이 끝이었다.[12] 결국 나온 결과는 스트라이커.

걸프전은 최첨단 병기와 공군의 힘을 보여준 전쟁이었으며 승전군 사상자 수가 놀라울 정도로 적은 전쟁이었다. 냉전이 종식될 무렵에 발생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한획을 그었고 또한 래전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으며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장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언론의 역사에 있어서도 한 획을 그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전쟁 전 과정이 전세계의 안방에 보도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다만 2000년대 이후 매스미디어가 전쟁에 관한 여론을 좌지우지하게 됨에 따라, 특히 민주국가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측면도 가지게 되었다. 예컨대 미군 몇 명만 잡아다가 TV앞에서 무릎을 꿇리거나 시체를 끌고 돌아다니거나 하면 반전여론이 비등하게 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건 현장과 일반 사회의 괴리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전장에 배치된 군대는 전장의 격렬함을 잘 아니 병력 수백, 수천명 정도 죽는 건 어쩔 수 없으며 최악의 경우 사상자가 수십만에 달해도 필요하다면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반 사회는 그런 엽기적인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 사실 이 문제는 베트남 전쟁이 먼저다. 게다가 단순한 현장과 일반 사회의 괴리 말고도 일반 시민을 비롯한 정치가들이 생각하는 목표와 수단이 군대가 생각하는 목표와 수단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 당시 다국적군은 종군기자단을 통해 언론플레이를 실시했으며 민간인들에게 작전명이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사막의 폭풍). 이는 이라크도 마찬가지였고 재미있는 사실은 이라크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한 언론 중 하나가 CNN이었다는 사실. 실제로 당시 다국적군 병사 및 지휘관, 특히 미군은 CNN을 곱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바그다드 시내에서 CNN의 기사를 송출하던(기자는 별개의 호텔에서 숙식) 통신사를 F-117이 날려버릴 때 해당 부대원들이 환호했다고 한다. 흠좀무.

4. 전쟁이 끝난 후

4.1. 패배한 이라크. 그리고…

전쟁 후 이라크는 경제제재 조치를 받게 되었고,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면 페르시아 만에 항시 대기 중이던 미 함대가 토마호크F/A-18, F-14 등을 동원하여 지속적으로 공습을 했다. 결국 이라크는 그 때 망가진 군대를 다시 재건하지 못한 채 10여년 후 다시 벌어진 이라크 전쟁 당시 너무나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단지 본국에서 치르는 방어전이라 미군과의 격차가 더 커졌음에도 미군에게 걸프전 못지않은 손실을 강요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한편 미국의 경우에는 전세계적으로 협조를 받았던지라 전비부담을 상당히 덜었다.

이라크군은 군사력면에도 열세였으며 전쟁의 정당성이나 명분은 다국적군에게 있었고, 주변의 아랍국들도 이라크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참혹한 패배를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집트와, 이라크와 같은 이념을 공유하는 바트당이 일당집권하는 시리아까지 쿠웨이트 구원을 외치며 참전했다. 그나마 이라크에게 동정적이었던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종전후 페르시아 만 연안 아랍국가들의 지원이 단절되면서 꽤나 고생해야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 얼마 후 지원은 다시 재개된다.

언론 역시 패배자의 반열에 들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언론을 자유롭게 풀어두면 전쟁에 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군은[13] 철저하게 기자들을 통제했고, 그 덕에 기자들은 취재에 많은 제한을 받았으며 다국적군의 언론플레이도 그만큼 용이해졌다. 다국적군이 상륙작전을 연습하는 것을 기자들이 열심히 보도한 덕에 이라크군 상당수가 쿠웨이트 해안가에 머물렀고, 그 덕에 다국적군의 우회기동이 수월해진 것이 그 예이다.

군사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트남 전쟁처럼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결과는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1980년대까지의 전쟁 양상 자체가 소모전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제대로 미래를 볼 수 없었다. 미군의 막강한 공격력과 기동력이 1990년대부터 전쟁 교리 자체를 바꿔놓은 셈이기 때문. 사실 미군 자신조차도 이 전쟁은 소모전이 될 거라고 예상했으니[14]

