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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 마사이치

last modified: 2019-10-08 02:31:37 Contributors



최근 모습. 왼쪽은 송진우

이름 金田 正一(카네다 마사이치)
한국명 김경홍(金慶弘)
생년월일 1933년 8월 1일
국적 일본
출신지 아이치나고야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50년
소속팀 코쿠테츠 스왈로즈(1950~1964)
요미우리 자이언츠(1965~1969)
감독 롯데 오리온즈(1973~1978, 1990-1991)

1956년~1958년 일본프로야구 사와무라상
벳쇼 다케히코
(요미우리 자이언츠)
가네다 마사이치
(고쿠데스 스왈로즈)
무라야마 미노루
(오사카 타이거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결번
No.34

Contents

1. 소개
2. 이력
3. 기타
3.1. 일본 내 프로야구 단체 사조직 설립 주도
3.2. 동생 가네다 도메히로
3.3. 최동원과의 관계
3.4. 오치아이 히로미츠 와의 관계
3.5. 식성
3.6. 몸관리 비법
3.6.1. 컨디션 조절
3.6.2. 트레이닝
3.7. 쇼맨십

"소금의 가치는 소금을 다 썼을 때 알게 되고, 에이스의 가치는 에이스를 잃고 나서 깨닫게 된다."
고쿠데스 스왈로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 되면서.

1. 소개

金田 正一 (1933년 8월 1일 ~ 2019년 10월 6일)

한국명 김경홍. 귀화 후 이름 때문에 김정일(金正一)이라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으나, 귀화 전 이름은 김경홍이었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귀화하여 일본 국적을 가졌다. 일본프로야구 사상 사와무라 에이지, 이나오 카즈히사 등과 함께 가장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뽑히고 명예의 전당에도 전시되었다. 특히 수많은, 절대 깨지지 않을 기록들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통산 400승, 통산 4,490탈삼진, 14년 연속 20승의 일본 최고기록이다. 승수는 전설적인 대투수 사이 영월터 존슨에 이어 3위에 랭크돼 있다. 왕정치(오 사다하루)의 홈런기록은 지나치게 작은 홈구장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세계기록으로 인정하지 않는 메이저 리그 사무국에서도 가네다의 탈삼진 기록은 공인하여 기념공과 글러브를 미국 뉴욕 쿠퍼스타운의 명예의 전당에 전시하였다.

2005년까지 놀란 라이언에 이은, 국적과 리그를 불문한 세계 프로야구 탈삼진 역대 2위였으나 2005년 시즌 종료 후 메이저리그의 투수 로저 클레멘스가 통산 4,502탈삼진을 기록하면서 3위로 밀렸다. 2008년 시즌 종료 기준으로 라이언에 이은 탈삼진 2위는 통산 4,789개의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는 4,672개로 3위. 하지만 로저 클레멘스가 약빨로 판명났고 배리 본즈 수준의 비난을 받으며 맥과이어 수준의 바보취급을 받는 지금은 판국이 어떻게 날 지 모른다.[1]

400승이 어느 정도의 수치인지 잘 감이 안오시는 분들은 일본 프로야구 승수 2위인 요네다 테츠야(한큐 브레이브스)의 기록이 350승, 그리고 한화 이글스송진우가 210승을 달성하고 은퇴한 것을 보면 짐작이 가시리라 믿는다. 로테이션 개념이 부실했던 예전이었기에 가능한 기록이기 때문에 아마도 다시는 나오지 않을 대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장명부의 30승처럼 말이다.

