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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last modified: 2019-02-27 16:13:55 Contributors

Contents

1. 백두산 북쪽과 서쪽의 만주 일부분 지역을 일컫는 말
1.1. 개요
1.2. 간도 국경 문제
1.2.1. 백두산 정계비
1.2.2. 조선 말 & 대한제국
1.2.3. 일제강점기/광복 직후
1.2.4. 현대
1.3. 간도와 북한
1.4. 간도의 한민족
1.5. 관련 항목
2. 강원도 (북한) 앞바다의 섬

1. 백두산 북쪽과 서쪽의 만주 일부분 지역을 일컫는 말

1.1. 개요

보통 우리가 말하는 간도는 두만강 북쪽 지역의 북간도(동간도)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는 발해가 망한 후 여진족의 거주지였다. 다만 윤관이 개척한 동북 9성의 위치 비정에 따라 고려 예종 때, 공민왕 때 수복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동북 9성 항목 참조.

간도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은 때로는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는 관계에 있었다. 여진족이 부족 단위에서 국가로 통일되어 후금이 되고 청나라가 되면서 간도를 포함한 만주 일대는 만주족의 발상지라 하여 신성시되었다. 조선 숙종(청나라 강희제) 때, 청의 출입 금지 지역에 조선인의 월경이 잦아지고 국경 분쟁이 생기자 두산정계비로 국경을 정했다.

그러나 조선 말기 / 대한제국두산정계비의 비문을 놓고 분쟁이 생겼다. 이 문제는 1909년 조선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가 청과 간도 협약을 맺으면서 일단락되었다. 후에 일제가 패망하고 간도 협약이 무효화되면서, 북한과 중국은 조중변계조약을 맺고 현재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옛날에는 발해가 영유하거나 말갈, 여진, 만주족 등 기타 무수히 많은 유목민들이 거쳐간 땅이었지만 지금은 중국의 영토가 되어 있다.

1.2. 간도 국경 문제

1.2.1. 백두산 정계비

조선 숙종 때, 몇몇 조선인들이 백두산 일대의 무인지역에 넘어가 살던 것이 청과 조선 양국간의 문제가 되었다. 이에 청과 조선은 관리를 파견해 두 나라의 국경을 확실하게 정하기로 했다.

두 나라는 백두산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두만강이 두 나라의 국경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장에 파견된 조선측의 주요 관리들은 노인이 어찌 산에 오르겠는가라며 제지하는 청나라 대표인 목극등에 의해 백두산에 오르지 못하였고, 결국 청의 관리 목극등이 혼자서 현장 답사를 하고 비석을 세웠다.

그런데 목극등은 물의 지류를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고 저게 두만강이겠거니 하고 대충 눈여김만 하고 비석을 세웠다.

접반사 박권이 치계하기를,“총관(목극등)이 백산(백두산)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로 삼았으며, 토문강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의 뜻이다. 도신과 빈신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 숙종실록 51권, 38년(1712) 5월 23일 1번째 기사

즉 목극등은 '토문강 = 두만강'으로 파악하고, 압록강 - 두만강 선을 국경선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조선 정부에서도 이견이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조선에서 국경선 푯말을 박던 중, 목극동이 본 토문강은 두만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점점 내륙 동북쪽으로 흘러가는 다른 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당황해 논의가 벌어졌는데, 이 때의 인식을 보면 국경선을 두만강으로 보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때 함경 감사 이선부가 백두산에 푯말 세우는 역사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하였다. 겸문학 홍치중이 일찍이 북평사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상소하여 그 곡절을 진달하기를,

“신이 북관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 (중략) …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 숙종실록 52권, 38년(1712) 12월 7일(병진) 3번째 기사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 =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과 달리,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어 두만강의 원류와 다른 물이었다. 근데 목극등이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로 해서 길을 갔기 때문에 마치 두 지류가 같은 지류인 양 취급되었고, 이를 기준으로 정계비가 세워졌다.

이에 따라 조선은 경계를 알리는 푯말을 세웠는데, 재확인 차원에서 이번에는 하류까지 내려가는 답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신이 여러 차사원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 허양과 나난 만호 박도상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목극등)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 (중략) …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강역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이는 마땅히 징치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廟堂, 의정부)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유가 연석에서 아뢰기를, “목차(목극등)가 정한 수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하소서.”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같은 기사

다시 말해 목극등이 잘못 잡은 물길이 멀리서 두만강으로 합해지는 것도 아니고 두만강과는 전혀 상관 없이 저 멀리 만주인들의 땅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아마도 송화강 상류 별개의 토문강이라고 한국 사학계에서 주장하는 강이 이 강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 정부에서는 분명히 이 상황을 국경선이 잘못 정해진 상황으로 파악하고, 청과의 외교 마찰도 우려하고 있었다.