그러나 미군 역시 스스로는 패배자 반열에 들게 된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놓았다는 것. 지나치게 낮은 전투 사상자 비율로 인해 이제 미군은 희생자가 생기면 큰 비판 여론에 시달리게 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은 이후 이라크/아프간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국은 이 때문에 PMC와 계약하고, 우방국의 군사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또한 미군의 허술한 전후 처리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어느 정도 정치적 목적(쿠웨이트 해방)을 달성한 뒤로 백악관은 더 이상 확전을 원치 않았고, 이 참에 확실히 이라크군을 제압하고 후세인을 처단하려던 군과 의견을 달리하게 된다. 하지만 군의 원칙은 문민통제명하복이니 슈워츠코프 장군은 휴전을 원하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르는 수 밖에 없어 가능하면 빠르게 미군을 그곳에서 빼내는 데만 급급하게 된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라크측 휴전 협상단이 헬기를 띄워도 되냐는 질문에 미군 기지 근처에만 안 오면 된다는 식으로 대응할 지경이었다. 이로 인해 이라크는 맘놓고 헬기를 띄워 자국내 봉기 세력들을 처절하게 처단할 수 있었다...결과적으로 후세인 세력을 확실히 제거하지 않고 미래의 화근을 남겨둔 셈이었다. 다만 그 시점에서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의 미국은 베트남전에서의 트라우마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으며[15], 전쟁을 어떻게 끝낼 것인가는 걸프전 내내 미국 수뇌부의 핵심 화두였다. 그 화두를 잊어먹은 10년 후의 미국은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또한 걸프전은 쿠웨이트의 수복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가진 전쟁이었기에 아랍 연합국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미국이 이라크를 정벌하러 들어갔을 때도 그 지지가 이어졌을지는 미지수이다. 당장 10년 후의 이라크전에서 사담 후세인을 몰아낸 다음에 미국 입장에서 뭐가 좋아졌는지를 살펴본다면, 걸프전 당시에 이라크를 물리치는 선에서 정리하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서 날아든 기소장

끝으로 조지 부시도 패배자가 되었다. 전쟁은 승전했고, 지지율은 솟구쳤지만, 근본적인 문제. 즉 경제가 해결되지 않은 게 문제였다. 1970년대부터 베트남전 후유증과 오일 쇼크, 누적된 무역적자로 인해 전반적인 경제 사정이 많이 나빠진 상태였던데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강한 미국 만든답시고 부채를 잔뜩 늘려놓고 이것이 재정절벽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걸 해결하는 과정에서 세금 인상을 강행했고 그 결과 부시의 지지도는 급락. 로스 페로가 갑툭튀, 이어 아칸소의 듣보잡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에게 광탈하면서 12년 만에 지미 카터에 이어 재선에 실패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16] 공화당으로 치면 제럴드 포드 이후 16년 만.

4.2. 잘못된 교훈

한편, 당시의 빛나는 승리에 고무된 21세기 초의 미국 국방부 장관 도널드 럼즈펠드어차피 이라크군도 붕괴되었고[17] 희생자도 많이 안 생기는데 전투 병력을 조금만 데리고 다녀도 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라크전에서는 2~3만에 불과한 지상전투병력만으로 이라크에 돌입했다가 베트남 전쟁 시즌 2를 찍게 된다(…). 걸프전의 경우에는 쿠웨이트의 여론이 우호적이었고 테러집단이나 반미세력이 없기도 해서[18] 치안유지에 있어서 일시적으로 병력을 주둔한 후 쿠웨이트 정부에게 지배권을 이양하면 되는 거였지만 이라크전의 경우에는 이라크 정부를 전복하는 게 전쟁의 목표였고 이라크의 반발, 테러집단의 유입 등으로 치안공백이 오래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규군과의 전투에서는 기갑사단이나 공군으로 충분했지만 비정규군와의 전투는 공군이나 기갑사단이 아닌 병사와 게릴라들간의 전투가 주인데 럼즈펠드는 걸프전의 전훈만 생각한 거지 베트남 전쟁의 전훈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듯하다. 물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더군다나 전쟁을 앞두고 설계한 기본 뼈대가 달랐다. 당시 콜린 파월은 전쟁을 단시간에 종결짓고 바로 철수한다는 기본 전략 구상을 그대로 실천해 결과적으로 미군 주둔 및 기동으로 인한 후폭풍이나 부작용이 야기되지 않았지만, 반면 럼즈펠드는 미군의 첨단장비의 힘을 지나치게 맹신한 나머지 '정예된 소수의 고기동 부대로 이라크를 일정 기간 점유하고 거기서 또 이를 기반으로 중동 전체를 컨트롤해 보려는' 터무니없는 구상을 저질러 버렸다. 사실 이런 식의 소수의 정예 기동부대를 통한 적 방어종심의 붕괴를 노리는 작전술은 전쟁의 목적에 따라서는 상당히 효율적인 방법이며, 특히 이스라엘군이 수 차례의 중동전쟁을 통해 발전시킨 바 있다. 실제 전역의 전개에 있어서도 빠른 종전을 가능케 했고. 다만 이라크 전쟁의 목적은 이라크군을 패배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점령, 나아가서는 과도정부 구성까지의 안정적인 통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목표에 적합하지 않은 접근방식이었다. 아무리 럼즈펠드가 군인 출신이 아니라 해도, 국가의 대전략을 짤 책임이 있는 국방장관이라는 자가 전쟁의 장기적 정치적 목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단을 택했다는 점은 백번 까여도 할말이 없다. 더군다나 베트남 전쟁과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참고해 볼 만한 선례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럼즈펠드식의 점령 및 통치정책이 아예 효과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북한처럼 장기간 항전이 불가능하고 외부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곳[19]이라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안정화는 가능하기 때문. 하지만 미국이 지금까지 전쟁을 한 나라 중에 북한 같은 케이스는 하나도 없었다.