선수생활 중에 가장 보람있던 일로 "선수생활 동안 단 한번도 연봉이 떨어져본적이 없다"는걸 꼽았다. 구단과의 연봉협상때 전년도의 성적이 아니라 해당시즌 자신의 목표를 내세워 금액을 정했는데 연봉이 떨어지지 않았던게 보람있었다는 것은 결국 선수생활 중 항상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뉘앙스에 가깝다. 고쿠데츠 스왈로즈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선수 말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해 V9에 힘을 보태며 예전 명투수의 위용을 살짝 보여주었다. 고쿠데츠 시절엔 지독한 약팀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투수였기 때문에 사실상 감독 머리 위에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가네다 덴노'

감독시절엔 1974년 롯데 오리온즈를 맡아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사실상 선수보다 더 큰 인기를 누렸던 롯데팀의 간판스타였다. 그리고 '퇴장의 대명사'로 불렸다. 성격자체가 워낙 불같아서 심판하고 대로일갈한 적이 많았고 1990년 세이부전때 투수의 보크 판정이 나오자 자기가 글러브끼고 마운드에 올라가서 그 동작을 해보이면서 '이게 뭐가 보크냐'는 제스처를 보이기도 했다.[2] 상대팀 외국인선수가 자기팀 투수의 사구를 맞고 달려들다 넘어지자 가네다 감독이 그 외국인선수의 머리를 냅다 걷어차기도 했다.

귀화했지만 나름대로 고국에 대한 정이 있었던 듯. 예전에 장훈백인천이 있던 도에이 플라이어스와 같이 롯데 오리온즈를 이끌고 한국에 왔을 때 같은 한국계였지만, 열렬히 환영을 받은 장훈에 비해 자신은 전혀 고국에서 띄워주지 않아 매우 서운해했다고. 최근 인터뷰 내용에 따르면 귀화한 것도 본인의 의지가 아닌 일본 사무국에서의 반강제적인 조치였다고 해서 더 아쉬웠던 듯 하다.

2. 이력

※ 아래의 글은 <이야기 일본프로야구>(조해연 | 지성사 | 1998.11.01)에서 발췌했다.

가네다는 1933년 생으로 아이치 현 교에이 상업고교 1학년 때 고시엔 대회에서 구원투수로 크게 활약하여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다음 해 지구예선에서 탈락하자 2학년 수료 후에 학교를 중퇴하고 1950년 초 프로야구 고쿠데쓰 스왈로즈에 입단했다. 양리그를 통틀어 최연소선수였으나 3∼4년 후에는 프로야구 최장신 선수로 자라게 된다.

입단 첫 해 가을 對 다이요 웨일즈 전에 선발 등판한 그는 뜻밖에도 완투승을 거두어 약관 17세의 소년투수로 프로 첫 승리를 따냈다. 이는 일본 프로야구의 입지전적 인물로 꼽히고 있는 연습생 출신의 전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 고 니시사와의 만 16세에 이어 두 번째 최연소 승리투수 기록이다. 400승을 향한 첫발을 내디딘 그는 시즌 후반에만 8승을 올렸다. 수뇌부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당당하게 투수 로테이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입단 2년째인 1951년 시즌에는 신인이나 진배없는 어린 투수가 강호 한신 타이거스노히트노런으로 제압하여 최연소 노히트노런 투수라는 귀중한 기록을 세우면서 22승을 거두었다. 연속 14시즌 20승의 테이프를 끊은 셈이다. 일찍부터 대기(大器)의 편린을 내비치던 그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기량도 일취월장했다. 1957년 8월 대 주니치 전에서 드디어 투수 최고영예인 퍼펙트경기를 달성했다. 프로야구사상 세 번째이고 최연소로 기록한 완전경기였다.[3]

그러나 이 경기 9회말 노아웃에서 주니치 대(代)타자의 하프스윙을 둘러싸고 야구 사상 최악의 트러블이 일어났다. 퍼펙트 직전의 궁지에 몰린 주니치가 주심의 하프스윙에 의한 삼진판정에 불복하여 격렬한 항의를 거듭하면서 경기속행을 거부하고, 과격하기로 이름난 나고야 팬들이 극도로 흥분했다. 대군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해 들어올 것 같은 공포 분위기로 바뀌자 결국 주니치가 승복해서 경기를 속행했으나 후속타자의 연속삼진[4]으로 퍼펙트 경기의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사태는 경기 종료 후에 벌어졌다. 관객들이 일제히 뛰어들어와서 미처 구장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라운드에 고립돼 있는 심판을 무차별적으로 집단폭행했다. 물론 주심이 가장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관중에 의한 불상사로는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난 투수다. 186센티미터의 장신인데도 근육이 그럴 수 없이 유연하고, 무릎과 허리는 용수철처럼 탄력이 있으며 팔이 유난히 길었다. 그 긴 왼팔에서 뿜어내는 묵직한 강속구와 칼날처럼 예리한 커브가 주무기였다. 경험을 쌓아가면서 투구 테크닉까지 몸에 익힌 가네다의 위력적 투구 앞에 내로라 하는 각팀 주력타자들도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보유하고 있는 가히 공전절후의 기록들과 공식타이틀 및 수상경력을 살펴보자.

