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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바티스투타

last modified: 2015-07-12 05:45:56 Contributors


이름 가브리엘 오마르 바티스투타 (Gabriel Omar Batistuta)
생년월일 1969년 2월 1일
국적 아르헨티나
출신지 레콘키스타
포지션 스트라이커
프로입단 1988년 뉴웰스 올드 보이스 입단
소속팀 뉴웰스 올드 보이스(1988~1989)
리버 플레이트(1989~1990)
보카 주니어스(1990~1991)
ACF 피오렌티나(1991~2000)
AS 로마(2000~2003)
인터 밀란(임대)(2003)
알 아라비(2003~2005)
국가대표 78경기 56골

소개


통칭 바티골. 애칭은 '천사'[1], 사자왕(Re leone)[2],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클럽 통산 441경기 254골. A매치 78경기 56골.
1990년대를 풍미한 세계 최고의 공격수. 한마디로 90년대 초중반은 바티스투타, 90년대 중후반은 호돈신 호나우두가 지존이였다.

185cm 장신이라 제공권은 기본이고, 국적이 아르헨티나...저런 장신 선수가 현란한 아르헨티나 스타일로 볼을 찬다. 그것뿐이면 괜찮은데, 이 사람 주의가 왜 슛을 약하게 쏘는가?다. 글자 그대로 대포알 같은 슈팅을 날린다. 단순히 대포알 슈팅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가슴을 뻥 뚫게 만드는 시원스러운 슈팅은 클라스가 달랐다. 바티스투타의 인기는 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슈팅에 있었다. 축구에 있어서 하일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슛이고 바티스투타는 그것을 가장 임팩트있게 할 수 있는 선수였다.
여기까지도 참아줄 수 있는데, 이 사람 주장이 두번 이상 볼 터치는 사치다!다. 원터치 슛, 원 터치도 귀찮으면 그냥 노 터치로 벼락같이 찬다. 이러니 골키퍼로선 제대로 반응조차 못하고 멍하니 골을 먹기 일수였다.

맞고 뒈져라 식의 강한 슈팅 이외에도 직접 프리킥도 잘 찼으며, 헤딩 실력 또한 엄청났다. 정통 스트라이커의 표본. 최후의 로맨티시스트라는 별명은 다른 이유로 붙은 거지만, 현대축구의 흐름이 바뀌기 이전, 스트라이커의 로망을 마지막으로 보여준 선수다.

그런데 이 선수의 치명적 결함이 뭐냐 하면 패스를 절대 안한다는 것이다.탐욕 그리고 온니 원맨플레이. 굳이 말하자면 패스를 아예 안 하는건 아니며 무엇보다 패스를 잘 못한다. 이는 바티스투타가 어릴 때는 다른 운동을 하다가 10대 초반에야 축구를 시작했다. 축구를 시작한 시점을 생각하면 그 정도 공격수가 된 것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으며, 못 하는 패스를 할 바엔 욕심을 부려서라도 걍 슛을 꽂아넣는게 낫다고 판단하였던 걸지도 모른다.(포포투 출처.)

후방에서 골과 거의 관계 없는 패스라면 모를까 직접적인 골 상황에서는 절대 패스를 안한다. 그렇다고 후방에 자주 내려오느냐 하면 그런것도 아니고...팀 플레이라고는 딱 최전방에서 뒷공간 노리기나 최적의 슈팅 위치 탐색이 전부이다. 근데 골을 잘 넣어서 이래도 상관없다.

이 때문에 요한 크루이프가 아예 대놓고 바티스투타는 패스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깠다. 토탈 사커의 숭배자이자 패스, 점유율 축구를 중시하는 꾸레이프 크루이프의 관점에서 바티스투타는 위대한 축구선수가 아니라 그냥 축구의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은 선수로 취급당한다.

그리고 친화력이 별로 없다는 것 역시 바티스투타의 결함이다. 이런 점 때문에 대표팀 동료인 클라우디오 로페즈와 에르난 크레스포는 같은 아르헨티나의 공격수였음에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로페즈같은 경우는 윙포워드이지만 엄청난 득점력을 가진 선수였는데도 대놓고 빵셔틀패스나 하라는 식으로 대해서 짜증이 났고, 크레스포같은 경우는 2002년 당시 폼이 바티스투타보다 더 좋았음에도 같은 타겟맨이라는 이유로 미움을 받아 벤치에 앉아야만 했다. 그나마 죽이 잘 맞는 아르헨티나 공격수라면 아리엘 오르테가 정도인데 오르테가는 친화력 안 좋기로는 바티스투타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이니...