4.3. 이후의 쿠웨이트

그들은 나라를 되찾았고, 다국적군에 참가한 나라에 감사를 표했다. 이때 일본은 엄청난 양의 전비를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보내지 않아 감사 인사를 받지 못했다. 전여옥은 《일본은 없다》에서 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일본인들 꼴좋다!라고 마구 비웃어댔지만 병력은 안 보냈어도 미국 협박에 내놓은 것이긴 해도 도운 건 맞으니 일본이 절대 기분좋았을 리는 없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부추긴 한 계기라고 보기도 한다.[20]

전쟁 초기에 왕궁을 수비하다가 전사한 왕제는 쿠웨이트 올림픽 위원회장이자 IOC 위원이었는데, 전쟁발발 얼마 후 중동국가들의 요구에 따라서 이라크의 아시아게임 회원자격 박탈과 동시에 왕제의 아들에게 부친의 자리를 계승시켰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 쿠웨이트 내에서는 전쟁 전 쿠웨이트의 국정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전쟁 중에는 국내에 잔류한 인사들에게 암살자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미국이 9.11 테러 이후 이라크를 침공하자 그 때까지 이라크에 대한 원한이 남아있었던 쿠웨이트[21]는 이라크 전쟁에 찬성하는 쪽에 섰다.

4.4. 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미국의 악연은 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쪽은 걸프전과는 정반대로 미국이 여러 문제로 골머리만 잔뜩 앓고 있는 중. 물론 이라크의 지정학적 특성상 이전부터 알 만한 사람은 다 예상한 일이기는 했다.

5. 이야깃거리

이라크는 종종 사막의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극히 안 좋을 때가 많았고, 이 때문에 전진하던 미국의 브래들리 장갑차가 바로 옆에 매복해 있던 이라크 T-72 전차를 뒤늦게 보고는 기관포로 쏴서 잡은 일이 있다.(...) 이후 2대의 브래들리가 TOW로 4대를 더 잡아서 총 5대를 잡았다. 영상. 물론 영상에도 나오듯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25mm 기관포로 T-72 상대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힘들다. 전차 포탑 위의 얇은 장갑을 기관포로 때릴 수 있는 아주 운 좋은 상황이 펼쳐졌던 것.

전쟁 초반에 이라크군이 다국적군이 상륙작전을 한다는걸 알게 되었는데, 실상은 속이려고 만든 가짜 기사였고, 예상 상륙지점에 미국이 네이비 씰 팀1 대원들을 약 12명 정도 파견해 해변가에 C4를 무더기로 설치한 다음 터트려서 진짜 다국적군이 상륙해서 교전하는 것처럼 속였다.[22] 근데 이라크는 또 여기에 속아서 2개의 사단을 그 해변으로 보내버렸고, 당연히 그후는 이라크군이 탈탈 털렸다.

한편 북한은 백만 대군과 수천대의 탱크를 자랑하던 이라크 군대가 100시간 만에 다 털리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해서 미국과의 싸움을 대비해 레이더 탐지기를 교란시키겠답시고 전국에 가짜 포대, 전투기, 전차, 방사포를 배치하고 쓰지도 않는 갱도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

써니가 이 전쟁을 쿠웨이트에서 겪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폭죽 소리가 들리면 심하게 놀란다고 한다.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기 얼마 전, CNN은 과거 칸나이 전투가 벌어졌던 칸나이의 밀밭에서 중계를 하면서 칸나이 전투를 설명하였는데, 결과적으로 걸프 전쟁에서의 미군의 성공을 예고하는 듯한 방송이 되었다.