이후 이 문제의 처리에 관해서는 실록에 이 기사 이후에 벌어진 일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확인한 후 취조당하는 사람이건 조선 조정이건 일관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목극등이 정한 (두만강이 아닌) 수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의 수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지류 중 어느 것을 국경으로 정해야 하나' 정도만이 추가적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이는 파견 이전 강희제가 국경에 대해 남긴 발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장백산(백두산)의 서쪽은 중국과 조선이 압록강을 경계로 하고, 토문강은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흘러나와 동남 방향으로 바다로 들어가, 토문강의 서남은 조선에 속하고 동북은 중국에 속하니, 역시 강으로 경계를 삼고 있다. 단지, 압록강과 토문강 등 두 강 사이 지방은 다 알 수 없다." - 청사고 526권 속국 1

사료에 따르면 이미 국경이 압록강 ~ 토문강을 경계로 하고 있음은 일찍이 알려져 있던 바이지만, 그 사이 구간이 명확하지 않아 재조사를 명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 어전회의 기록을 보면 당시 조정 중신들은 두만강이 국경이라고 인지하고 있었고, 당시 청나라불법 침입 한 조선인들을 강제 송환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 조선의 행정력이 간도에 미쳤다는 증거는 없다. 게다가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등, 한국에서 보유한 대다수의 지도에는 간도가 누락되어 있다.

백두산 정계비 건립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고.

1.2.2. 조선 말 & 대한제국

조선 말, 조선인들이 혼란한 국내 사정을 피해 간도로 불법 이주해 살면서 두 나라간에 다시 영토 문제가 발생한다. 월경하는 인원이 하도 많아지자 결국 조선은 두만강 너머의 국경에 멋대로 지계를 발급하고 월경을 인정해주기로 한다. 만주 일대를 봉금 지역으로 지정했던 청나라는 1881년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자기 영토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런데 청의 봉금 지역은 만주 전체가 아니라 남만주 일부였다. 청의 엄격한 봉금지역에 조선유민들이 메탈기어 솔리드 찍어가면서 잠입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어찌되었든, 청은 이 지역에 계속 살던 조선인들을 인정하고 대신 청의 백성으로 귀화시키려했지만, 조선에서는 이것을 막고 청과 다시 국경 교섭을 시작한다. 조선과 청은 몇 번의 감계회담을 갖는데, 청은 두만강이 국경이니 그 원류를 밝혀 국경을 정하자고 했고, 조선은 비석에 새겨진대로 토문강을 국경으로 정하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조선측의 주장대로라면 만주지역이 죄다 조선 땅에 들어가게 생겼으니 당연히 청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결국 회담은 결렬되고 만다. 이후 국경이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은 곳을 제외하고 청은 두만강 유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행사했다.

그런데 1890년대 청일전쟁의 패배로 청이 급격하게 쇠퇴하였는데, 이 시기에 대한제국은 간도 지방을 영토로 확정지으려고 했다. 제국놀이 한반도 왕조들이 중국 골골거릴 때 뒤통수 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뭘 새삼스럽게. 발해라든가 1차 요동 정벌 이라든가

사실 이러한 국경분쟁은 근대적인 국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이다. 서양식 국경개념이 들어오기 전의 국경개념은 점이지 선이 아니고, 그 사이에 공지를 두어서 충돌을 방지했다. 간도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공지에 포함된다. 청이 갑자기 국경정하자고 찾아온 것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러시아와 청의 국경을 정하는 과정에서 조선간의 국경도 확정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대충 국경선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충 정했고, 이 시기까지 확정적인 국경선은 없었다(...).

