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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녕

last modified: 2015-03-31 17:53:47 Contributors

甘寧
영감

중국 후한말에서 삼국시대의 무장으로 삼국지의 등장인물. 는 흥패(興覇). 생몰년도 ?~215? 년.

나라의 장군이며 파군 임강현 사람으로 익주 출신이다. 본디 감녕이 남양 사람인데 선조가 파군에서 빈객으로 지내 파군 사람이 됐다는 기록도 주석으로 있는걸 보면 이주민 2, 3세대에 속했다고 여겨진다.

Contents

1. 설명
2. 그리고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3. 감녕의 나이
4. 감녕전의 순서 문제
5. 대중문화 속의 감녕

1. 설명

젊어서 파군에서 관리를 지내고 천거되어 촉군승[1]으로 임명되었으나 오래 지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본군으로 돌아갔다. 사람됨이 싸움을 잘하고 무리를 끌고 다니기 좋아했기에 동네 건달들을 모아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도적단을 만들어 인근에서 행패를 부렸다.

이때 감녕은 호화판으로 도배를 하고 살았는데, 땅에서 출입할때는 수레와 기마병들이 길게 늘어서 정렬했고, 물에서는 배들이 늘어섰으며, 시종들을 비단으로 치장시켜 감녕이 가는 곳마다 빛이 날 정도였으며, 비단으로 돛을 만들어 배를 맸다가 떠날 때는 이걸 잘라버리는 기행을 벌였고, 비단으로 돛을 맨다고 해서 금범이란 말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허리에는 항시 큰 구리방울을 달고 다녀 사람들은 감녕의 구리방울 소리만 들어도 몸을 사렸고, 관리들조차 감녕에게 영합해 서로 나눠먹었었고 그렇지 않은 관리는 온갖 보복을 받았다고 한다. 배가 언급되는 것과 파군의 위치를 봤을때 아마 형주와 익주를 잇는 물길을 장악해 익주의 주요 이권사업인 비단무역을 독점하고 왕 부럽지 않은 위세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이쯤되면 이미 조폭이라기보단 군벌 레벨로 봐야할 수준...

그렇게 촉 지방에서 두목 노릇을 20년[2] 동안 하며 보니 점차 성격도 누그러지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 부하들을 데리고 형주로 가서 유표에게 의탁했다. 다만 194년, 촉에서 유언이 죽고 아들인 유장이 집권하자 촉의 호족들이 장안에서 이각이 임명한 익주자사를 내세워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들의 이름 중에 감녕이 보이며, 패하게 되자 형주로 달아났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반란군 인사들의 면면에는 뜬금없이 형주 별가가 끼어있는데 이로 인해 감녕이 유표에게 달아나기 이전에 이미 유표가 감녕 등의 반란을 지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감녕의 본전에서는 감녕이 형주로 간 것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자백가의 책을 가까이하여'라고 어물쩡 넘어가고 있지만 이를 본다면 실제로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도망친 것이라는 쪽이 신빙성있게 보여진다.

하지만 막상 유표는 감녕을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유표를 지켜본 감녕 역시 유표가 군사업무에 관련된 일을 전혀 모른다고 여겨 그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오나라를 따르려 했지만 강하태수 황조가 하구를 막고 있었기에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황조에게 의탁했다고 한다.

어쨌든 황조에게 갔지만 황조 역시 바른말만 하는 감녕을 예우하지 않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났을 때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황조가 패하고 추격을 받아 위태로워지자, 감녕은 활을 쏘아 능조(능통의 아버지)를 죽여 황조를 구하는 공을 세웠지만 황조는 여전히 감녕을 처음(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과 같이 대했다고 한다. 이 공으로 황조의 부장, 소비가 감녕을 수 차례 천거했으나 황조는 오히려 감녕을 견제하기 시작해 감녕의 빈객들[3]을 유혹해 흩어지게 하는 등 더욱 푸대접한다. 실의에 빠진 감녕은 황조를 떠나고 싶었지만 도망쳤다간 붙잡힐 것이 두려워 떠나지 못한 채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감녕의 마음을 알았던 소비가 감녕을 주현의 현장으로 천거해 밖으로 내보내자[4] 감녕은 8백명의 무리를 모아 그대로 손권에게 투항해 버린다.