마라도나는 둘의 사이가 좋지 못하자 저 두놈(바티와 크레스포)은 골방에 가둬놓고 한쪽이 숨질 때까지 서로에게 펀치를 날려야 한다.라고 디스. 요한 크루이프도 한 마디 했다. 크레스포는 2인자로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선수다. 특히 1인자가 바티스투타라면 더더욱.[3]

버 플라테보카 주니어스를 거쳐, 1991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함께 득점왕을 차지하며 세계 명문 클럽의 주목을 받았다. 결국 세리에 A ACF 피오렌티나로 이적한다.
이적 첫 시즌에 13골을 기록하며 순조롭게 리그에 적응했고, 이후 줄곧 절정의 골 결정력을 보인다. 26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한 적도 있지만, 오랜 세월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오히려 1994년 팀이 세리에 B로 강등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당연히 여타 명문팀에서 유혹이 따랐지만, 바티스투타는 피오렌티나를 위해서 모든 이적 제의를 거절하고, 세리에 B에서 16골을 넣으며 기어이 다음해 피오렌티나를 세리에 A로 재승격시킨다.

바티스투타가 남긴 훈훈한 미담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90년대 후반 세리에 A는 이른바 칠공주시대였다.[4] 일곱 팀이 한발만 삐끗해도 우승권에서 멀어지는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고, 피오렌티나도 그중 한 팀이었다. 하지만 끝내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고, 결국 피오렌티나는 재정 문제로 팀의 간판이었던 바티스투타와 이 코스타를 떠나보낸다. 바티스투타는 2000년 AS 로마로 이적해[5], 20골을 기록하며 결국 우승을 차지한다.[6]
이 시즌 AS 로마는 피오렌티나와 벌인 경기에서 1:0으로 이겼는데, 결승골을 넣은 선수가 바로 바티스투타였다. 평상시 기관총을 난사하는 골 셀러브레이션으로 유명했지만, 이날 만큼은 골을 넣고 멍하니 서서 눈물을 흘렸다. 친정 팀에 골을 넣어서 미안해서...
이날 한 신문은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란 찬사를 바쳤고, 바티스투타가 흘린 눈물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국내축구든 해외축구든 이적 문제를 놓고 온갖 잡음을 일으켜 끝내 팬들이 뒷목을 잡게 만드는 세태에 비한다면 실로 동화 같은 이야기다.

당시 다른 팀들, 맨유등으로부터도 오퍼가 왔었지만 왜 피오렌티나와 붙을 가능성이 있는 로마로 이적하였는지는 후에 포포투에서의 인터뷰에서 바티스투타가 밝혔는데, 맨유같은 곳은 자신의 힘이 아니더라도 우승을 얼마든지 할수있지만, 로마라면 자신의 힘으로 우승을 시켜줄수 있기에 로마를 선택하였다고 밝혔다.
피오렌티나의 재정문제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는데 우승컵 하나쯤은 제대로 들어보고 싶었기에...이적을 하기로 한것. 피오렌티나에서는 자신과 루이 코스타 만으로는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라한다. 하지만 30이 넘어서까지 피오렌티나에 남다가 간것만 보아도 피오렌티나에 대한 애정이 강하였기에 그러하였을것이다. 강등이 되어도 떠나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우승을 차지한 때를 기점으로 차츰 노쇠화로 인해 활약상이 줄었다. 결국 2003년 이탈리아 생활을 정리하고 카타르의 알 아라비 클럽으로 이적했다. 이적한 첫해 18경기 25골을 기록해 카타르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2005년 은퇴했다. 은퇴후에는 축구 관련 일에서 손을 떼고, 건설업에 종사중.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골 감각을 과시했지만, 마라도나 약물파동으로 선수단 분위기가 시망, 결국 16강 탈락한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절정의 골 감각을 과시했지만, 하필 상대가 거스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 결국 8강에서 탈락한다. 이때 통한의 슛이 하나 있었는데, 바티스투타 스타일로 원터치 슈팅을 날린 것이 그만 골포스트에 맞고 말았다. 바티빠들에게는 정말 잊혀지지 않는 통한의 슛. 골포스트에 맞은 공이 공중에 뜬 채로 거의 하프라인까지 튕겨나와 보는 이들의 눈을 의심케 할 정도로 강력한 슛이었다. 이탈리아의 크리스티안 비에리와 동률인 5골을 득점했다.
어지간한 공격수는 리그에서 좀처럼 기록하기 힘든 해트트릭을 월드컵 무대에서, 그것도 2개 대회 연속 기록하는 굇수였지만 결과는 안습.