1902년 대한제국은 임의적으로 간도 관리사를 파견해 현지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대한제국과 청은 다시 외교분쟁에 돌입했는데, 이는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잠시 중단된다. 한편으로 대한제국은 1902년 러시아와 공동통치협약안을 작성하여 간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는데, 러시아 입장에서는 의화단 사건으로 만주에 파병하는 등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어떻게든 뻗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러시아가 이런 조약을 대한제국과 맺은 것은, 이 다음 목표는 한반도를 상정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러시아의 성향을 보면 청나라를 통과하지 않고 연해주로 가는 짧은 길을 내기 위해서일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 러일전쟁 이전에 러시아의 입지가 감소했는데, 이유는 청의 산둥반도를 삼키려고 들었다가 외교적으로 왕따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러일전쟁 항목 참고.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간도 문제는 일본의 관할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은 간도를 일단 한국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대한제국을 먹으면서 간도까지 낼름 먹으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일본은 간도가 한국령이라는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은 만주의 철도 또한 시급한 문제였다. 일본은 새로운 철도 부설권과 러시아가 남기고 간 철도의 경영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만주 철도와 간도를 저울질하던 일본은 간도보단 철도 쪽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하에 청으로부터 철도에 관한 이권을 보장받고자 했다. 일본과 대립하던 청은 일본이 간도 문제를 양보하면 철도 문제를 협조해주겠다고 전한다. 이에 청과 일본은 만주 철도 부설에 관한 협약과 그 유명한 간도 협약을 체결한다. 간도협약이 원인무효라고 해도 그 효과는 단지 동 협약 이전의 법적상태로 돌아갈 뿐이다. 다시 말해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만으로는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간도영유권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는 것.

청은 어차피 조약 이후 15년만 지나면 일본이 부설한 철도를 국유화하기로 했으므로, "드디어 영토 문제도 확실히 매듭짓겠다, 철도도 나중에 우리 것이 되겠다, 별 손해가 없네?"라고 생각하고 조약을 체결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청나라는 얼마가지 않아 망해버렸다.(...)

1.2.3. 일제강점기/광복 직후

간도지역에는 한국인/조선인이 계속 거주했다.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간도성으로 편재되기도 하였다. 간도성의 주민은 대부분 한국인과 소수의 일본인이었다.

광복 이후 일부는 귀국하고 남은 사람은 북한 편입을 희망하였다. 이후 국공내전 때 공산측의 기지가 되기도 한다.

아래에서 보듯 연길, 요동 등의 북한 편입이 소련에 의해 진행되기도 했으나, 국공내전 이후 스탈린이 마오쩌둥을 인정하였고 6.25 전쟁 이후 북한이 중국군의 원조로 겨우 살아난 이후 주민들의 독립론(북한 편입론)은 쏙 들어갔다.(...)

1.2.4. 현대

간도를 둘러싼 여러가지 정황에도 불구하고 일부 한국인들은 백두산 정계비에 새겨진 '동위토문'의 토문강이 현재의 송화강이라고 주장하며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고등 교과목인 국사한국근현대사에서는 대한제국의 간도 관리사 파견과 간도협약에 관한 사실만 교과서에 실어놓고, 마치 간도가 조선 고유의 영토인 것처럼 묘사해놓았다.-- 다만 최근의 교과서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적어져 어느 정도 간도가 중국땅인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물론 증산도나 자칭 재야사학자들에게는 그런거 없다

사교육 강사들 사이에서는 인식이 미묘하게 다른 편이다. 설민석의 경우 우리나라의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고종훈의 경우에는 "당시 조선에서 생각하던 간도는 두만강 이북의 조그만 유역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쑹화강 지류의 지역이라고 하니 서로 당황한 것으로 본다. 현재 우리가 아는 그 간도는 중국 지역이라고 본다."라고 하며 이전에 있었던 간도는 우리땅 운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본다.

토문강 = 두만강이라는 사료도 조선의 실록, 연려실기술, 여러 지도에서 나타는데,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이 말은 세태가 직접 그때에 목격한 역관(譯官) 김경문(金慶門)에게서 얻어들은 것이니 거의 믿을 만하다. 토문강은 두만강이다." 간도 귀속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도 이미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의 근거로 삼았다는 기록이 명확하기에 사실 현재 대한민국이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는 매우 어렵다.

마이너하긴 하지만 압록강 넘어 서간도까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청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중국 전도 + 조선 지도(이 지도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가 프랑스에 전해지면서 만들어진 당빌 지도에 압록강 이북 지역에 점선으로 선(프랑스 선교사의 이름을 따 레지 선이라고 함)이 그어져 있기 때문인데, 이것이 조선과 청의 국경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당빌 지도는 원래 당빌이 중국 풍속 관련 책의 삽화로 그린 것을 따로 묶어 책으로 낸 것으로 여기에 이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는데, 청이 조선과의 분쟁을 막기 위해 조선 국경 밖에 공백지를 두었다고 한다.