하지만 역시 예전에 오나라 장수인 능조를 죽인 일이 있어서인지 바로 가지 못하자 여몽주유의 추천으로 손권 앞에 나아가게 된다. 얘기를 들은 손권은 감녕을 불러들여 형주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고, 심지어 장소의 만류마저도 소하의 예를 들며 물리친 후 황조를 공격해 강하의 악현과 사이현을 점령한 후에 당구에 머문다. 황조가 풍칙에게 죽었다며 손권이 소비를 죽이려 들자 감녕은
소비는 옛날 저에게 은혜를 베푼 자입니다. 저는 소비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전에 길가에서 죽어 장군 휘하에서 목숨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 소비의 죄는 주륙을 당함이 마땅하지만, 특별히 장군께서 그의 머리를 저에게 주시길 원합니다.
라고 말하며 그를 살려줄 것을 청한다. 소비가 도망치면 어쩔 것이냐는 손권의 물음에는
소비는 찢기는 화를 면하고 다시 살 수 있는 은혜를 받는다면 오히려 달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도망칠 생각을 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한다면 저의 머리를 대신 상자에 넣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손권이 결국 소비를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후부터가 감녕의 전성기. 적벽대전때도 활약하고 조인과 싸울 때도 이릉을 점령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한다. 비록 이릉에서는 포위되었으나 감녕은 태연자약하였고 여몽의 책략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후 환현에서는 여몽의 추천으로 선봉이 되어 주광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5] 익양대치에서는 노숙에게
다시 저에게 5백 명을 증원시켜 줄 수 있다면, 제가 가서 그에게 대항하겠습니다. 관우는 제가 기침하며 가래침을 뱉는 것을 듣고 감히 물을 건너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물을 건너면 저의 포로가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니 관우는 결국 건너지 못한다.감녕의 히드라급 능력 하지만 합비 공방전에서는 적은 수의 군사로 퇴각하는 후미에서 있다가 손권이 죽을 뻔하고 수많은 피해를 입은 소요진 전투가 발생한다. 역시 자세한 내용은 합비 공방전#s-3.3 참고.

유수구 전투에서는 감녕이 단 100명의 군사로 야습을 성공시켜 그나마 좀 체면치레를 했던 관계로 손권은 '장료가 있다면 오에는 감녕이 있다'라고 자랑스러워 했다고 했는데 이것이 언제의 유수구인지 시기가 모호하다. 유수구항목 참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215년 죽는데 그의 병사는 반장이 이끌게 된다.

같은 오군의 능통과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 원수로 여겨 껄끄럽게 지냈지만, 연의에선 서로 창칼을 몇 년에 걸쳐서 나누고는 끝내 화해해서 호흡을 맞추게 된다(능통 항목 참고). 단 정사에선 둘이 끝내 화해했다는 기록은 없기에, 아마 서로 피하지 않았을까 싶다. 손교와 관계는 손교가 술에 취해 발작해서 감녕과 싸웠다가 손권의 편지를 받고 손교와 감녕이 화해했다는 내용은 있다.

각종 매체에서 방울과 깃털장식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옛날에 수적질을 할 때 방울과 깃털장식을 했다는 말이 있고 연의에는 유수구에서 깃털을 단 다음 조조군에 기습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대중들에겐 잘 부각되지 않는 건데 화살로 적장을 물리친 경우가 많다. 능통의 아버지 능조부터,
황조, 채모의 동생 채훈, 악진[6]까지... 이쯤되면 황충 저리가라다.[7] 문제는 2차 창작물에서 감녕의 활 실력에 대해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궁술이 동작대궁술대회서만 묘사되는 하후연조차 양궁선수로 나오는경우가 많은데 어째서!
황조와 싸울 때 정보에게 쫓겨나는 황조를 미리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황조를 무시하고 그를 죽이는 장면도 나온다.(이는 자신이 오나라의 신하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후 이릉대전에서는 이질에 걸려서 설사를 흘리며 전장에 나섰다가(...) 사마가의 화살을 맞아 나무 밑에서 죽었다...고 나와 있지만 연의의 창작. 정사 등 실제 기록에선 별다른 구절이 없는것으로 보아 감녕은 그냥 노환으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