우선 타이틀은 최다승리 3회, 최우수방어율 3회, 최다탈삼진 10회이고, 표창은 사와무라 상 3회, 베스트나인 3회, 일본기록은 통산최다승리 400, 최다탈삼진 4,490, 최다시즌 20승 이상 14, 최다완투 365, 최다투구횟수 5526회 2/3, 연속이닝무실점 64회 1/3, 최다탈삼진 10회, 통산최다패전 298, 통산최다여4구 1,808이고 센트럴리그 기록은 최우수방어율 3회, 최다승리 3회, 통산최다등판 944, 시즌최다완투 34, 통산 최다무실점승리 82, 경기최다탈삼진 16, 통산최다피안타 4,120, 통산최다피본루타 379, 통산최다실점 1,705, 통산 최다자책점 1,434, 통산최다보크 11, 시즌최다여4구 197이다.

희대의 대투수로서 피땀이 서린 고투 끝에 이룩한 찬란한 기록이 있는가 하면, 워낙 많은 경기에 나가다 보니 명예스럽지 못한 워스트기록[5]도 적지 않아서 기록을 살펴보는 데도 실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여기 열거한 기록 중에서 통산보크 11을 제외하고는 경신될 공산이 전무하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기록을 깰 만한 역량을 가진 투수가 없기도 하거니와 지금은 에이스투수 한 사람에게 과다한 등판을 요구하지 않고, 투수의 역할을 분담해서 전황에 따라 제한적으로 등판시키는 시대이므로 언감생심 누구도 도전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산 400승 및 4,490 탈삼진은 말할 나위 없이 위대한 기록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값진 기록이 14년 연속 20승 부문이다. 그는 입단 2년 만인 1951년의 22승을 시작으로, 14년간 내리 20승 이상씩을 올렸다. 투수가 아무리 몇 경기씩 연투를 예사로 하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단 몇 시즌을 이어가기 어려운 20승이라는 벅찬 기록을 14년 동안 중단 없이 유지한 경이로운 업적은 차라리 기적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어느 해인가 감독 배려에 의해서 정상이 아닌 구원등판으로 선발투수 몫이 돼야 할 승리를 빼앗다시피 해서 20승을 채워 빈축을 산 예가 있지만, 기록이 생명인 프로세계에서는 그런 사례가 간혹 있어 온 만큼 크게 흠 잡을 것까지는 없을 것 같다. 그는 투수이면서도 타격 부문 비공식기록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는 20년 동안에 38개의 홈런을 침으로써 양리그를 통틀어 투수 중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쳤다.

가네다가 소속된 고쿠데쓰는 매 시즌 단골하위의 약체팀이었다. 간판상품이라야 가네다와 최강 자이언츠와의 대결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무적을 자랑하던 전성기의 거인군 타선이 가네다만 만나면 맥을 추지 못하고 승수를 늘리는 제물이 돼 주었다.