즉 청은 병자호란 이후 조선 국경 밖 백여리의 땅을 비우고 그 경계에 책을 쌓았는데 그 책을 그린 것이 바로 레지 선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건 조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전통적 시각에서 보면 청의 국경은 황성이고, 조선의 국경은 의주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양국 간의 공지를 두어서 충돌을 막는다. 그런데 의주는 국경도시인 반면 봉황성은 압록강에서 상당히 떨어진 지점인 만큼, 즉 청나라 땅만 비워서 공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맞다. DMZ

청이 자국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 정책을 펴 간도를 비운 것을 빌미로 청은 간도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했고 그 자리에 조선인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조선 영토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어떤 일본인들은 조선조의 공도 정책을 펴 섬을 비운 것을 빌미로 조선이 독도를 포기했고 그 섬에 일본인이 들어갔기 때문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와 같다.

역사적인 정통성을 떠나서 실질적으로 간도를 가져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한국에 있는가에 대해선 의문점이 많다. 간도전체에 살고 있는 중국인, 한족은 227만명이 넘어가 간도의 조선족들보다 한족들이 더 많은데 이 중국인들이 과연 한국의 지배를 받아들일리도 없고, 설령 간도에 사는 중국인들이 대한민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상황이 오더라도, 하나의 중국의 기치를 내거는 중국 때문에 사태는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간도 관련이든 독도 관련이든 언급되는 것이 '100년 실효 지배시 다른 나라는 그 땅에 대해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이론인데, 2009년 9월 4일자로 중국의 실소유 100년이 되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2009년 이 떡밥이 부풀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판결례로는 그런 거 없다.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실소유 100년이니 뭐니 언급한 판결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

또한 아르헨티나 역시 영국포클랜드 제도 점거 100년이 한참 지난 뒤에 반환을 요구한 사례가 있다. 2009년 9월 4일에서 5일 사이에 연합뉴스를 비롯한 몇몇 언론에서 간도찾기 운동을 벌이는 시민단체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긴 했으나 당 기사에서도 학자들이 '근거가 부족한' 일이라며 부정하고, 사회는 전혀 눈길도 주지 않는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었다.

2011년 9월 21일, 대한민국 정부가 지난 1909년 일본과 청이 맺은 간도협약은 무효라고 밝힌바가 있다.

사실 이쪽보단 두만강 수위에 따라 오락가락 하는 녹둔도가 더 중요하다. 이 쪽은 아예 북 - 러간 협정이 끝난 상황이지만, 간도보다 녹둔도가 더 조선의 영토라는 근거가 많이 남아 있다.

사실 널찍한 대륙의 일부을 '간도(間島)'라 하여 '섬(島)'으로 칭한 자체부터가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조선은 월경한 사람들을 잡아 처벌했는데, 이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변명거리가, 강을 건너기는 했으나 국경을 넘어 간 것이 아니라 강 가운데 있는 섬에 다녀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조선인들이 간도로 넘어갈 즈음에 두만강의 하중도도 개발이 되었다. 실제로는 강 건너 중국에 갔다 온 것이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강 중간에 있는 '사이섬'에 다녀왔다고 하게 되고, 이것의 의미가 차차 변하여 두만강 너머 특정 지역을 간도(間島, 사이섬)라 부르게 된 것.

현재 중국은 '간도'라는 명칭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은 경술국치 전 통감부 시절에 간도 지방의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간도파출소를 두어 무장병력을 이 지역에 주둔시키고 있었고, 경술국치 후에는 간도 총영사관을 두었었으며,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세워진 이후에는 이 지역을 '간도성'이라는 행정구역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즉 중국에게는 '간도'라는 명칭 자체가 과거 일본의 침략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2012년 시점으로 고등학교 한국지리 교과서에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대목이 있는데 간도 중 북방고토지역이 북만주 끝까지 펼쳐져 있다. 수업자료 중 간도를 중국이 불법점거하고 있으며 되찾아야 한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그리고 역사 왜곡으로 악명 높은 이덕일을 간도에 대한 레벤스라움과 유사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간도는 을사늑약이전까지는 조선땅이였는데 조선총독부세력이 그걸 부정하고 있으며, 간도가 조선땅였다는 것을 부정하면 비국민이며 국가보안법으로 잡아가야하며, 간도 영유권을 부정하는 정권은 뒤엎어야한다는 주장이다. 자세한 건 덕일/간도왜곡항목 참고.