그리고 대망의 2002년...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맞아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려는데, 아르헨티나가 모라토리움 선언. 망했어요.
우승 포상금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에서 비행기표 값도 마련해지 못하는 판이었다. 결국 바티스투타를 비롯한 선수들이 자비로 월드컵에 참가한다. 그런데 아르헨티나가 속한 F조 편성이...아르헨티나,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 바로 죽음의 조였다. 망했어요.
심지어 경기를 치룬 일본에서 데이비드 베컴 광풍이 일며, 베컴과 그의 동료들인 잉글랜드 국가대표들은 거의 국빈 취급을 받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르헨티나는 듣보잡 취급을 받는 등 전반적으로 여건이 불리했다. 일본이 잉글랜드를 겁나게 응원했으니, 절반 정도는 홈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상황.[7]
그래도 당시 아르헨티나 스쿼드와 남미예선 과정이 워낙에 좋았기에[8] 수많은 팬들과 전문가들은 아르헨티나는 거의 100% 조별 예선을 통과하리라 예상했고 심지어 프랑스를 제치고 우승후보 0순위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F조 첫번째 경기에서 아르헨티나는 나이지리아와 0:0 팽팽한 싸움을 벌이다 결국 바티스투타의 극적인 결승골로 1승을 얻는다. 반면 잉글랜드와 스웨덴이 1:1로 비기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듯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전에서 시뮬레이션에 의한 통한의 페널티킥[9]을 내주며 패배, 이는 오언이 마우레시노 포체티노에게 꾀병을 부린 결과였다.[10] 마지막 스웨덴전은 1:1로 비기며 1승 1무 1패로 탈락한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에겐 축구가 있다. 경제난에 고통받는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월드컵 개최기간 단 한달 동안이라도 희망을 선사하고자 했던 선수들은 결국 그라운드에 쓰러져 통곡한다. 후반전 발목 부상으로 교체된 바티스투타 역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당시 많은 축구팬을 가슴 뭉클하게 했다. 물론 이걸 지켜보던 바티스투타 팬들 또한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일세를 풍미했던 실력에 비해 정작 바티스투타 개인이 얻은 영예는 적었지만, 절정의 기량 못잖게 인간미 넘치는 모습으로 인해 아직도 많은 축구팬들에게 사랑받는다.
가장 큰 성취를 이룬 때는 아마도 AS 로마에서 우승한 때겠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피오렌티나의 레전드이며 살아 있는 전설.

여담으로 바티골이란 애칭은 중계를 하다 보면 '바티ㅅ...골!'할 정도로 빠른 슛팅 때문이라는 통설이지만, 사실 유래는 아르헨티나 중계진이 당시 유행어에 맞춰 애드립을 친 것이라고. 그런데 막상 들어보니 그럴싸해서 팬들에겐 바티골로 굳어버렸다.
또 피오렌티나 시절 100경기 출장 기념으로 홈구장 앞에 실물 사이즈 동상을 세워준 일화도 유명하다. 현재 이 동상은 공식적으로는 '철거'했다고 하는데, 실상은 AS 로마로 이적한 뒤 상심한 팬들이 부숴버렸다고도 한다.

최근 월드컵 해설을 위해 남아공에 갔다가 강도를 당해 가진 돈을 싸그리 털렸다고 한다. 지못미.


최근 은퇴 직후 다리상태가 심각하여 절단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랜 선수생활로 다리 연골과 인대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집안에서 다니는 것 조차 힘들었다고. 철심을 박는 수술을 통해 다행이 절단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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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천사 가브리엘.
  • [2] 길게 흘러내린 금발.
  • [3] 크레스포는 전형적인 타겟맨인 바티스투타와는 다르다. 바티스투타는 항상 골만을 노리는 득점 사냥꾼인데 반해 크레스포는 포스트 플레이와 팀워크에 능한 선수다.
  • [4] AC 밀란, 인테르, 유벤투스, AS 로마, 라치오, 피오렌티나, 파르마
  • [5] 이적료가 약 400억원으로, 당시 축구 역사상 두번째로 높은 이적료였다 노쇠화가 시작될 나이인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금액이다.
  • [6] 로마 역사상 3번째이며 또 한명의 위대한 스타 프란체스코 토티의 유일한 우승이기도 하다.
  • [7] 사실 아르헨티나도 열렬한 응원을 받았으나 잉글랜드에 비하면 새발의 피. 참고로 2002 월드컵 당시 한국인들은 약팀을 위주로 응원했으나 일본인들은 일방적으로 인기 있는 팀들을 응원했다. 당시 잉글랜드, 브라질, 이탈리아, 독일의 경기들을 보면 이게 일본인지 응원받는 나라의 홈인지 구별이 안되는 상황. 심지어 에콰도르는 이탈리아와의 경기에서 국가연주 때 일본인들의 야유를 받았고 덴마크도 경기 내내 야유를 받았다. 스웨덴과 세네갈의 16강전때는 유명한 선수가 더 많은 스웨덴을 일방적으로 응원했고 심지어 일본인들은 잉글랜드의 국가를 따라불렀다!
  • [8] 라이벌 브라질을 쳐발라버리고 조 1위로 예선통과. 이때 브라질은 악전고투하며 3위로 올라갔다.
  • [9] 확실히 마이클 오언의 시뮬레이션이다. 이를 2006년에 데이비드 베컴이 인정했다. 베컴이 이것을 시뮬레이션이라고 인정하면서 같이 한 말이 내가 1986년 월드컵 당시의 마라도나와 같은 입장이였어도 손으로 공을 넣었다.라고 대놓고 말했다.
  • [10] 이 결과 월드컵 이후 포체티노는 두 번 다시 아르헨티나 대표팀 명단에 들어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