단, 감녕이 전사한 곳으로 알려진 지방에서 들리는 말에 따르면, 유비군과 싸우다 전사한 감녕의 시신을 까마귀들이 날아와 지켰다고 한다, 그래서 감녕을 지방의 수호신격으로 모시고 까마귀를 그의 심부름꾼으로 여겨, 그 지방에서는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까마귀들에게 먹이를 재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송나라 때 바람이 없어서 조운선이 출발하지 못하게 됐을 때 감녕이 때마침 바람을 불러왔다며 오왕신으로 봉해진다. 또한 청조 포송령의 요재지이에도 오왕신으로 등장한다.

그의 고향인 파군은 현재의 중경(重慶) 부근인데, 그 곳 만주구(萬州區)에 있는 감녕진(甘寧鎭)은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다.

그의 후손으로는 증손자인 감탁(甘卓)이 있다.

2. 그리고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는 어린이가 일찍이 허물이 있자 여몽에게로 달려가 투항했다. 여몽은 감녕이 그 아이를 죽일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즉시 돌려보내지 않았다. 후에 감녕이 예물을 갖고 여몽의 모친을 배알하고 직접 모친과 당에 오른 후에야 비로소 주방의 어린이를 감녕에게 돌려보냈다. 감녕은 여몽에게 그 아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잠시후, 배로 돌아오자 그 아이를 뽕나무에 묶어놓고 직접 활을 당겨 쏘아 죽였다. 일을 마친 후, 뱃사람들에게 명하여 배의 닻줄을 내리도록 하고, 옷을 벗고 배 안에 누웠다. 여몽은 매우 노여워하며, 북을 쳐서 병사들을 모아 배로 가서 감녕을 공격하려고 했다. 감녕은 이 소식을 들었지만, 고의로 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위 이야기의 다음으로는 이런 사정을 안 여몽의 모친이 '주군(손권)에게서 중대사를 떠맡은 네가 주군의 신하인 감녕을 너의 사사로운 노여움 때문에 죽게 한다면 설령 주군께서 힐문하지 않더라도 그 행동이 신하된 자로서 할 도리가 아니다'라며 여몽을 만류하였고. 여몽은 본디 지극한 효자였으므로, 모친의 이 말을 듣고 곧 마음을 풀고는 감녕의 배로 가서 웃으며 감녕에게 '흥패(감녕의 자), 어머니께서 그대를 식사에 초대하셨으니 어서 올라오시오!'라며 화해를 청하였고, 감녕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고 흐느끼며 여몽에게 사과하고는 여몽과 그의 어머니와 함께 온 종일 즐겁게 지냈다는 뒷이야기가 전한다.

3. 감녕의 나이


그 맹렬한 무용에 거칠고 사치스러운 해적의 이미지를 더해 호쾌한 건달 청년 쯤의 이미지로 묘사되지만 익주에서 관리를 지내다 사임하고 20년 동안 수적질을 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미 유표에게 임관하는 194년의 시점에서 최소한 40대 이상의 나이였을 것이다. 194년에 40 전후라면 대충 조조, 원소와 비슷한 연배다. 보통 할아버지로 묘사되는 장소가 156년생인데[8], 오히려 감녕이 장소보다 몇살 많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단, 수적 두목 생활이 '20년'간 계속되었다는 표현에서 20년이라는 것은 정확히 20년이 아니라 대충 이십년 가까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도 높으니까 몇 년정도 더 적게 잡을 수는 있다.[9] 또 유표의 지원 아래 유장의 권력세습에 반기를 들었다가 형주로 달아난 촉의 호족 감녕이 본 항목의 감녕과는 동명이인이라고 가정하면 또 4, 5년 정도 어리게 볼 수 있다.
또한 겨우 15, 6세의 어린 나이에 군에서 천거되어 관리가 되었고 커리어를 엄청나게 빨리 시작했다는 가정도 할 수 있는데,(약관 20세에 천거되는것도 대단한 속성코스다.)사실 10대 소년이 장리로 천거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며, 현승도 아니라 군승, 그것도 꿰찬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어쨌든 가능성이 0은 아닌 이상, "나의 감녕은 이렇지 않아!" 를 외치며 최대한 어리게 보려고 우긴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호쾌한 청년 이미지가 익숙하긴 하지만 감녕의 나이를 어떻게든 최대한 어리게 잡으려고 해도 손교와 싸움난 일화를 보았을 때 적어도 손교보다는 1세대 위, 손교의 아버지뻘의 나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수에서의 맹활약은 오히려 노익장의 대표주자로 봐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 하지만 창작물에서는 나이가 별로 많지 않게 묘사되어 버린다.절충안을 따지면 160년대생