가네다는 고쿠데쓰 팀의 명운을 짊어지고 있는 에이스답게 자존심이 유달리 강했고, 콧대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감독 의도와 관계없이 선발이든 구원이든 던지고 싶으면 던졌고, 내려오고 싶으면 내려왔다. 평소 연습은 물론 스프링 캠프에서도 자기가 짠 스케줄대로 독자연습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반찬은 자기가 조달해서 맘에 맞는 동료와 함께 따로 떨어져서 먹기도 했다. 그의 행동거지는 안하무인으로 비춰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그는 '가네다 덴노(金田 天皇)'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58년 희대의 거물신인 나가시마가 데뷔할 때의 유명한 에피소드는 40년이 흘러간 지금도 일본프로야구계의 이야깃거리로 돼 있다. 그해 스프링 캠프의 연습경기와 시범경기(이른바 오픈전)에서 자이언츠에 입단한 골든루키 나가시마는 양리그의 각팀 주전급 투수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공교롭게도 그해 자이언츠의 개막경기 상대가 고쿠데쓰였는데 흥분한 언론들이 "가네다도 나가시마에게는 별 수 없을 것이다"라는 투로 가네다의 자존심을 긁었다. 당대 최고투수를 자부하고 있던 그는 결연하게 선언했다. 그런 애송이한테 당하면 이 가네다의 이름이 운다. 전 타석 삼진으로 때려잡아 프로의 매운맛을 보여 주겠다.

드디어 전국 야구팬의 뜨거운 관심 속에 대망의 역사적 대결이 벌어졌다. 결과는 가네다의 예언대로였다. 나가시마는 난생 처음 경험해 보는 스피드와 컨트롤 그리고 타이밍을 전혀 맞출 수 없는 절묘한 피칭에 4타석 4연속삼진의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다. 4차례 타석에서 나가시마의 배트를 스친 투구는 파울볼 3개가 전부였다. 대전 영상그러나 가네다는 1965년 오랫동안 봉으로 삼아 왔던 거인군으로 이적해서 일본시리즈 우승의 환희도 맛보고 시리즈 9연속 우승에도 나름대로 공헌을 하였다.

가네다는 일본으로 귀화한 데 따른 뼈저린 소외감을 느낀 일이 있다. 1962년 가을 고쿠데쓰가 시범경기를 위해서 장훈 선수의 도에이 팀과 함께 서울에 원정을 왔을 때의 일이다. '관객들이 장훈 선수는 대단한 박수갈채로 환영을 해주면서도 비록 귀화는 했을지언정 어엿한 한국계인 자신은 일본인 선수와 똑같이 대접해 줘서 섭섭한 느낌을 받았다'는 심경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뒤 가네다는 1970년에 현역을 은퇴했다. 그 사이 20시즌 동안 944경기에 등판해서 5,526회 2/3 투구에 400승 298패, 승률 0.573, 피안타 4,120, 피홈런 379, 방어율 2.34의 통산성적을 남겼다. 그는 1974년 롯데 오리온즈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이어 일본시리즈에서는 주니치를 격파하여 한 차례 일본선수권을 획득하기도 했다.

한편 여러 해 동안 불펜에서 자신의 연습투구를 받아 주다가 왼손 엄지손가락 마비의 후유증을 얻은 고교동창생 포수가 고향에서 주유소를 차릴 때 적지 않은 자금을 쾌척해서 개업을 도와준 미담도 지니고 있다. 야구해설과 잡지사 대담프로 사회를 맡아 능숙한 화술과 송곳 같은 직설로 현역시절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때도 있었으나 그 뒤로는 활동이 뜸하다. 가네다도 1988년 명예전당에 헌액이 됐다.

그 뒤 2019년 10월 6일에 급성 담관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서거했다. 향년 86세.

3. 기타

3.1. 일본 내 프로야구 단체 사조직 설립 주도

일본프로야구 구회 설립을 주도했고 일본에선 명구회가 거의 가네다의 사조직처럼 생각될 정도이다. 명구회 사무실도 가네다 소유 건물 안에 있다고.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명구회의 정식 명칭은 사실 '쇼와 명구회'로, 굳이 '쇼와'라고 한 까닭은 가네다보다 나이가 많은 메이지나 다이쇼 시대 출생한 야구 선수들의 가입을 막기 위해서(...). 그래서 실제로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의 레전드들은 명구회에 가입이 안되어 있다(...). 최근에는 헤이세이 시대 출생한 야구선수들이 데뷔함에 따라 회칙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헤이세이 출신 야구 선수들이 명구회에 가입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3.2. 동생 가네다 도메히로

친동생인 가네다 도메히로(金田留広, 한국명 김말홍)도 투수 출신의 프로야구 선수였다. 형이 감독으로 있던 롯데 오리온즈에서 뛰기도 했고, 한 시즌 20승 경력도 있는 에이스급 투수였다. 현역 시절의 도메히로는 두 번의 다승왕(72, 74), 한 번의 MVP, 통산 128승에 3.25의 방어율이란 준수한 성적을 남겼지만, 형인 마사이치는 동생을 A급 투수는 아니었다고 인터뷰에서 언급하였다. 비교대상이 자기 자신 이라면 할말 없지만(...)