이렇게 써놨지만 사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간도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일단은 우리나라와 간도 사이에 북한이 가로막고 있고,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지 않기 때문. 다만 추후 통일이 되면 간도와 관련된 문제가 제기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크게 공론화될 공산이 그닥 크진 않다.

1.3. 간도와 북한

사실 해방 이후 소련의 정치적인 안배로 인해서 간도가 북한에 귀속될 뻔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간도 주고 녹둔도 빼먹기

일본의 패망 이후 간도는 국공내전으로 국민당 및 중공군과 그를 후원하는 소련군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간도는 중공군이 점령하였다. 하지만 간도를 자국이 관리하려는 중국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소련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간도를 북한에게 편입시키는 것으로서, 소련은 비록 일면으로는 공산주의 맹방인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후 자국의 패권을 위협할 수도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주의하고 있었으며, 음양으로 중국을 약화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중국과는 별개의 민족이며 북한과는 동일한 민족이 다수 분포되어 있었던 간도를 중국에서 분할하여 북한에 편입시켜 중국을 약화시키고 북한을 강화하여 중국을 견제하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중국과 북한의 균형을 맞추고 자국의 유일 패권 확립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국공내전으로 인하여 만주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시국을 이용하여 소련은 중국을 배제시킬 수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북한과 소련이 참여한 이 제1차 평양협정(1947.5)에서 북한에게 랴오닝성(遼寧省), 안둥성{安東省, 현 단둥(丹東) 부근} 등 요동반도와 남만주 전체를 편입시키기로 협정하였다.

그리고 제2차 평양협정(1948.2)에서는 요동반도를 제외한 안둥성, 지린(구 만주국 행정구역), 간도(구 만주국 행정구역, 현 옌지 부근)의 3개의 자치구를 북한에 귀속시키기로 협의하였다. 사실상 전 간도를 북한의 영토로 귀속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에 따라 북한의 정규군이 옌지(延吉), 무단강(牧丹江), 무링(穆陵) 지역에 주둔(1948.7)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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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중화민국 국방부 2청이 외교부에 보낸 문서의 부록 지도. 지금까지 언급된 자료는 1948년 7월 10일 중화민국 국방부제2청이 중화민국 외교부에 제출한 문서이다. 당사국인 소련, 북한, 중국의 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이 사실을 중화민국에서 입수할 수 있었는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획정하고자 하는 구역이 강과 산을 경계로 하지 않고 상당히 임의적으로 정해진 점과 기존에 안동, 길림, 간도라는 행정구역이 사용된 적이 없는데 뜬금없이 등장하는 점 역시 밝혀내야만 실제로 할양이 논의된 일인지, 중화민국의 엄살 혹은 과장인지 밝힐 수 있을 것이다. - 박선령 (2006) - '소련이 "간도 지역을 북한의 영토로 획정"한 중화민국 외교부 사료와 간도문제에 대한 연구 과제'를 참고함.

이러한 소련의 옹호와 지지에 힘입어 북한은 고구려 이래의 고토이자 한민족 구성원의 다수까지 포함한 간도 영유는 물론이고, 남북 간의 관계에서 강력한 우세를 점할 수 있는 위치까지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이같은 낙관적인 상황은 북한의 김일성으로 하여금 강렬한 공산통일의 야심을 품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작용하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러한 이유들을 원인으로 하여 결국 2년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잘 아시다시피 전쟁 초반은 북한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북한은 중국의 구원에 의존하여 간신히 북진통일을 면하고 휴전을 체결하고 마는 패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종전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의 국력과 국가적 위신은 크게 추락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중국의 참전으로 인해 북한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이 매우 커져서 중국에게 상당 부분의 지분을 양보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간도의 북한편입은 말 그대로 계획으로써만 종결되었다. 간도는 명실공히 중국의 영토가 되어 옌볜조선민족자치구가 설치(1952)되었다가 옌볜조선족자치주로 변경(1955)되었으며 그 땅의 한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인 재중교포(조선족)로써 현존하게 된다.