연의에서는 222년 이릉대전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강실록에 따르면 215년에 죽었다고 한다.[10] 결국 감녕은 병으로 죽은게 아니라 늙어죽었다고 봐도 앞뒤가 맞아버린다.

4. 감녕전의 순서 문제

건강실록에 따르면 감녕은 215년에 죽었는데 감녕전의 마지막 부분의 순서는 상당히 이상하다. 일단 묘사한 사건 순서로 배치하되 다른 전에 나오는 시간을 써보도록 하자.

  • 강릉에서 조인과의 전투 (208~209)
  • 익양대치에서 관우를 막음(215년)
  • 주광을 물리친 환성전투(214년 5월)
  • 유수구에서 100명으로 조조 기습 (212~213, 214년 7월, 216~217 중 하나)
  • 합비 공방전에서 소요진 전투(215년 8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익양대치의 이야기인데 오주전의 경우 익양대치를 214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선주전과 요립 전의 의견에 따라 익양대치를 215년으로 할 경우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걸 국지집해의 역주에서는 감녕이 관우뢰를 만든 것은 옛날 일이라고 칭했다.

만약 관우뢰를 만든 것을 옛날이라고 한다면

  • 강릉에서 조인과의 전투 (208~209)
  • 익양에서 관우를 막음(209~214사이)
  • 주광을 물리친 환성전투(214년 5월)
  • 유수구에서 100명으로 조조 기습 (214년 7월)
  • 합비 공방전에서 소요진 전투(215년 8월)

가 되어 순서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자치통감에서는 그래서 그런지 감녕의 일화 중 관우한테 침 뱉겠다고 하는 부분이나 유수구, 합비에서의 일은 등장하지 않는다.



5. 대중문화 속의 감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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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승(丞)은 군을 다스리는 태수의 업무를 보좌하는 관직이다.
  • [2] 삼국지집해에서는 저 햇수가 말이 안 된다고 부정한다.
  • [3] 감녕은 본래 수적, 협객 출신이었으므로 사적으로 그를 따르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 [4] 그러니까 변방으로 파견을 보내줄 테니, 도망치든 남든 네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였다. 물론 감녕은 기회를 찾아 도망쳤다.
  • [5] 자세한 내용은 주광 참고
  • [6] 유수구 전투에서 능통을 구하기 위해 화살을 쏴 악진의 얼굴을 맞혔다.
  • [7] 황충은 오히려 활로 킬수 올린 게 없다. 모두 썰어서 킬수 올린다.
  • [8] 아이러니한 것은 반대로 청년장수로 묘사되는 손견과 이 장소가 동갑이라는 점이다. 손견의 경우는 40살도 다 채우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청년장수로 묘사된 것이긴 하지만.
  • [9] 저 20년이라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되는 게 삼국지집해에서는 선후관계를 유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도망친 후에 수적생활을 한 것으로 해석하여 2가 덧붙여진 거라 해설한다.
  • [10] 반장전에 따르면 감녕의 병사를 받는 시기가 관우토벌 이후라서 확실히 215년에 죽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