3.3. 최동원과의 관계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의 고등학교 시절을 보고는 자신의 양자로 들어오면 일본에서 뛸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는 루머가 돈 적이 있다. 본인은 인터뷰에서 그런 적 없다고 부정했다.
2012년 10월 26일 방영한 MBC 스포츠 스페셜 다큐에서 김시진의 증언을 보았을 때 단순히 일본 진출방법을 설명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3.4. 오치아이 히로미츠 와의 관계

오치아이가 롯데 오리온즈 루키 시절 확립한 다른 야구인들이 보기에 독자적이다 못해 이상한 타격폼을 두고 가네다가 "아마추어도 저렇게 스윙하지는 않는다" 라며 악평했고,[6] 이에 감정이 상한 오치아이는 이후 다른 야구 선배들을 지칭할 때 이름 뒤에 꼬박꼬박 '상(さん)'을 붙이며 예우했지만 가네다만은 그냥 상도 안붙인 채 이름을 부르는 등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고, 통산 2000안타를 넘겼음에도 가네다가 주도한 명구회에 가입하지 않는 등 악연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오치아이도 가네다의 통산 400승에 대해선 "일본 프로야구에서 왕정치의 868홈런과 함께 영원히 깨기 힘든 대기록" 이라며 칭송하였다.

3.5. 식성

여담으로 삼계탕을 굉장히 좋아하고 또한 잘 만든다. 그의 어머니에게 직접 배웠다고 하는데, 고쿠데츠로 이적한 토요다 야스미츠는 그 맛에 감동하여 김경홍에게 부탁해 그 제조법을 배우기도 했다. 요미우리로 이적한 이후에는 도이 소죠나 다카다 시게루 등이 김경홍의 모친에게 김치찌개를 비롯한 여러 한국 요리를 배워서 체력 증진에 활용하기도 했다.

3.6. 몸관리 비법

스포츠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자신만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몸 관리 방법을 창안하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프로야구 초기의 장호연을 떠올릴 수 있을 듯.

3.6.1. 컨디션 조절

가네다는 왼팔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서 일상 생활에서도 꽤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데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 잠을 잘 때 왼쪽 팔의 팔꿈치를 보호하기 위해 서포터를 해서 온도 저하에 대비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 현역 선수 시절 경기 도중에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에도 왼손에 수건을 감아 보호한 채로 덕아웃에서 뛰쳐 나왔다. 술을 마시고 있거나 탁자를 두드릴 때에도 언제나 왼손에는 수건이 감겨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 가네다의 아들이었던 겐이치는 방송에 출연하면서 “아버지는 절대로 왼손으로 안아준 적이 없다”고 밝혔다.
  • 직접 운전하게 되면 이런 저런 신경이 쓰이자 컨디션 저하가 될 것을 꺼려 운전 기사를 고용해서 경기장까지 왔다. 차를 탈 때에는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왼쪽 어깨나 왼쪽 팔을 차갑게 할 것에 대비해서 절대로 왼쪽에 앉지 않았다.
  • 수염을 깎을 때도 손끝이 베일 우려가 있는 면도기를 사용하지 않는 대신에 전기 면도기를 사용했고, 외출시에도 발끝이 드러내게 하는 샌들을 절대로 신지 않았다.