조중변계조약(1962)으로 북한과 중국은 간도의 중국 소유를 인정하였으며 백두산천지를 경계로 하여 북한이 2/3, 중국은 1/3로 분할하기로 협약하였다. 이 조약은 비밀조약으로써 양국 경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많았으나 최근 조약이 공개됨으로서 확인되었다. 이리하여 대한제국 이래로 간도를 한반도 국가쪽에서 먹으려고 했던 시도는 다시 한번 무위로 돌아가게 된다.출처

하지만 역설적인 것은, 백두산천지를 제외하면 이 조약에서 합의한 나머지 경계선은 1887년에 있었던 조선청나라의 감계회담에서 조선 대표 중하가 주장했던 바로 그 선이라는 것. 75년 전에 합의했으면 그 뒤로 할 필요가 없었던 싸움을 한 셈이다. 조중변계조약을 두고 일부에서는 '북한중국에 간도를 팔아넘겼다'라고 곡해하기도 하는데, 상기 내용을 읽어보면 실무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중변계조약은 천지의 영역만 아니라 압록강과 두만강의 하중도도 대부분 북한에게 넘기는 등 워낙 북한에 유리하게 되어 있어서 중국 내에서도 다시 조약을 맺어야한다고 불만이 많다.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통일이 되면 조중변계조약 대신 새로운 국경 조약을 맺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중국이 바라는 일이다. 사실 새로 조약을 맺으면 오히려 영토가 좁아질 가능성도 크다.

1.4. 간도의 한민족

불법 월경이었든 합법 이주였든 어지러운 국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조선 말기 간도로 이주하는 주민이 늘었고, 이 현상은 오히려 지주 전호제가 심화된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19세기 중엽부터는 청과 러시아가 간도와 연해주에 개간 장려 사업을 펼쳤기 때문에 이주는 가속화되었다.

이후 1907년부터 1911년까지 존속했던 신민회 등의 활동으로 만주에 독립군 기지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간도원보간도, 연길, 명동 등은 이후 독립 운동사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 발돋움한다.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이 활성화되고 국내 진입 작전 또한 자주 이루어졌으나, 1920년 일본이 훈춘 사건을 빌미로 군대를 대거 파견해 독립군 소탕 작전을 펴면서 독립군은 시련을 맞았다(청산리 전투 또한 전과는 둘째 치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여기에 연해주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으면서 독립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래도 일본이 지배하는 지역이 아니면서 한민족이 가장 많이 살았던 지역이기에 3부 설립 등 독립 운동은 지속되었으나 1925년 장쭤린 - 쓰야 협정이 맺어지면서 독립 운동은 다시 암흑기를 맞았다. 그나마 1920년대 후반 장쭤린이 일본의 테러로 폭사당하고 장쉐량국민당에 가담하면서 협정이 파기되었고, 마침 신간회 등으로 우 합작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었기에 이에 힘입어 독립군 또한 통합 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1932년 만주국이 설립되면서 이 지역의 독립군들은 대개 중국군 혹은 공산주의 부대와 연합해 활동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 가면 대개는 중국 내륙으로 거처를 옮겼고, 일부는 간도와 만주 지방에 남아 유격전을 전개하기도 했으나 당연히 세력은 이전보다 확연히 약화되었다(이렇게 암울한 상황이었기에 보천보 전투김일성이 그렇게 뜰 수 있었던 것이다). 1940년에는 사실상 간도에서는 독립군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전쟁 이후에는 국내로 귀국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남은 사람 또한 많았다. 현재는 중국 내에서 '중국조선족'으로 소수민족 대우를 받으며, 만주 지역의 일부는 '조선족 자치구'로 묶여 있다. 참고로 중국어에서 조선족은 조선민족 즉 Korean 전체를 가리키므로 '중국'조선족이 중국에서 공식명칭이다.

2. 강원도 (북한) 앞바다의 섬

間島

강원도(북한) 고성군 장전읍(북한 행정구역상 고성읍) 앞바다에 있는 섬이다. 면적은 0.12㎢ 정도로 개첨도, 남송도와 함께 삼도(三島)를 이룬다. 북한 지도에는 사이섬이라고 되어있다.# 연안 일대는 수산업의 중심지라고 한다.

참고로 네이버 백과사전(두산백과)에는 화양군 고성읍에 있다고 되어 있지만# 명백한 오류. 강원도에는 화양군이 없으며, 비슷한 이름인 회양군은 바다와 접하지 않은 내륙군이다.

1번 항목과 한자 이름까지 똑같기 때문에, 이를 이용한 낚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