6. 대중문화 속에서

youtube(7jQAQ0lbAcw)

당시 참전한 미군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내용의 노래 〈염려의 목소리〉(Voices that care)도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걸 맥주 광고에 쓰기도 했지만(...).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전훈에 주목하여 매스미디어의 활용에 신경쓴 한 사례.

이 걸프전을 배경으로 여러 게임이 나왔는데, 그중 『걸프 스톰』이라는 게임은 본래 걸프전과는 상관없이 제작을 시작한 게임이었다가 제작중 걸프전이 발발하자 게임 배경이 걸프전으로 바뀌었다.


2002년 HBO에서 제작한 TV 영화 <바그다드에서의 생중계>(원제: Live From Baghdad)가 개전 첫날의 CNN 실황중계를 소재로 만들어졌다. <배트맨>으로 유명한 마이클 키튼, 당시에는 국내에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헬레나 본햄 카터가 남녀 주연으로 출연.

갤러리 페이크의 여주인공 사라는 Q국 출신 왕족으로 전쟁을 겪었는데 이 전쟁이 배경소재로 사용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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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공군력이 전쟁의 실질적인 전력으로 떠오르기 전인 1911년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가 "항공전력은 전쟁에서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라고 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기의 위력에 대해 깨닫고 이후에는 항공 정찰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했다.
  • [2] 다만 한국의 지리교과서에서는 이 지역을 페르시아만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아라비아만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는다
  • [3] 링크 이걸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우측의 교전국에서 다국적부대의 숨겨진 항목을 열어보면 된다.)
  • [4] 미식축구의 초장거리 패스 플레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성모 마리아(메리)에게 바치는 듯 크고 아름다운 높이와 거리로 패스해 도박적인 면이 있는 한방 플레이에서 붙은 명칭이다. 군단을 넘어 집단군 수준의 병력을 수백km 기동시키는 대규모 작전인지라, 이라크군과 직접 맞붙는 것 이상으로 난도가 높은 일이었다. 실제로 이 작전 준비/기동 중에 사고로 잃은 병력이 이라크군과의 교전으로 인한 전사자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적국의 내로 크게 침투하여 우회하는 기동 특성상 매우 위험한 작전이었으며 특히 쿠웨이트 북쪽으로 포위한 부대의 경우 서남쪽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출발하여 기동거리도 엄청났지만 측면이 노출되어 있는데다 비록 이라크와 사이가 좋지 않은데다 전쟁 피해복구에 열중해야 하는 관계로 미국과 적대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지만 엄연히 적성 국가에 속하는 이란을 후방에 둔 형세가 된다. 이란 입장에서 이를 곱게 볼 리 없는지라 상황에 따라 개입할지도 모르는 불안요소였다. 헤일 메리 플레이란 이름은 정말 적절한 이름이 아닐 수 없다.
  • [5] T-72를 두려워하여 지휘관들이 야전에서 급히 열화우라늄 장갑과 포탄으로 보강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거짓이다. 물론 기존의 M1A1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개조한 사례도 있긴 하지만 야전 개수가 아니라 제대로된 공장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 [6] 콜린 파월 장관의 제안. 100시간은 정치적으로 써먹기에 적절한 상징적 시간(딱 100이니까)이었고 이를 부시정권이 받아들여서 작전시간을 100시간으로 정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것의 한 예.
  • [7] 다만 이라크군 MiG-25가 조기경보기 범위 밖에서 비행하던 F/A-18을 기습하여 격추시키기도 하였고, 영국군토네이도 전투기는 MiG-29에게 격추당하는 어이없는 사례도 있었다. 토네이도야 공격기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지만...막상 이라크군의 삽질은 다국적군을 능가했는데, 어떤 MiG-29는 앞서가던 동료기를 격추하고 자신도 추락하는가 하면, 저공으로 도망치는 비무장 기체인 EF-111을 뒤쫓다 그대로 추락하는 일도 있었다. 그 EF-111은 격추 스코어를 인정받았다(…).
  • [8] 다만 이라크군의 장비와 지휘체계가 피해의 상당부분을 차지했고 실제 장비와 인명손실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전사자만 2만 명 정도고 사상자 도합 10만 명 안팎. 물론 현대전에서는 사상자가 10~20%만 발생해도 사실상 전멸한 것으로 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도 적은 숫자는 아니다. 여기서 '전멸'이라는 말은 부대가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부대가 전투능력을 상실했다는 이야기이다. 사상자가 10~20%라는 말은 부대 전투력 유지에 필요한 각종 장비가 아예 다 아작났으며, 탄약이나 각종 물자가 절망적인 상태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 [9] 피아식별이 극도로 어려웠던 과거 전쟁,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에선 야간에 오인사격으로 연대병력이 붕괴된(…) 사례도 간간히 나온다. 