3.6.2. 트레이닝

하체 단련에 중점을 두고 현역 선수 시절에 러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하체가 튼튼하면 위기도 없다. 하체가 약한 선수는 결코 투수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체 훈련 방법은 꽤나 혹독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는데, '연습벌레'로 유명했던 한신 타이거스의 '자토펙' 투수 무라야마 미노루도 올스타전에서 가네다를 만나 그의 트레이닝법을 배우려 했지만 너무나 혹독한 방법임을 알게 되자 죽는 소리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아니 무라야마 별명이 다이나믹 로동한 자토펙인데 본인이 그렇게 뻗어버리면(...) 감독 시절에도 선수들에게 하체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데이터와 수싸움을 중시하는 두뇌파였던 노무라 카츠야는 가네다의 야구를 '달려라 달려 야구'라고 비아냥거렸다는 일화가 있다.

3.7. 쇼맨십

선수시절과 감독시절 쇼맨십이 대단했다. 삼진을 잡고 셀러브레이션을 하는 것은 기본이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런왕 오 사다하루와 맞대결할 때는 오의 외다리 타법을 따라한 외다리 투구법을 시전하여 플라이 아웃으로 그를 잡아낸 바 있다.(...)지금이라면 100% 보크. 비인기구단 롯데 오리온즈 시절에는 상술했던 대로 사실상 팀을 대표하는 슈퍼스타였고, 팀이 점수를 내거나 호수비를 펼칠 때, 아니면 선수들이 어이없는 실수를 하거나 심판의 판정에 항의할 때,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졌을 때에도 커다란 제스쳐로 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감독 시절의 영상. 특히 감독 시절에 자기 투수의 투구에 맞고 리미터가 해제된 외국인 선수가 몆차례나 달려들다 넘어지자 냅다 달려들어 인생 최고의 사커킥을 날린것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명장면(?)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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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러나 클레멘스나 마크 맥과이어의 경우 백인인지라 미국에서 쉴드를 쳐준다. 맥과이어가 매년 호프집 투표에서 20%의 표를 받는걸 보면 말 다했지... 다만 더 이상 득표율이 오르지 않아 명전은 힘들듯. 반면에 배리 본즈는 미친듯이 까이고 있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로켓은 부상으로 인해 보스턴에서 버려진 뒤 토론토로 이적하면서 약을 빨아 부활해서 이 스탯을 쌓은 것이지만, 정작 배리 본즈는 약 빨기 전에도 500-500이 가능했던 5툴 플레이어였다.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 두 놈이 약을 빨아 본즈에게 관심을 안 줘서 삐져서 약을 빤거지
  • [2] 1990년 6월 23일 세이부전, 이때 항의하면서 구심을 폭행해 퇴장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경기가 끝나자 가네다 마사이치는 "어쨌든 심판이 엉터리다 자기가 말한 게 옳다는 식의 심판이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더하겠다"라고 말하자 그날 구심을 맡았던 심판이 "이런 인간이 있는데서 어떻게 심판을 하겠느냐"며 격노 급기야 1990년 시즌도중에 사표를 내는 일이 발생했다. 여담으로 이날 구심을 맡았던 심판은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퇴장이다, 심판만이 아는 프로야구"란 책을 발간함으로써 자신의 심경 등을 책에 적었다-출처 위키백과 일본어판 다카키 도시아키 항목 http://ja.wikipedia.org/wiki/高木敏昭
  • [3] 퍼펙트 게임 달성 당시 최연소였지만, 이후 1960년 8월 11일 시마다 겐타로(다이요 훼일즈)가 한신 타이거스와의 홈게임에서 1-0 완전시합을 이끌어내어 현재까지 최연소 달성(20세 351일) 기록으로 남아있다. 여담으로 가네다는 일본프로야구의 퍼펙트 게임 달성자 중 유일한 좌완투수다.
  • [4] 그냥 삼진도 아니고 연속 삼구삼진이다. 경기 중단 이후 한가운데 속구로 다 잡아내겠다는 다짐을 한것을 지킨 것.
  • [5] 대표적인것이 15년 연속 두 자릿수 패전. 헌데 고쿠데츠가 워낙 약팀이라...
  • [6] 반면 장훈은 "저 정도 타격폼 이면 충분히 잘 칠수 있다" 며 그 타격폼을 지키라고 격려했다.