통계를 보면 오히려 베트남 전쟁 이후로 오인사격으로 인한 사상자가 극도로 적어진 것이다. 다만 이번 전쟁은 적이 워낙 형편없었던 데다 장거리 무기체계와 기동성으로 장비와 병력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는 사막 지형의 특성 탓에 오인사격의 감소율보다 전투 사상자 자체의 감소율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현재에는 피아식별 기술이 훨씬 더 진일보하고 있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하는 그린베레 대원들이 오폭에 희생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특히 대규모 정규전이 아닌 릴라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근접전투의 비중이 올라가는데, 이때 아군의 화력지원에 오히려 아군이 당할 확률이 증가한다.
  • [10] 다만 이 시기부터 중국의 경제력이 본격적으로 성장. 군사력 투자가 이전보다 수월해진 점도 고려해야 한다. 중소분쟁과 중월전쟁을 통해 군 현대화의 필요성 자체는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
  • [11] 어디까지나 상대적. 사막의 방패 작전은 현대적 군수의 엄청난 위업으로 손꼽힌다. 단 몇 달 사이에 수 십만 규모의 병력과 전투장비를 대양을 건너 수송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군 말고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엄청난 작업이다. 일례로 미 해군 소속의 알골급 고속수송함은 최고속도 33노트의 고속 수송함으로, 당시 취역중이었던 8척의 알골급을 모두 동원할 경우엔 완편된 1개 기계화사단을 단 18일 만에 미국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옮길 수 있었다. 해상수송에도 치트키를 갈겨대는 천조국
  • [12] 이라크가 쿠웨이트 점령 후 미군 증원 이전에 사우디로 신속하게 쳐내려왔을 경우 미국은 대단한 곤경에 처했을 것이다. 당장 현지에 전개할 수 있는 2개의 알몸뚱이 경보병사단과 수십대 수준의 전투기, 항모전단 1~2개 정도로는 이라크군으로부터 사우디아라비아를 방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물론 전쟁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전후 처리가 그만큼 골치 아파졌을 가능성이 높다.
  • [13] 물론 언론 통제를 했어도 어차피 질 전쟁으로 전쟁에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포기한 상황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좀 더 오래 끌 수도 있었던 전쟁을 언론의 압박으로 조기 종결한 것 또한 사실.
  • [14] 사실 1990년대에도 소모전 개념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북핵 파동 당시인 1994년에도 미군은 북폭을 검토하면서 전쟁은 최소 3개월간 걸리고 한국은 군인 49만. 민간인 포함 100만 명 사상. 미군은 5만 명 사상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했으며 카터의 방북은 그 결과였다. 완전히 바뀐 건 이라크전 이후.
  • [15] 다시 말하지만 걸프전은 베트남 전쟁이후로 미군이 주도가 되어 치뤄진 전쟁가운데 최근의 것이었다. 여기에 이라크는 이란과 최근까지 전쟁을 하고 있었기에 경험치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 [16] 실제로 당시 대선에서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로 미국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며 부시를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 [17]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군은 과거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수준이었다.
  • [18] 아이러니컬한 것은 걸프전을 전후해서 테러활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사마 빈 라덴항목에 서술된 그가 2004년 알자지라에 나와 했었다는 TV연설에 따르면 걸프전 이후 미국은 친미 아랍국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데 이를 독재정권의 후원으로 본 빈 라덴이 미국과의 투쟁을 결심하게된 동기가 되었고 이는 그가 알카이다를 통해 아프리카 주재 미 대사관 폭파사건같은 테러를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 [19] 다만, 북한은 중국에게 사실상 간접적으로 지원을 받고 있으며 특히 조중동맹조약이라는 안보적 보장을 받고 있다.
  • [20] 실제 일본 내의 비교적 중립적인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들어 일본의 적극적 동맹국 지원 (현재의 집단적 자위권) 의 필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표할 정도이다. 전여옥씨의 저런 발언은 오히려 일본 국내의 양식있는 중립파가 심정적 우익으로 돌아서게 만들기 딱 좋은 어그로니, 어느 정도 지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 [21] 이들은 비록 국토는 완전히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침공당한 원한이 어디 가지는 않는다. 겨우 1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기도 하고. 거기에다 왕족이 전사했으니..
  • [22] 당시는 지금처럼 전자장비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심하자. 특히 속은 쪽은 미군도 아닌 이라크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